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분성김씨시조(盆城金氏),김응수(金應壽)

작성일 : 2018-02-21 11:52

분성김씨(盆城金氏)의 연원

분성김씨(盆城金氏)는 김녕김씨(金寧金氏)와 같은 동관(同貫) 분파(分派)로서 관조(貫祖) 김응수(金應壽-분성김씨시조)는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시조(始祖)인 김시흥(金時興)의 14세손이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김지(智)의 7세손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공적(功績)으로 충근정량(忠勤貞亮)호성공신(扈聖功臣)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분성군(盆城君)에 봉(封)해 졌으며, 후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 되었다.

한편, 임난(壬亂)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른 충정공(忠貞公) 김준영(金俊榮)의 후예도 분성김씨(盆城金氏) 일파가 있다.

때는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 4월 왜장 고니시를 선봉장으로 왜적 15만 대군을 이끌고 정명가도(征明假道) 라는 구실로 조선국을 불법으로 침략하여 서울에 육박하게 되니 선조는 제신들과 의주로 파천 길에 오르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각각 보내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게 이르렀다.

선조를 보위하며 호종한 판서 복용의 아들 분성군 김응수를 위시한 파진군 응부, 응명 등 삼형제와 무과 급제한 응수의 아들 몽상과 윤성 윤신 준남 등 가족들은 모두 합심 창의하여 왕실과 종묘사직을 굳게 지킨 공적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되어 공신가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국내 각 지방에서는 침략행위에 반세하여 승리를 거듭하게 되니 왜적은 기세를 잃고 퇴각하며 인재와 문화재를 약탈하여 간 7년간의 왜적의 침략 전쟁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김씨는 전국에 16,282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