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산신씨시조(平山申氏 始祖),장절공(壯節公),신숭겸(申崇謙),유허비(遺墟碑),용산단(龍山培)

작성일 : 2018-03-15 17:04 수정일 : 2018-03-15 18:06

 

장절공(壯節公) 사적(事蹟)

정명[貞明 :후양(後梁) 말제(末帝)의 년호(年號)]4년[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元年)] 서기 918년 6월 14일 에 기장(騎將)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은밀히 일을 꾸미고 밤중에 태조의 집을 찾아가서 그를 임금으로 추대(推戴)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이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는 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오면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외치며 말하기를 "왕공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하였다.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고 궁예(弓裔)가 이 소식을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했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하고 미복(微服)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 8월 11일 조(詔)하기를 "인신(人臣)으로써 천시(天時)를 돕는 기략(奇略)을 운용(運用)하고 세상을 뒤엎는 공훈을 세운 자들에게는 모토(茅土)를 나누어주고 후한 질록(秩祿)과 높은 관급으로써 포상(襄賞)하는 것은 곧 백대(百代)의 떳떳한 전법(典法)이요 천고의 커다란 규범인 것이다. 짐(朕)이 측미(側微)한 데서 나서 재예(才藝)와 식견(識見)이 용졸(庸拙)하나 진실로 여망(輿望)에 힘입어 제위(帝位)에 올랐으니 그 포악(暴惡)한 임금을 폐(廢)하던 때에 당하여 충신(忠臣)의 정개를 다한 자에게는 의당 포상을 행하여 훈노(勳勞)를 권장(勸奬) 할 것이다. 홍유와 배현경과 신숭겸과 복지겸을 일등(一等)으로 삼아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피욕(錦緯綺被褥) 능라(綾羅) 포백(布帛)을 차등(差等)있게 급여하라" 하였다.

고려 태조 10년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지금 문경군 산북면 근품리)을 공격하여 성을 불사르고 신라(新羅) 고울부(高鬱府: 지금 영천지방)를 습격(襲擊)하여 교기(鄧畿)에 까지 핍박(逼迫)하니 신라(新羅)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급변을 고하는 지라 "임금이 시중 공훤(公萱)과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新羅)가 우리와 더불어 좋게 지낸 지가 이미 오래인데 이제 급변이 있으니 이를 구원(救援)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훤(公萱) 등을 보내어 군사 1만(萬)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이 때 신라왕[新羅王 : 55대 경애왕(景哀王)]은 비빈(妃嬪) 종척(宗威)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출유(出遊)하여 주연(酒宴)을 받들고 오락(娛樂)을 하다가 문득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 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은 달아나 성남(城南)의 이궁(離宮)에 숨고 시신(侍臣)과 영관(伶官)과 궁녀(宮女)들은 모두 붙잡혔다. 견훤(甄萱)이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약탈(掠奪)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 거처(居處)를 하면서 좌우(左右)로 하여금 왕을 찾아내게 하여 군중(軍中)에 가두어 두고 핍박(逼迫) 하여 자진(自盡)토록 하고서 억지로 왕비(王妃)를 능욕(凌辱)하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빈첩(嬪妾)들을 난행(亂行)하게 한 다음 왕의 표제(表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고 왕의 아우 효염(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 등 을 사로잡고 자녀 백공(百工)과 병장(兵杖) 진보(珍寶)를 모조리 약탈(諒奪)하여 돌아갔다.

장절공 악강유허비각 (壯節公 嶽降遺墟碑閣)

소재: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179-3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이 소식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기 5천을 거느리고 견 훤을 공산(公山) 동수(桐藪 :지금의 달성군 공산면)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불리하매 견훤의 군사가 임금을 포위하여 심히 급박한지라 대장(大將)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제군이 패배(敗北)하니 임금은 단신(單身)으로 모면하였다.

고려 성종 13년 여름 4월 갑진(甲辰)에 태묘(太廟)에 체(禘 : 왕이 조상의 제사를 올리는 대제)할 때 대종(戴宗)을 제5실에 모시고 공신(功臣) 배현경과 홍유와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을 태조에게 배(配)하였다.

고려 현종 18년 여름 4월 임오(壬午)에 태묘를 배알하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과 유금필 최응을 태조에게 배향(配享)하였다.

고려 예종 15년 겨울 10월 신사(辛巳)에 팔관회를 설하고 임금이 잡희(雜戱)를 보는데 국초에 공신인 김낙과 신숭겸 우상(偶像)이 있으매 임금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공양왕 원년 12월 계해(癸亥)에 왕이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 공신을 포상한 것을 고하는 글에 이르기를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거용(擧用)하여 우왕(禹王)의 구강(舊疆)을 이어받았고 태갑(太甲)이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둠은 이윤(伊尹)의 훈고(訓告)를 자뢰(資賴)함이며 이척(伊陟)이 태무(太戊)를 도와 상제(上帝)를 감격(感格)케 하였나이다.

태공(太公)이 응양(鷹揚)하여 천하 (天下)가 주(周)나라를 조종(朝宗)하매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니 제(齊)나라에 봉후(封侯)한 것은 맹부(盟府)에 간직되어 있나이다. 그 후손 환공이 천하를 바로잡아 주나라를 존상(尊尙)하니 은(殷)나라의 역년(曆年)은 6백이요 주나라는 그 역수(曆數)보다 더하여 국조(國祚)가 장구(長久)함이 후세에 미칠 바가 없음은 실로 이윤(伊尹)과 여망(呂望 : 여상(呂尙) 태공(太公望)]의 보필(輔弼)한 공(功)을 잊지 않음과 그 자손(子孫)의 상현(象賢)의 충(忠)을 얻음에 유인(由因)함이외다. 한(漢)나라는 삼걸(三傑)이 자뢰(資賴)하였는데 장량(張良)이 제자(帝者)의 스승이 되었으되 도(道)를 논하지 않고서는 그 피곡(避穀)함을 청허(聽許)하였으며 소하(蕭何)는 도필리(刀筆吏)로 마침내 상국(相國)이 되었으되 옥(獄)에 갇혔고 한신(韓信)은 멸족(滅族)되고 경포(黑京布)는 반역(反逆)하여 화살이 제(帝)의 몸을 맞혔으되 나라에 그렇다 할 사람이 없어 재전(再傳)에 중절(中絶)되니 유씨(劉氏)도 거의 진(秦)이 될 뻔하였나이다.

상주(商周)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아형[阿衡:재상(宰相)] 상부(尙父)로 후사(後嗣)를 보필(輔弼)하게 함으로써 지치(至治)에 이르게 한 것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서로 거리(距離)가 먼 것이니까. 성조(聖祖)가 배현경 홍유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 등 6공(公)의 공훈(功勳)에 보답하여 그들의 형상(形象)을 도(圖)하여 어진(御眞)과 무주 대하게 하고 함께 태묘(太廟)에 향사(享祀)하여 춘추(春秋)로 어김이 없게 하였나이다."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체협(諦祫)에 공(功臣)를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는데 태조실(太祖室)에는 태사(太師) 개국(開國) 무렬공(武烈公) 배현경 (裵玄慶)과 태사(太師) 개국(開國) 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 태사 (太師) 개국(開國)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태사(太師) 개국(開國)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태사(太師) 개국(開國) 충설공(忠節公) 유검필(庚默弼), 태부 (太傅) 희개공(熙愷公) 최응(崔凝)으로 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충선왕(忠宣王)이 복위(復位)하여 교(敎)하기를 “태조(太祖) 대(代)의 6공신과 벽상공신과 현종(顯宗)이 남행(南幸)하였을 때에 시봉공신(侍奉功臣) 등의 내외(內外) 현손(玄孫)의 현손(玄孫)은 예(例)에 따라 한 호(戶)에 1명에게 초직(初職)을 허(許)하고 태조대(太祖代)의 위(衛)사(社)공신(功臣)인 김락과 김철과 신숭겸 및 성종대의 공신 서희와 현종대의 공신 하공진과 노(盧) 전(戩)과 양규 등의 내외 현손의 현손은 예에 따라 한 호에 한 명에게 초직(初職)을 허(許)하고 인종대에 공신 최사전은 계책을 떨쳐서 난을 구하고 그 공이 중대하므로 그 내외 현손의 손자를 별록하여 서용하고 부왕 대 기사년 및 4년에 수종한 신료는 공로가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서용(敍用)하여 길이 자손(子孫)에게 미치세 하라”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이라 하였으며 광해인인데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고려 태조 10년 대조가 견훤과 더불어 공산 동수에서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자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심히 위급하였는데 이 때 숭겸이 대장으로써 원보인 김락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가 몹시 슬퍼하고 시(論)를 장절이라 하였으며 그의 아우 능길과 아들 보와 낙의 아우 청로 모두 원윤(元尹)을 삼고 지묘사를 지어서 명복을 돕게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藍)」에 이르기를 고려왕이 신숭겸과 김락의 죽음을 슬퍼하여 난의 아우 철과 능길과 아들 보로 모두 원윤으로 삼고 지묘사를 지어 명복을 돕게 하였다. 숭겸은 광해인인데 용맹하고 장대하였으며 항상 정벌에 종사하여 공이 있었다. 뒤에 장절(壯節)이라 시(諡)하고 고려(高麗)태조(太祖)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고려 신숭겸은 본시 전라도 곡성현 사람인데 태조가 여기에서 사성하였다. 속전하기를 숭겸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서 사냥을 나갔다가 삼탄(三灘)에 이르렀는데 낮참에 마침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누가 이를 쏘겠는가” 하니 숭겸이 말하기를 “신이 쏘아 보리다." 하였다. 태조가 궁시와 안마를 내리자 숭겸이 말 하기를 몇째 기러기를 맞추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넷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소라”하였다. 숭겸이 명에 응하여 과연 시키는 데로 맞히는지라 태조가 탄복하고 곧 명하여 평주를 사(賜)하여 관향으로 삼게 하고 아울러 기러기를 쏘던 근방의 땅 300결을 하사하여 자손 대대로 그 조를 거두게 하고 인하여 그곳을 궁위(弓位)라고 이름하였다. 여타는 춘전부조에 상세하다.

미리사(美理寺)는 해안현에 있는데 혹은 이르데 해안의 일명이 미리(美理)라고도 한다. 신라의 교기를 핍박하자 경애왕이 고려에 구원을 칭하였더니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왕도에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국고의 진보와 병장과 남녀 백공의 정교한 자들을 모조리 빼앗아 데리고 돌아갔다. 이에 고려 태조가 정기 5천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훤올 맞아 크게 싸우다가 장군 김낙과 신숭겸이 죽고 제장이 패배하였으며 태조는 겨우 단신으로 모면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 견훤(甄萱)과 더불어 공산 동수에서 싸우다가 불리하여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심히 위급한지라 숭겸이 힘껏 싸우다가 죽으니 태조가 이를 슬퍼하여 시(諡)하기를 장절(壯節)이라 하였으며 태조(太祖)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숭의전은 군읍 서쪽 5리쯤에 있다.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군에 사묘를 게우고 고려태조와 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을 제향하고 체토를 주게 하였더니 세종 7년에 이르러 유사가 말하기를 “국가의 종묘애도 5실을 제사 지내는데 전조의 사당에 8실을 제사지 내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다만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만을 남겨두고 춘추 2중(仲)으로 향축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고 이어서 그 사묘를 이름하여 숭의전이라 하여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로 배향하였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명신(名臣)행적(行蹟)에 신숭겸이 전사하자 태조가 그 시신을 찾을 것을 명하였는데 머리가 없어져서 판별할 수 없으므로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과연 생시 모습과 같았다. 조복을 갖추어 앉게 하여 태조가 몸소 제례를 행하면서 몹시 슬퍼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신숭겸이 동수의 싸움이1서 죽으니 팔관회를 배 풀면서 오직 전사한 공신들이 함께 반열에 없음을 개 연하게 여 기 어 유사에게 명하여 신숭겸과 김락의 상을 짚으로 묶어서 만들고 한복을 입히어 반열에 따라 앉게 한 다음 명하여 주식을 내리니 그 술잔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이 일어나 서 배례함이 생시와 같았다.

예종(睿宗) 때에 이르러 임금이 서도를 순행할 적에 두 가상이 잠(簪)을 꽃고 자복을 입고서 말을 타고 뛰면서 뜰에서 돌아다니는지라 임금이 기이하게 여겨 이를 물으니 측근이 말하기를 “이는 대사 공신인 대장군 신숭겸 김락 입니다." 하매 임금이 감개한 나머지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할 것을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문종 2년 임신 12월 신축에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계(呈啓)에 의거하여 임금에게 청하거늘 “전조의 태조 개국 무열공 배현경, 충렬공 홍유, 무공공 복지겸, 장절공 신숭겸의 4인은 모두 고려 태조를 추대하고 삼한을 통일하여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태조 개국 충절공 유금필은 북쪽 강토가 오랑캐들의 침범한 바 되었음을 북방이 무사하였고 고려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여러 번 싸워 이김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모두 금필의 공이며 종시 총우(寵遇)함도 제장들이 따를 수 없을 만한지라 함께 태조에게 배향하였으며(장위공 서희(徐熙)로 부터 문중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까지의 사우 생략) 이들은 역대 배향(配享)한 공신(功臣)가운데서도 특히 생민(生民)을 위한 공훈(功動)이 있었으니, 왕씨를 봉사할 때 같이 향사(享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 약전

장절공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평산신씨시조(平山申氏 始祖)이다. 서기 918년 배현경 (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장군 등과 더불어 의기(義旗)를 들어 포악한 태봉국(泰封國 왕(王)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 태조(太祖)를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삼한 통일을 위한 여러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우셨고 서기 927년 9월 후백제 견훤(甄萱)이 국운 이 기울어져 가는 신라를 침공하여 왕을 시해(弑害)하고 도읍을 유린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태조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장절공 신순겸 장군과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황급히 출전하였다. 대구 공산 동수에 이르러 견훤군과 접전을 하게 되었으나 매복한 적군에 포위되었고 전세(戰勢)가 극히 불리하여 위급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장군께서는 위왕대사(爲王代死)할 것을 결심하고 태조 왕건을 피신케 한 후 대조의 갑옷을 갈아입고 어가(御駕)에 올라 왕으로 위장하여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으로 착각한 적의 집중적 공격으로 급기야 비장하게 순절 하였고 두상(頭上)은 견훤군이 취해 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태조 왕건은 장군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고 잃어버린 두상을 만들어 장례하였으니 이곳이 소양강이 굽어보이는 춘천 방동 묘소이다.

이 묘소는 원래 도선(導詵) 국사(國師)가 태조(太祖)의 묘소(墓所)로 잡은 터였는데 태조께서는 생명을 대신한 장군에게 예장지(禮葬地)로 하사해 봉분(封墳)을 셋으로 만들고 원당(願堂)을 세우도록 하였다. 전적지 대구 공산 동수에는 순절지(殉節地)에 단(壇)을 축조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공의 영정(影禎)을 모시고 명복(冥福)을 빌게 하였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 동상 건립문

의기(義旗)를 들어 고려를 개국하시었고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위업을 이룩코자 위왕대사(爲王代死)하신 시조 (始祖) 장절공(壯節公)께서 순절하신지 108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우리 선조님들은 위대한 유적을 소중히 보존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70만 후손들이 두상없이 예장(禮葬)되신 묘소나 영정 앞에 설 때마다 비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참을 수 없어 동상을 건립하여 위용을 우러러 뵈옵고 위령의 제단으로 삼고자 2002년 11월 26일 대종중 정기총회에서 춘천묘역. 대구 표중재. 곡성 용산재에 3기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동년 12월 9일 동상건립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각종 문헌과 고증재료는 물론 전국 동상의 실태를 참조 하여 동상 기본계획을 수립. 서정남(徐正男) 문화재 전문 설계사에게 설계를 의뢰하였고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하여 많은 노력 끝에 춘천은 묘역주변 주차장 부지, 곡성은 용산단 경내, 대구는 전직지인 봉무동 파군재 삼거리 교통섬으로 동상건립 위치가 허가되었으며 대구는 시 당국과 협의하여 동상건립 후 기부 채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04년 10월 자손만대에 영원히 보존하여야 할 시조 동상이 준공되었습니다.

유허비(遺墟碑): 고종 5년(서기 1868년) 무진(戊辰)에 원림(園林) 전토(田土)를 사들여 장절공이 탄생한 터를 보존하고 광무(光武) 원년(元年)(서기 1897년) 그 터에 비(碑)를 세우니 곧 악강유허비(嶽降 遺墟碑)이다.

이 비(碑)는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이 갖추어져 있는데 비(碑) 전면(前面)에는 "高鹿太師 壯節申公 遺塘碑" 라고 썼고 비문(碑文)은 판서(判書) 기선(箕善)이 짓고 글씨는 내무협변(內務協辨) 석희(奭熙)가 썼다.

용산단(龍山培): 전남 곡성읍에서 남쪽으로 50리 쯤 되는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가 바로 고려태사(高麗太師) 장절신공(壯節申公) 휘 숭겸(諱 崇謙)이 탄생한 곳이다. 고종 5년(서기 1868년) 무진(戊辰)에 후손(後孫) 명희(命熙) 가 보국(輔國) 신헌(申櫶) 판서(判書) 신석희(申錫禧)와 의론(議論)하여 원림(園林)과 전토(田士)를 사들이고 초수(樵收)를 금하여 수호해 오다가 고종(高宗) 정유(丁酉 年)(서기 1897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서기 1929년에 이르러 단(壇)을 모우고 용산단(龍山壇)이라 하여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으며 서기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대구 동수(桐藪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는 고려 태조 10년(서기 927) 가을에 태조가 경주를 노략하고 돌아가는 후백제 견훤을 맞아 싸웠으나 오히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장정공이 태조를 구출하기 위하여 태조(太祖)를 숨기고 대신(代身) 싸우다 전사(戰死)한 곳이다.

태조는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 비방동(悲芳洞)(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하고 공이 전사한 자리에 단을 모아 표식하였으니 곧 순절단(殉節壇) 일명 표 충단(表忠壇)이다.

그 후 순조(純祖) 19년(서기 1819년) 기묘(己卯)에 대구(大邱) 영장(營將)인 후손 의직(義直)이 단(壇)을 3단으로 중수(重修)하고 단소(壇所) 내에 “高麗壯節申公 殉節之地”라고 현각(顯刻)한 비석을 세웠다. 또한 철종(哲宗) 7년(서기 1856년) 병진(內辰)에 순절비(殉節碑) 보호각(保護閣)을 창건(創建)하였으며 고종(高宗) 9년(서기 1872년) 임신(丁申)과 서기 1928년 무진(戊辰) 에 중수(重修)하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4면의 원장을 넓히는 보수를 했다. 순절단은 서기 1982년 3월 3 일 대구광역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춘천(春川) 묘소(墓所) 사실(事實): 춘천은 원래 맥국(貊國)인데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6년 우수주(牛首州)로 하여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문무왕(文武王) 때에 수약주(首若州)라 칭하고 겅덕왕(景德王)이 삭주(朔州)로 고쳤다가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개칭했다. 고려 태조 23년에는 춘주(春州)로 하였고 성종(成宗) 14년에 안변부에 예속(隸屬)되고 신종(神宗) 때에는 안양도호부(安賜都護府)로 높였다가 뒤에 지춘주사(知春州事)로 내리었으며 조선조 태종 13년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었다가 도호부(都護府)로 예승(例陞)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피건대 춘천부 인물조 우거(寓居)에 장전공의 사적(史蹟)이 실리어 있고 또 총묘조(塚慕條)에는 부서(府西) 10리에 공의 묘가 있다고 하였으며 화악산은 부서 90리에 있는데 영평현에서는 이를 백운산으로 일컫는다 하였다.

위 기록이 보여주듯 장전공 묘소는 광주산맥의 일지(一支) 화악산(華岳山) 묏부리가 동으로 달리다가 북한상의 상류인 소양강 물굽이를 굽어보는 곳임을 알겠거니와 전설에 따르면 이는 본시 옥룡자 도선의 소점(所占)으로 고려 태조의 신후지지(身後之地)였다는 것이다.

서기 927년 공산(公山) 동수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순국(殉國)한 장절공을 애석히 여긴 고려 태조가 공의 두면을 조각하여 이곳에 예장하면서 방동(方洞) 장생내(長栍內) 및 이산현 촌내에 각 9천보의 전토(田土)를 내리고 또 원당(願堂)을 창(剙)하여 3백묘를 내리어 명복을 빌게하는 동시에 수묘군(守墓軍) 30호(戶)를 두기로 했었는데 이래(爾來) 천여 년간에 누차(屢次)의 병화(兵禍)를 겪었으되 향화(香火)를 끊인 적이 없었다.

순조(純祖) 5년에는 외예(外裔)인 충문공(忠文公)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이 찬(撰)하고 후손(後孫) 자하(紫霞) 위(緯)가 서(書)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서기 1975년부터는 묘소 전역에 걸쳐 조경사업이 추진 중에 있으며 1976년 6월에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