
작성일 : 2018-07-26 11:13
1374(공민왕 23)~1418(태종 18) 시호(諡號)는 소도(昭度), 문하평리(門下評理) 승순(承順)의 아들. 고려 우왕 때 생원(生員)으로서 사예(司藝) 류백순(柳伯淳), 생원 박초(朴 礎) 등과 함께 상소하여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므로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儒學者)들을 존중하여 유학(儒學)을 권장하라고 주장했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이듬해 집의(執義)를 거쳐 1406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서 충청도 경차관(忠淸道敬差官)이 되어 왜구(倭寇)에게 미곡 운반선을 탈취당한 충청도 안문도절제사(忠淸道安問都節制使) 최 이(崔 迤) 등 지방관 4명을 처벌했다.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한성 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 1408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완산 부윤(完山府尹)을 겸직, 다음해 참지의정 부사(參知議政府使)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制使)로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겸한 뒤 1412년 한성 부윤에 재임되었다.
다음해에 대사헌․공조 판서, 1415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재직중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재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리(田理)에 방귀(放歸), 이어 적성(積城)에 안치(安置)되었다. 1417년 풀려 나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평양(平壤)에서 객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