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밀양박씨시조(密陽朴氏),박언침(朴彦忱)

작성일 : 2018-03-07 16:37

시조 및 득성 연원

박씨(朴氏)는 우리 민족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혈통을 이어온 토박이 씨족으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알의 모양과 같은 표주박이라는데 인연한데서 연원을 두고 있다.

삼국사기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동해가 산 곡간에 흩어져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군주가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서 육부촌장이 알천에 모여 삼일동안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던 서기전 69년 3월 1일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의 숲사이에 오색 구름이 떠오르고 말 한필이 꿇어 앉아 울고 있으며 신선이 엎드려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여 그곳에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튼 박 같기도 하고 알 같기도 한 포가 있어 이를 헤쳐 보니 그 속에서 의형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동천에 목욕시키니 목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고 일월이 청명하였다.”

BC 57년 4월 병진일(혹은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이라 하고 박(朴)으로써 성을 정하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본관의 유래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제23대 왕, 재위기간:514~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때인 서기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제54대 왕, 재위기간:917~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박언침(朴彦忱)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彦忱)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8세손 언상, 8세손 언인, 8세손 언양, 8세손 천익, 8세손 을재, 13세손 원광, 15세손 중미, 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손자 나(彦孚: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짐)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8세손 언상)․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8세손 언인)․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8세손 양언)․판도공파(版圖公派:8세손 천익)․좌윤공파(左尹公派:8세손 을재)․동정공파(同正公派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15세손 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 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대표적인 인물

각 계통별로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종파(宗派)인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 충(崔 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을 비롯한 12개의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고려 인종 때 공부 상서를 역임)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의신의 맏아들)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의신의 현손)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糾正)을 역임 했던 현(鉉)은 밀성부원군 태사 언부의 9세손으로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셰간의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fqocnf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 후손이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문과급제 261명, 상신 1명 대제학(大提學) 1명 호당(湖當) 4명 공신(功臣) 10명 장신(將臣) 1명 등으리 명공거경(名公巨卿)과 도덕문장(道德文章) 및 충신효열(忠臣孝烈)을 배출하였다.

시조의 사적

기원전 57년(漢宣帝 五鳳元年 甲子) 4月 병진(丙辰)일 13세로 즉위(卽位)한 박혁거세는 왕호(王號)를 거서간 (居西干)이라 하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5년(戊辰)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았는데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착하시어 내조를 잘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왕과 왕비를 두 성인(二聖人)이라 하였다.

8년(辛未)에 태자 민(愍)이 태어났다.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변경을 침범하려 하였으나 시조의 신덕(神德)을 듣고 물러갔다. 17년(庚辰)에 왕과 왕비는 육부의 민정을 살피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토지를 잘 다루어 생산에 힘쓰도록 하였다. 19년(壬午)에 변한(弁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 하였다. 21년(甲申)에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 하였다. 26년(己丑) 금성에 궁궐을 세웠다. 30년(榮巳)에 낙랑이 침입하여 지방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판에 쌓아둔 것을 보고,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라 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38년(辛丑)二月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의 경기 충청 전라지방으로 파견하여 수교를 하였다. 61년(서기 4년 甲子) 3월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담암사(墓岩寺) 북쪽의 오릉(五陵)에 장사(葬事)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