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원회산황씨(昌原(檜山)黃氏),공희공(恭僖公),황석기(黃石奇),창원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13 21:03 수정일 : 2018-03-13 21:56

시조 및 관향의 연원

창원(회산)황씨시조는 황석기(黃石奇)이다. 시호(諡號)는 공희(恭僖)이고 호는(號) 회암(檜巖)이며 고려 26대 충숙왕(忠肅王) 때 27대 충해왕비(忠惠王妃) 덕영대장공주(德寧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여 처음 우리나라로 와서 고려왕(高麗王)으로부터 본관(本貫)을 의창(義倉:지금의 昌原)을 하사(下賜)받아 시조로 모시고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창원(昌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쪽에 위치한 산업도시이며 경남도청 소재지이다. 고대(古代) 금관가야(金官伽倻:경상남도 김해지방에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던 6가야 중의 하나)에 속했었다. 창원은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檜原縣)의 합명(合名)인데 의창현은 신라의 굴자군(屈自郡)을 경덕왕 때 의안(義安)으로 고치고, 회원현은 신라의 골포현(骨浦縣)을 경덕왕 때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1018년(현종 9) 의안․합포를 모두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

그 후 의안은 의창(義昌)으로, 합포는 회원(檜原)으로 고쳐서 모두 현령(縣令)으로 승격하였고, 1413년(태종 13)에는 의창현과 합포현을 합쳐 창원부(昌原府)가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창원군이 되었다.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시책에 따라 창원군의 상남면과 웅남면, 창원면의 일부를 마산시(馬山市)에 편입시켰고 1980년에는 창원시가 되었다.

시조 황석기(黃石奇)는 충숙왕 8년 1339년에 조적의 난(曺頔亂)을 토평(討平)하고 충혜왕 복위 3년 지신사((知申事)에 서임(敍任)되어 추성좌리공신 일등으로 녹훈벽상(錄勳壁上)에 오르시고 원(元)나라에 살고 있던 아버지 보(補)를 모시고 와서 고려왕으로부터 봉작(封爵)과 토전(土田)을 하사 받았다.

충혜왕 5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서연관(書筵官)이 되시고 29대 충정왕(忠定王) 1년 7월에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승서(陞敍) 8월에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이 되어 강능군(江陵君: 고려 30대왕이 된 공민왕)이 원나라에 가서 있을 때 1348년 28대 충목왕(忠穆王)이 승하(昇遐)하자 서연관(書筵官)으로 정승(政丞 이제현(李齊賢)과 같이 29대 충정왕(忠定王)의 승습(承襲)을 받으러 갔다가 이제현 공은 돌아오고 공희공은 원나라에 강릉군(江陵君:즉위하여 30대 공민왕)과 같이 있다가 강능군이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와 혼인(婚姻)을 성사시키고 귀국하자 다시 배행(陪行)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공민왕 5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경천흥(慶千興)과 더불어 기철(奇轍) 일당을 토주(討誅)하시어 찬성사(贊成事)에 오르시고 관제(官制) 개정(改正)으로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다음해 정월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公)은 장남 황상(黃裳)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에 파천(播遷)하였다가 다음해 8월 왕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원암역(元巖驛:지금의 보은)에 이르러 이제현 등 원로(元老) 문신(文臣) 6인과 함께 칠로연시(七老讌詩)를 지었다.

9월에는 청주(淸州)에 이르러 왕의 명(命)으로 여러 문신(文臣)과 같이 공북루시(拱北樓詩)를 응제(應製)하였다. 1364년 8월 15일 졸(卒)하였다.

재관(在官) 40여 년 동안 충숙(忠肅),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恭愍) 등 5왕을 역사(歷事)하면서 많은 위업과 공훈을 세우고 위계(位階)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에 승서(陞敍)되었다. 공을 추모하는 향사는 음력 10월 10일 함안군(咸安郡) 군북면 모로리 죽산재(竹山齊) 제단(祭壇)에서 제향(祭享)을 올리며 매년 한식일(寒食日) 죽산사(竹山祠)와 신풍리 동산재(東山齋) 世德祠와 함안(咸安) 칠원(漆原) 와룡재(臥龍齋) 회원사(檜原祠)에서 매년(每年) 음력(陰曆) 9月 9日에 추향(秋享)으로 유림(儒林) 봉사(奉祠)하고 있으며 季氏 黃石柱씨(昌原黃氏 大相公 始祖)는 各種 文獻에 의하면 石奇氏의 同生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시조의 아들 황상(黃裳)은 시호(諡號)가 공정(恭靖)이고 고려조 충혜왕 때 호군(護軍)이 되고 1354년 공민왕 초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원나라의 요청을 받고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정세운(鄭世雲) 최영(崔塋)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 사주(四州)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亂軍)을 토평(討平)하고 1356년 공민왕 5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고 1358년 기철(奇轍) 일당(一黨)을 아버지 [석기]公 과 함께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공민왕 7년 판추밀원사(判樞院事)에 올라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다.

1359년 중국에서 홍건적이 일어나 홍건(紅巾)으로 취장하고 모거경(毛居敬)을 두목을 삼아 3,000난도가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義州) 지방을 함락시켰다. 이때 공(公)이 이방실(李芳實)장군 등과 함께 적을 토벌하여 격퇴시켰으나 1361년 다시 홍건적 10만 명이 자비령 방책(防柵)을 부수고 왕도(王都) 개성(開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황제는 이천(利川)을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공의 아버지 석기(石奇)公 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고 교주능도(交洲陵道) 도만호(都萬戶)가 되었고 이듬해 정세운(鄭世雲) 안우(安佑) 이성계(李成桂) 최영(崔塋)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인솔하고 홍건적을 대파하여 왕도 개성을 탈환하고 왕이 환가(還駕)하였다.

공은 이러한 공(功)으로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에 올라 호성수복(扈聖收復)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고 참지문하성사(參知門下省事)에 승진한 후 추충분의익찬공신(推忠奮義翊贊功臣)이 되었다. 이에 문하찬성사를 지내다가 사직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1364년 (공민왕13년) 동북면 도순토사(東北面 都巡討使)가 되어 역신(逆臣) 최유(崔濡)가 기철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에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奇皇后)를 설득하여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왕으로 추대하고 선천(宣川)까지 침입하여온 홍건적을 이성계를 휘하 부장(副將)으로 삼고 격퇴하였다. 그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功)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奉訓大夫) 경정감승(經正監承)의 관직을 받고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推忠奮義輔理翊贊功臣)에 책록되었다.

1377년(우왕 3년) 의창군(義昌君)으로 피봉되고 서강 도원수(西江都元帥)가 되어 왜구(倭寇)를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공(公)은 무예에 능하고 용맹이 절윤(絶倫)하여 의적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워 역대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궁술(弓術)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명궁으로 이름을 떨쳐 원순제(元順帝)도 공의 궁술을 관람하고 선차에 격찬하며 칭송했다. 유학(儒學)에도 정려(精勵)하여 당시 성리학자로 유명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도 교우(交友)가 깊었으며 유교적 윤리관에 있어서도 이승로(李承老) 이목현(李牧玄) 형제와 더불어 유교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382년 우왕 8년에 졸하였다.

공을 추모하는 향사는 음력 10월10일 함안군(咸安郡) 군북면 모로리 죽산재(竹山齊) 제단에서 제(祭)을 올리며 매년 한식일 죽산사에서 유림봉사(儒林奉祀)하고 또한 진주 동산제 세덕사(世德祠)와 함안 칠원 와룡제 회원사(檜原祠)에서 매년 음력 9월9일 추행 유림(儒林) 봉사하고 있다.

 

황윤서(黃允瑞) 공정공 상(裳)의 자(子) 윤서(允瑞)는 자가 국보(國寶) 호(號)는 공의(恭義)이다.

고려 충목왕 1년 1345년생 음사(蔭仕)로 고려(高麗)에서 판사농(判事農) 형조(刑曹) 참의(參議)였으나 공정공이 1383년에 졸하고 9년 후에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관직(官職)을 그만두고 조선불복지신(李氏朝鮮不服之臣)으로 6년을 은신(隱身) 중(中)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매제(妹弟)인 박포(朴苞)공이 방간(芳幹)을 옹립하고 방원(芳遠:후에 태종)을 멀리하여 기병(騎兵)을 일으켜 방원과 싸워 1400년에 역모(逆謀)로 참수(斬首)되었다.

그로 인해 처남인 윤서(允瑞)공도 하장지화(荷杖之禍)를 당하여 은거 생활을 하면서 장자 구(玖)와 차자 진(珍)을 데리고 진주 방어산(防禦山)으로 와서 구(玖)는 군석(君碩)으로 개명(改名)하여 피신(避身)하게 하고 차자 진(珍)은 방어산 서쪽으로 은거케 하니 형제와 자식 두 명이 생이별하여 은거(隱居)하는 길이 가정을 보존하는 길이다 하였다. 공(公)은 황해도(黃海道)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서 미성년(未成年)의 자(子) 4명을 데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다가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와 함께 하장지화를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