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주한씨시조(淸州韓氏),한란(韓蘭)

작성일 : 2018-03-05 20:37 수정일 : 2018-09-04 14:52

청주한씨의 연원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옛부터 한국 최고(韓國 最古 : 가장 오래된)의 성씨(姓氏)로 알려져 왔다. 즉. 그 원류(原流)를 살펴보면 고대 기자조선(古代 箕子朝鮮) 이래 마한 왕국(馬韓 王國)을 거쳐 신라 말기(新羅 末期)에 한지원(韓智原)의 아들 四兄弟분이 있는데 셋째 아들 휘 란(諱 蘭)이 淸州 韓氏의 시조(始祖)이다.(註 : 蔓만, 簡간, 英영 세분은 居中國으로 되어 있음)

성의 근원을 사려보면 위략(魏 : 中國의 옛 나라 略史)에 이르기를 기자(箕子)후 四十餘世에 이르러 준왕(準王)이 연(燕)나라에서 망명(亡命)하여온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궁인(左右宮人)을 거느리고 한지(韓地 : 지금의 全北 益山에 정착(定着)하여 한왕 (韓王)이 되었더니 그후에 또 나라가 망하였으나 지금도 한인(韓人)이 그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고 한다.

위지(魏志 : 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 (北原 : 강원도 원주)에 들어가서 선우씨(鮮于氏)라 칭(稱)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馬韓 舊制)에 따른 상당 한씨(上黨 韓氏)라 칭(稱)하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 : 강원도 평강)으로 들어가 덕양 기씨(德陽 奇氏)라 칭(稱)하였다고 전(傳)한다. 즉(卽) 마한말(馬韓末) 원왕(元王)의 아들 三人이 있으니 友平, 友諒, 友誠이다.

나라가 망하니 友平은 고구려에 가서 유리왕조(琉璃王朝)에 벼슬하면서 북원 선우씨(北原鮮于氏)가 되고 友諒은 신라(新羅)에 가서 탈해왕조(脫解王朝)에 벼슬하면서 상당 한씨(上黨 韓氏)가 되고 友誠은 백제(百濟)로 가서 온조왕조(溫祚王朝)에 벼슬하면서 덕양 기씨(德陽 起氏)가 되었다고 운운(云云 : 이른다) 하였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 조선조 인조때의 문신)는 世世로 끊임없이 혁혁(赫赫)한 업적(業蹟)을 이어오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번창(繁昌)한 가문(家門)은 바로 청주 한씨(淸州 韓氏)가 제일(第一)이라고 극찬하였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 조선 선조때 학자)은 이르되 韓氏는 상당(上黨)에서 계출(系出)하였다. 太尉公 蘭이 高麗 太祖를 보필(輔弼)하여 三韓을 통합(統合)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호(號)를 받은 이래(爾來)에 子孫이 번성(繁盛)하여 七百餘年동안 공후 장상문학무공(公侯 將相文學武功)이 배출(輩出)되기 十三代를 연면계속(連綿繼續)하니 명문귀족(名門貴族)을 차례로 따져 보아도 이보다 앞선 者가 別로 없었으리라고 하였으니 미수 허 목(眉수 許 穆 : 조선조 숙종때 문신)은 이르되 韓氏는 上黨人이니 상당 한씨(上黨 韓氏)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系出)하였다. 箕子王朝가 쇠퇴(衰退)하여 마한(馬韓)이 되었더니 그 子孫이 上黨에 거주하였으므로 上黨 韓氏라 칭(稱)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 조(始 祖)

위양공 휘란(威襄公 : 諱 蘭)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忠淸北道 永同郡 黃澗面 蘭谷里) 태생으로 지원(諱 . 智原)의 三子요 그 선계(先系)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系出)하였다. 공(公)은 중년(中年)에 청주 방서동(淸州 方西洞)에 이거(移居)하였다. 태봉왕 궁예(泰封王ㆍ弓裔)가 죽고 왕건 태조(王建 太祖)가 918년 6월 15일 철원(鐵圓 : 鐵原)에서 즉위(卽位)하는데 공의 공(功)도 있었다고 전한다. 태조(太祖) 2년 10월 배현경(裵玄慶)이 평양(平壤)에 축성(築城)하는 이점(利点)을 의논하니 王이 한란(韓蘭)과 염상(廉湘)에게 영(令)을 내려 현지(現地)에 가서 독려케 하였다.

염 상이 중도에 병이 나서 강윤형(康允珩)을 대신 보내 평양성을 완성케 하니 태조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후 청주 방서동에 내려와서 수년동안 농사를 지며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農土)를 개척(開拓)하여 부호(富豪)가 되었더니 태조 11년(928) 후백제 견 훤(後百濟 甄 萱)을 치러갈 때 정벌군(征伐軍)에게 군량미(軍糧米)를 대주고 종군(從軍)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삼중대광 개국벽상공신(三重大匡 開國壁上功臣)에 녹훈(錄勳) 되었다. 벼슬은 문하태위(門下太尉)에 올랐으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본관의 유래

청주(淸州)는 본래 백제 상당현(百濟 上黨縣)이니 일명 낭비성(娘臂城)이라고 하며 또한 낭자곡(娘子谷) 또는 낭성(娘城)이라고 한다.

신라 신문왕(新羅 神文王)이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더니 경덕왕(景德王)이 격(格)을 높혀 서원경(西原景)이라하였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지금(至今)의 명칭(名稱) 청주(淸州)로 개칭(改稱)하였는데 혹(惑) 청주(淸州)라고도 한다. 성종(成宗)이 목사(牧使)를 배치(配置)하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절도사(節度使)를 배치(配置)하고 전절군(全節軍)이라 호칭(號稱)하였다.

朝鮮 世宗이 관찰사(觀察使)를 배치(配置)하고 목사(牧使)를 겸무(兼務)케 하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폐지(廢止)되었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는 청주(淸州)의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고 인물(人物)에 호걸(豪傑)이 많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 현재(現在)는 청주군 (淸州郡)을 분할(分割)하여 중심부(中心部)는 청주시 (淸州市)가 되고 둘레의 各面은 청원군(淸原郡)이 되니 시조(始祖)의 유기(遺基)와 묘소(墓所)는 청원군(淸原郡)에 속(屬)한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한씨는 전국에 752,6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