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부이씨시조(古阜李氏),이경조(李敬祖)

작성일 : 2018-02-13 16:03

고부이씨의 연원

고부이씨(古阜李氏)는 고려시대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이시고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이시며 여산군(礪山君)이신 문헌공(文憲公) 이경조(李敬祖,고부이씨시조)를 시조(始祖)로 유학(儒學)의 도덕적 진리(眞理)에 의한 사상(思想)과 고매(高邁)한 지절(志節), 돈후(敦厚)한 품성(品性)으로 종중(宗中)의 위풍(威風)을 정립하여 대대(代代)로 문명(文名)을 떨치며 명공거경(名公巨卿)의 배출(輩出)이 이어졌고 숭조상문(崇祖尙門)의 전통을 갖춘 명문(名門)이다.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 정종(靖宗) 때 고부(古阜)에서 탄신(誕辰)하시고, 문종(文宗) 때 최충의 구제학당(九齋學堂) 문헌공도(文憲公徒)에서 수학(修學)하시고 文宗18년(1064)에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셨고 文宗25년(1071) 김제(金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송(宋)나라에 왕래하였으며, 숙종(肅宗) 때에 국자감판사(國子監判事),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문종(文宗)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 까지 5왕조를 섬긴 공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의 서훈(敍勳)을 받아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첨의좌정승(檢校僉議左政丞)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시다.

후손(後孫)들이 공(公)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1928년 무진보(戊辰譜) 발간 할 때 고부(古阜)의 옛 이름인 영주(瀛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가 1975년 (陰)3月15日 대종회(大宗會) 총회에서 본관(本貫)을 고부(古阜)로 환원(還元), 통일(統一)하기로 의결하였고, 갑자보(甲子譜(1984년)=8차 대동보)를 발간할 때 족보명(族譜名)을 고부이씨대동보(古阜李氏大同譜)로 발간하였다.

이는 오로지 일제(日帝) 치하에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왜곡하고 고부군(古阜郡)을 고부면(古阜面)으로 격하(格下)시키는 등 행정구역을 분산시켜 지역의 형세(形勢)를 위축(萎縮)시키고 지역적(地域的) 결집력(結集力)을 와해(瓦解)시키려는 악랄(惡辣)함과 지난 고부군(古阜郡) 우덕면 동곡촌(현 정읍시 망제동 500번지 일대)에서 고부이씨(古阜李氏) 數十名이 왜병(倭兵)으로부터 집단학살(集團虐殺)을 당하여 李死들(피내川)”이란 지명마저 생겼으니, 집단참사(集團慘死)를 당한 원한과 나라를 빼앗기고 고부군(古阜郡)이 해체되어 면(面)으로 격하되어 옛날의 감회(感懷)마저 찾을 길이 없었으니 유가(儒家)의 지절(志節)로서 분개(憤慨)해서 배일의식(排日意識)과 국권회복(國權回復)의 절실한 신념(信念)에서 기인(起因)되었던 것이다.

始祖의 단(壇)은 전북 부안군 줄포면 난산리(목상부락) 561번지, 매년 음력 3월15일 향사(享祀)한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부이씨는 전국에 22,891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