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원황씨시조(昌原黃氏),황충준(黃忠俊),창원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12 21:25 수정일 : 2018-03-12 22:34

창원황씨의 시원

중국 한나라의 학사 휘 락공은 후한 광무제 건무 4년 (서기 28년) 신라유리왕 5년(무자) 중국 강하 무한의 지역에서 목선을 타고 월남 교지국으로 사신 가시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안북부 안융진(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에 선착되어 그후 다시 동해안 월송포 북원에 상륙하여 함께 동행한 구대림장군(평해 구씨의 시조)은 평해 구미진에 터를 잡고 휘 락공은 월송봉 남록 굴산(굴정리)에 세거하셨으며 자칭 황장군이라 하니 휘 락공은 한국 황씨의 도시조이시다. 그 유허에 1694년(숙종 20년) 한학사 황공 락 지 제단이라고 하여 제단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중정일에 전국의 종인이 향사하고 있다.

도시조 휘 락공은 전한 말기인 성제 3년 (기원전 30년)에 생하셨다고 한다.

휘 락공의 성장기는 전한의 쇠퇴기이며 그 후 급격히 세력이 약화된 한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서기 8년 12월에 왕망의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 왕망의 개혁 정치는 국민의 원성이었고 그래서 다시 민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의 시기였다. 왕망이 죽고 새로운 류수가 즉위하니 이가 곧 후한 광무제이며 서기 25년(을유년) 이 후한 건무원년이다. 그때에 월남(교지국) 등에 12군을 설치하여 조공을 받아왔다.

휘 락공은 왕망의 혼란시기의 시련과 평제시에 왕망의 간적으로 작난을 피해서 지내시다가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고 내정이 안정되니 명문후예의 유신을 불러들여 변방사신으로 보내게 된다. 그 시기에 휘 락공도 월남의 사신으로 가시다가 동해안 월송봉 남록 굴산(굴정리)에 정착 하여 세거하시게 되었고, 한국에 정착한 휘 락공의 후손으로 갑고 을고 병고의 삼형제가 계셨는데, 갑고는 고구려의 민중왕이 기성군으로 봉하여 평해황씨의 시관조요, 을고는 백제의 다루왕이 장수군으로 봉하여 장수황씨의 시관조요, 병고는 신라의 유리왕이 창원백으로 봉하여 창원황씨의 시관조이시니 삼황씨의 관조이나 그 외 우주, 덕산, 회덕, 상주, 관성 황씨 등은 삼황씨에서 분적된 동근 동족이나 상대의 역사와 세계는 구보의 실전으로 정확한 계보와 족보의 내용이 분분하여 종사 연구의 과제이기도 하다.

※갑고 을고 병고는 휘 락공의 아들이다 또는 후손이다 의 설화가 분분하나 확실한 고증이 불분명하여 유전된 전의록으로 남을 뿐이다.

창원황씨의 시원(昌原黃氏의 始原) - 원문

中國 漢나라의 學士 諱 洛公은 後漢 光武帝 建武 4年 (서기 28年) 新羅儒理王 5年(戊子) 中國 江夏 武漢의 地域에서 木船을 타고 越南 交趾國으로 使臣 가시는 길에 風浪을 만나 漂流되어 安北府 安戎鎭(지금의 平安南道 安州)에 船着되어 그후 다시 東海岸 越松浦 北原에 上陸하여 함께 同行한 丘大林將軍(平海 丘氏의 始祖)은 平海 丘尾津에 터를 잡고 諱 洛公은 越松峰 南麓 崛山(崛井里)에 世居하셨으며 自稱 黃將軍이라 하니 諱 洛公은 韓國 黃氏의 都始祖이시다. 그 遺墟에 1694年(肅宗 20年) 漢學士 黃公 洛 之 祭壇이라고 하여 祭壇碑를 세우고 每年 陰曆 10月 中丁日에 全國의 宗人이 享祀하고 있다.

都始祖 諱 洛公은 前漢 末期인 成帝 3年 (紀元前 30年)에 生하셨다고 한다.

諱 洛公의 成長期는 前漢의 衰退期이며 그후 급격히 勢力이 弱化된 漢나라는 결국 滅亡하고 西紀 8年 12月에 王莽의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 王莽의 改革 政治는 國民의 怨聲이었고 그래서 다시 民亂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럽고 混亂의 時期였다. 王莽이 죽고 새로운 劉秀가 卽位하니 이가 곧 後漢 光武帝이며 西紀 25年(乙酉年) 이 後漢 建武元年이다. 그때에 越南(交趾國) 등에 12군을 設置하여 朝貢을 받아왔다.

諱 洛公은 王莽의 混亂時期의 試鍊과 平帝時에 王莽의 姦敵으로 作亂을 피해서 지내시다가 光武帝가 後漢을 세우고 內政이 安定되니 名門後裔의 儒臣을 불러들여 邊方使臣으로 보내게 된다. 그 時期에 諱 洛公도 越南의 使臣으로 가시다가 東海岸 越松峰 南麓 崛山(崛井里)에 定着 하여 世居하시게 되었고, 韓國에 定着한 諱 洛公의 後孫으로 甲古 乙古 丙古의 三兄弟가 계셨는데, 甲古는 高句麗의 閔中王이 箕城君으로 封하여 平海黃氏의 始貫祖요, 乙古는 百濟의 多婁王이 長水君으로 封하여 長水黃氏의 始貫祖요, 丙古는 新羅의 儒理王이 昌原伯으로 封하여 昌原黃氏의 始貫祖이시니 三黃氏의 貫祖이나 그 外 紆州, 德山, 懷德, 尙州, 貫城 黃氏 등은 三黃氏에서 分籍된 同根 同族이나 上代의 歷史와 世系는 舊譜의 失傳으로 正確한 系譜와 族譜의 內容이 紛紛하여 宗事 硏究의 課題이기도 하다.

※甲古 乙古 丙古는 諱 洛公의 아들이다 또는 後孫이다의 說話가 紛紛하나 確實한 考證이 不分明하여 流傳된 傳疑錄으로 남을 뿐이다.


창원황씨의 유래

창원황씨는 기원전 6년 애제 건평 원년에 생하시고 서기 35년 신라 유리왕 12년에 창원백을 봉한 관향시조 휘 병고공의 후손이 약 2,000여년간 후손이 면연되고 있고, 시조는 고려 성종조 내사 문하부 문하시중을 역임한 휘 충준공이시다. 그의 선대는 황씨의 도시조 휘 락공이며 그 후손 휘 병고공의 자손이 창원황씨의 거족을 이루고 있다. 그 후 휘 충준공을 시조로 함은 휘 병고공으로부터 계대가 실전되었기 때문이고 임계병화(1592년)에 보첩이 소실되어 100여년만에 간행된 계미보(1703년)에 의하면 시조 시중공(휘 충준) 이후 세계가 확실치 못하여 고려조 말기의 경조윤 공부상서 정토장군을 역임한 휘 신공을 기세조(일세조)로 하여 확실한 계대가 이어지고 있다.

창원황씨는 관향을 같이 하면서 시조는 물론 족보를 달리하는 창원황씨가 있으나, 그 중 회산부원군을 봉한 황석기공를 시조로 하는 창원황씨 일명 회산부원군파 라고 하고 고려조 대상을 지낸 황석주공의 조부 황양충공을 시조로 하는 창원황씨 일명 대상공파라고 한다. 회산부원군파는 당나라때부터 시조 황석기공의 선대가 중국에 있다고 하여 창원황씨의 시조 휘 충준공과 세계를 달리 하고 있고, 대상공파 역시 고전으로 중시조 황석주공의 묘소가 창원 적현산에 있는 시조 휘 충준공의 묘소와 동원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세계의 고증이 없고 전의록으로만 유전될 뿐이나 묘소 향사는 같이 모시고 있으나 역시 시조와 족보는 달리 하고 있다.

그러나 시조 휘 충준공의 후손으로서 고려말 경조윤과 공부상서 정토장군을 역임한 기세조 휘 신공과 그 외 공조전서를 역임한 방손 휘 윤기공을 1세조로 하는 전서공파와 태사를 역임한 방손 휘 호공를 1세조로 하는 태사공파와 상서를 역임한 방손 휘 간공을 1세조로 하는 상서공파로써 3파의 상계파가 형성되어 있고 1세조 휘 신공의 후손으로 세계를 이룬 24파와 모두 27파의 종파로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번족하고 벌열한 문중이다.

고전에 의하면 창원의 적현산 시조묘의 안산쪽에 강선대란 정자가 있었으나 창원백 휘 병고공의 정자이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철원의 1세조 휘 신공의 묘소와 8세조이상 각파의 파조까지의 묘소가 있는 점으로 보아 강원도 철원이 선조의 고기요, 1세조의 선대로부터 살아 온 세거지이다.

또한 철원은 옛 이름이 창원이란 별호의 기록도 있다. 창원의 이름은 고대로부터 변천되어 의창군과 회원현을 합쳐서 창원으로 개명되었으며 선조의 고기와 유적지는 강원 철원 동송읍 길동과 능동에 있고, 경남 창원 적현동 적현산에 있다.

 

창원황씨의 유래(昌原黃氏의 由來) - 원문

昌原黃氏는 紀元前 6年 哀帝 建平 元年에 生하시고 西紀 35年 新羅 儒理王 12年에 昌原伯을 封한 貫鄕始祖 諱 丙古公의 後孫이 約 2,000餘年間 後孫이 綿延되고 있고, 始祖는 高麗 成宗朝 內史 門下府 門下侍中을 歷任한 諱 忠俊公이시다. 그의 先代는 黃氏의 都始祖 諱 洛公이며 그 後孫 諱 丙古公의 子孫이 昌原黃氏의 巨族을 이루고 있다. 그 後 諱 忠俊公을 始祖로 함은 諱 丙古公으로부터 繼代가 失傳되었기 때문이고 壬癸兵禍(1592年)에 譜牒이 消失되어 100餘年만에 刊行된 癸未譜(1703年)에 依하면 始祖 侍中公(諱 忠俊) 이후 世系가 確實치 못하여 高麗朝 末期의 京兆尹 工部尙書 征討將軍을 歷任한 諱 信公을 起世祖(一世祖)로 하여 確實한 繼代가 이어지고 있다.

昌原黃氏는 貫鄕을 같이 하면서 始祖는 물론 族譜를 달리하는 昌原黃氏가 있으나, 그 중 檜山府院君을 封한 黃石奇公를 始祖로 하는 昌原黃氏 一名 檜山府院君派 라고 하고 高麗朝 大相을 지낸 黃石柱公의 祖父 黃亮冲公을 始祖로 하는 昌原黃氏 一名 大相公派라고 한다. 檜山府院君派는 唐나라때부터 始祖 黃石奇公의 先代가 中國에 있다고 하여 昌原黃氏의 始祖 諱 忠俊公과 世系를 달리 하고 있고, 大相公派 역시 古傳으로 中始祖 黃石柱公의 墓所가 昌原 赤峴山에 있는 始祖 諱 忠俊公의 墓所와 同原에 있다고 하지만, 確實한 世系의 考證이 없고 傳疑錄으로만 流傳될 뿐이나 墓所 享祀는 같이 모시고 있으나 역시 始祖와 族譜는 달리 하고 있다.

그러나 始祖 諱 忠俊公의 後孫으로서 高麗末 京兆尹과 工部尙書 征討將軍을 歷任한 起世祖 諱 信公과 그 外 工曹典書를 歷任한 傍孫 諱 允奇公을 1世祖로 하는 典書公派와 太師를 歷任한 傍孫 諱 昊公를 1世祖로 하는 太師公派와 尙書를 歷任한 傍孫 諱 侃公을 1世祖로 하는 尙書公派로써 3派의 上系派가 形成되어 있고 1世祖 諱 信公의 後孫으로 世系를 이룬 24派와 모두 27派의 宗派로 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繁族하고 閥閱한 門中이다.

古傳에 의하면 昌原의 赤峴山 始祖墓의 案山쪽에 降仙臺란 亭子가 있었으나 昌原伯 諱 丙古公의 亭子이었다는 傳說도 있으나, 鐵原의 1世祖 諱 信公의 墓所와 8世祖以上 各派의 派祖까지의 墓所가 있는 點으로 보아 江原道 鐵原이 先祖의 古基요, 1世祖의 先代로부터 살아 온 世居地이다.

또한 鐵原은 옛 이름이 昌原이란 別號의 記錄도 있다. 昌原의 이름은 古代로부터 變遷되어 義昌郡과 檜原縣을 합쳐서 昌原으로 改名되었으며 先祖의 古基와 遺跡地는 강원 鐵原 동송읍 길동과 능동에 있고, 경남 창원 적현동 적현산에 있다.


昌原黃氏 侍中(諱 忠俊)公 以下 七位 世藏之墓 碑陰記

(창원황씨 시중(휘 충준)공 이하 칠위 세장지묘 비음기)

원문번역

웅천현치하 서편 와운현 한내룡에 6묘가 있어 옛적부터 노인들이 서로 전설하기를 창원「황정승묘」라고 하였으니 여기가 우리 선조 이하의 대대로 산소 드린 곳이다. 옛적에는 묘앞에 표석이 있었는데 (투장한 자가 전부 빼버려 없앴다) 후손이 지금 동지중추부사인 택이 하양부사로 있을 때에 대구 종인 청운과 같이 관가에 고하여 투장인을 치죄한 후 투장한 것을 파가게 하였다. 그러나 묘표는 영영 분실하고 설분치 못하고 동추공이 다시 봉축하여 일신케 하였다. 청운이 다시 입석하여 사적을 각명할 것을 도모하고 가재를 기울여 치석하는 공사를 필역하고 서울에 와서 여러 종족과 상의하는지라. 곰곰이 생각하니 6묘가 한내룡에 있는데 표석을 분실하였으니 어떤 분묘가 어떤 선조의 분묘인 것을 지금 가고하여 알 방도가 없어 황씨 세장이라고 돌에 각명하여 국내에 건립하였다. 우리 선조에 휘 충준이 있으셔서 벼슬이 시중이었고, 휘 하응이 있으셔서 벼슬이 찬성사이었으니 모두 고려조의 정승계급이었다. 당시에 직위가 고관이었으므로 그 덕망이 후세까지 현저하게 대대로 5백년간을 유전해 내려온 총택이라고 옛 노인이 말하였고, 자손 역시 선조의 여음을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세상에 훌륭한 관작을 존속하면서도 오히려 능히 선조의 분묘를 완전히 수호치 못하고 간사배가 묘표를 투발하는 것을 금치 못한 통탄을 어찌 참겠는가. 그러나 이후에 자손이 지나다가 이 석물을 근거하여 우리 선조의 묘가 6이 되는 것을 알려 추모케 하니 오늘의 청운에 공이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도다.

숭정기원 61년 무진(1688년)

후손통훈대부 홍문관교리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사관지제교 흠 근식

 

昌原黃氏 侍中(諱 忠俊)公 以下 七位 世藏之墓 碑陰記 - 원문

原文飜譯

웅천현치하 서편 와운현 한내룡에 6墓가 있어 옛적부터 노인들이 서로 전설하기를 창원「黃政丞墓」라고 하였으니 여기가 우리 선조 이하의 대대로 산소 드린 곳이다. 옛적에는 墓앞에 표석이 있었는데 (투장한 자가 전부 빼버려 없앴다) 후손이 지금 同知中樞府事인 澤이 河陽府使로 있을 때에 대구 종인 靑雲과 같이 관가에 고하여 투장인을 치죄한 후 투장한 것을 파가게 하였다. 그러나 墓表는 영영 분실하고 설분치 못하고 同樞公이 다시 봉축하여 일신케 하였다. 靑雲이 다시 입석하여 사적을 각명할 것을 도모하고 가재를 기울여 치석하는 공사를 필역하고 서울에 와서 여러 종족과 상의하는지라. 곰곰이 생각하니 6墓가 한내룡에 있는데 表石을 분실하였으니 어떤 墳墓가 어떤 선조의 墳墓인 것을 지금 可考하여 알 방도가 없어 黃氏 世藏이라고 돌에 각명하여 局內에 建立하였다. 우리 先祖에 諱 忠俊이 있으셔서 벼슬이 侍中이었고, 諱 河應이 있으셔서 벼슬이 贊成事이었으니 모두 高麗朝의 政丞계급이었다. 당시에 職位가 高官이었으므로 그 덕망이 후세까지 현저하게 대대로 5백년간을 유전해 내려온 塚宅이라고 옛 노인이 말하였고, 자손 역시 선조의 餘蔭을 繼承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세상에 훌륭한 官爵을 存續하면서도 오히려 능히 선조의 墳墓를 완전히 수호치 못하고 간사배가 墓表를 투발하는 것을 금치 못한 통탄을 어찌 참겠는가. 그러나 이후에 자손이 지나다가 이 석물을 근거하여 우리 선조의 墓가 6이 되는 것을 알려 추모케 하니 오늘의 靑雲에 功이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도다.

崇禎紀元 61年 戊辰(1688年)

後孫通訓大夫 弘文館校理兼 經筵試讀官 春秋館記事官知製敎 欽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