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도강김씨시조(道康金氏),김희조(金希祖),도강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2-09 10:23 수정일 : 2018-04-11 20:28

도강김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도강김씨(道康金氏)의 시조(始祖) 김희조(金希祖)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 고려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도성부원군(道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도강(道康)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소목(昭穆)을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어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원경(原卿)을 파조(派祖)로 하는 태인사정공파(泰仁司正公派), 사재감정(司宰監正) 을경(乙卿)을 파조로 하는 강진시직공파(康津侍直公派), 전공조사(典工曹事) 일(鎰)을 파조로 하는 강진조사공파(康津曹事公派), 팔도 병사(八道兵使) 을상(乙祥)을 파조로 하는 인천병사공파(仁川兵使公派) 등 동본 4파(同本四派)로 각각 계대(繼代)하고 있다.

도강(道康)은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옛 지명으로 백제(百濟)시대에 도무(道武)로 불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는 양무군(陽武郡)으로 하였다가, 고려(高麗)시대에 도강(道康)으로 고쳤다.


대표적인 인물

비교적 조선조(朝鮮朝)에서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도강 김씨(道康金氏)는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회련(懷鍊)이 공주(公州)․해주 목사(海州牧使)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을 역임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고, 남우(南佑)는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며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강계부윤(江界府尹)을 지낸 서열(瑞說)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세보(世寶)는 성종(成宗) 때 생원(生員)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피화(被禍)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는 기개(氣槪)를 나타냈다.

한편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오른 약묵(若黙)은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재임시 선정(善政)으로 표창(表彰)을 받았으며, 학자(學者) 후진(後進)은 석학(碩學) 이 항(李 恒)의 문하에서 경서(經書)와 역서(易書)를 연구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귀(李 貴)와 함께 장성(長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량(軍糧) 보급에 앞장섰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중우(重羽)는 사예(司藝)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나가 난민구제에 진력하였으며, 무과(武科)에 급제한 지백(知白)은 충청도 병마우후(忠淸道兵馬虞候)를 지냈다.

그외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濎)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득룡(得龍)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여 진주 영장(晋州營將) 득수(得壽), 강진 현감(康津縣監) 응성(應珹), 함평 현감(咸平縣監) 광준(光俊), 해주 판관(海州判官) 광수(光秀)와 함께 가문을 빛냈으며, 관(灌)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1615년(광해군 7)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의 부당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심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서 평정(平定)에 공(功)을 세운 도언(道彦)이 분무원종일등공신(奮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고, 광우(光遇)는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풍기 현감(豊基縣監)을, 홍제(弘濟)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유학자(儒學者)로 명망이 높았던 우국지사 영상(永相)이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 :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斷髮令 : 일본이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한 명령)이 내리자, 국가(國家)의 운명을 개탄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융희 4) 8월 29일 한일합방(韓日合邦 : 일본이 한국 통치권을 빼앗은 일)이 되자 독립을 역설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군산(群山) 감옥에서 9일 단식 끝에 순절했다. 또한 기술(箕述)․재의(在義)․정술(廷述)도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천술(天述)은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다가 우물에 투신자결하여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도강 김씨(道康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1,4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도강김씨조상인물

김희조(金希祖) ? ~ 1199 (신종 2)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윤(倫)의 아들. 등과하여 도관좌랑(都官佐郞)까지 올랐다가 공민왕 초에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어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어가를 따라 남행하여 호종(扈從)의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랐다.

김원경(金原卿) 고려조(高麗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김을경(金乙卿) 고려 때 문하평리시직(門下評理侍直)․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했다.

김 일(金 鎰) 고려 때 전공조사(典工曹事)를 역임했다.

김을상(金乙祥) 고려 때 팔도의 병사(兵使)를 역임했다.

김 주(金 柱) 고려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했다.

김 분(金 粉) 조선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다.

김 저(金 貯)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회련(金懷鍊) 시호는 충민(忠敏). 홍주 목사(洪州牧使) 겸 권농병마사(勸農兵馬使)를 지냈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김덕방(金德芳) 조선 때 당진 현감(唐津縣監)을 역임했다.

김 감(金 鑑) 조선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했다.

김 표(金 表) 조선 때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역임했다.

김윤손(金潤孫) 자는 지택(之澤). 조선 때 용양위 사정(龍驤衛司正)을 역임했다.

김남우(金南佑)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에 급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다.

김수연(金粹然) 자는 성수(聖叟).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역임했다.

김흥민(金興敏)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김광려(金光礪)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서열(金瑞說)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강계 부윤(江界府尹)등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이 되었다.

김희윤(金希尹) 자는 신로(新老). 태인훈도공파(泰仁訓導公派)의 시조이며, 조선 때 광주 훈도(光州訓導)를 역임했다.

김희열(金希說) 자는 상림(商林) 태인판관공파(泰仁判官公派)의 시조이며, 조선 때 해주 목 판관(海州牧判官)을지냈다.

김희석(金希奭) 자는 주경(周卿). 태인좌랑공파(泰仁左郞公派)의 파조이며,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김세보(金世寶) 자는 사진(士珍), 시호는 일정(逸亭). 성종 때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하는 기개를 보였다.

김 랄(金 埒) 조선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했다.

김 근(金 瑾) 조선 때 온성 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를 역임했다.

김약심(金若沈) 자(字)는 이중(而中). 목포 수군만호(木浦水軍萬戶) 및 수군 판관(水軍判官),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김약묵(金若黙) 1500 (연산군 6) ~ 1558 (명종 13)

자는 대용(大容), 호는 성재(誠齋). 1540년 (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52년 (명종 7)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재임중 근렴선정(謹廉善政)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표창과 옷감을 하사(下賜)받고, 뒤에 집의(執義), 목사(牧使), 내자시정(內資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김세형(金世亨) 1519 (중종 14) ~ ?

자는 공복(公福).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회덕 현감(懷德縣監)을 역임했다.

김 우(金 瑀) 조선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역임했다.

김종이(金從易) 1560 (명종 15) ~ ?

자는 공희(孔喜),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목포 만호(木浦萬戶) 등을 역임했다.

김윤선(金潤璇)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윤기(金潤璣) 조선 때 운산군수(雲山郡守), 영변진영 겸 병마절제사(寧邊鎭營兼兵馬節制使)를 역임했다.

김 원(金 元) 1511 (중종 6) ~ ?

자는 원지(元之). 1537년(중종 32) 진사(進士) 3등에 오르고, 계수도찰방(契樹道察訪), 봉훈랑(奉訓郞), 상의원(尙衣院)의 직장(直長)에 추증되었다.

김후진(金後進) 1540 (중종 35) ~ ?

자는 비승(丕丞), 호는 원모당(遠募堂). 이 항(李 恒)의 문하생.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며, 많은 군량을 바쳐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김세억(金世億)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복억(金福億) 1524 (중종 19) ~ 1600 (선조 33)

자는 백선(伯善), 호는 율정(栗亭). 당시 현인(賢人)이었던 기대승(奇大升), 정 철(鄭 澈) 등과 교유했으며, 임진왜란 때 군량과 의복을 수송하여 명나라 군인을 많이 구제하였다.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뒤에 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 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김경억(金慶億) 조선 때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김복억(金福億), 김후진(金後進)과 같이 군량과 의복을 마련하여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

김응정(金應鼎) 1527 (중종 22) ~ 1620 (광해 12)

자는 사화(士和), 호는 해암(亻解 菴). 임진왜란 때 땅을 팔아 소금을 구하여 군에 제공하고, 인조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및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충효(忠孝)의 기절(氣節)이 담긴「서산백운곡(西山白雲曲)」과「낙강창오시(洛江蒼梧詩)」가 전한다.

김응유(金應裕) 조선 때 덕산 훈도(德山訓導)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고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 우(金 佑) 조선 때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김천억(金天億)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를 역임했다.

김 류(金 琉)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삼건(金三建) 조선 때 함평 현감(咸平縣監)을 역임했다.

김호남(金好男) 1560 (명종 15) ~ 1631 (인조 9)

선조 때 대구 병마절제도위(大邱兵馬節制都尉)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선정(善政)을 했다.

김중우(金重羽) 1584 (선조 17) ~ 1647 (인조 25)

자는 진한(振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 사예(司藝)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김 박(金 璞)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김대립(金大立) 자는 신부(信夫), 호는 월봉(月峯). 임진왜란 때 곡식을 모아 의병에 공급하였고, 선무랑(宣務郞),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역임하였다.

김지백(金知白) 1574 (선조 7) ~ 1637 (인조 15)

자는 구응(九應).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구원하여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추증되었고, 뒤에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우후(忠淸道兵馬虞候)를 지냈다.

김여백(金汝白)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응길(金應吉) 자는 선옹(善翁).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역임했다.

김 정(金 濎) 1587 (선조 20) ~ ?

자는 여고(汝皐).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김득룡(金得龍) 자는 운경(雲卿). 함흥 판관(咸興判官)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김득수(金得壽) 1572 (선조 5) ~ 1642 (인조 20)

호는 모산(毛山).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진주 영장(晉州營將)을 역임했다.

김응성(金應珹) 조선 때 강진 현감(康津縣監)을 역임했다.

김여정(金呂鼎)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 선략장군(宣略將軍) 등을 역임했다.

김광준(金光俊) 조선 때 함평 현감(咸平縣監)을 역임했다.

김광수(金光秀) 조선 때 해주 판관(海州判官)을 역임했다.

김명수(金命壽)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다.

김상정(金尙精) 1591(선조 24) ~ ? 자는 연숙(練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 격(金 激)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 관(金 灌) 1575 (선조 8) ~ 1635 (인조 13)

자는 옥이(沃而), 호는 명천(鳴川). 김장생(金長生)의 문화생으로 1625년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廢位) 사건의 부당함을 상소했다. 정묘난(丁卯亂) 때는 사계(沙溪)의 초소사(招召使)를 역임했다.

김신종(金信宗)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영종(金永宗)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북청(北靑), 상주 영장(尙州營將) 등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 급(金 汲) 조선 때 학행이 뛰어났으며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김 렴(金 濂)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종립(金宗立)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우민(金友敏)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했다.

김우정(金友正) 1648년(인조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사(奉事)를 거쳐 전적(典籍), 사근도찰방(沙斤都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김계신(金季信)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김 건(金 鍵) 남도 수군만호(南道水軍萬戶)로 임진왜란 때 경상동 가덕포전(加德浦戰)에서 전사했다.

김 급(金 伋)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을 역임했다.

김 점(金 點) 임진왜란 때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공을 세웠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 이(金 珥) 조선 때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김천정(金天挺) 1679년(숙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을 지냈다.

김만정(金萬挺) 호는 범계(範溪). 학행이 뛰어나 당시(當時) 사림(士林)들의 존경을 받았다. 남천사(藍川祠)에 제항되었다.

김세정(金世挺)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효정(金孝挺) 조선 때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김진정(金震挺)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김인정(金麟挺)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계정(金繼挺)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했다.

김여강(金麗剛)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준강(金俊剛)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다.

김계증(金繼曾) 조선 때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했다.

김효석(金孝錫)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종해(金宗海)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김계완(金繼琓)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찬규(金璨奎)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김몽기(金夢麒) 조선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했다.

김위서(金位西)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김진용(金震龍)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으며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선되었다.

김진익(金震益) 조선 때 무과에 급제,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거쳐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 이 괄(李 适)의 난 때 분전(奮戰)하다가 전사하였다.

김진설(金震卨) 조선 때 무과에 급제,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를 역임했다.

김입중(金立中)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계복(金繼復)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순형(金舜衡)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김만형(金萬衡) 1690년(숙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예조 좌랑(禮曹佐郞),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김명형(金命衡) 1699년(숙종 25) 식년문관(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봉산, 익산 군수(鳳山, 益山郡守) 등을 역임했다.

김원성(金元成)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신채(金愼采)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도언(金道彦)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증되었다.

김중구(金重九)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중일(金重鎰)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김헌구(金憲球) 1762년(영조 3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부사과(副司果), 병조 좌랑(兵曹佐郞)등을 거쳐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겸 순찰사(巡察使) 등을 지냈다.

김헌일(金憲一)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광우(金光遇) 1732 (영조 8) ~ 1807 (순조 7)

자는 응경(應卿). 1771년(영조 4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랑(正郞)을 거쳐 지평(持平), 정언(正言), 풍기 현감(豊基縣監) 등을 지냈다.

김득언(金得彦) 자는 덕징(德徵). 1675년(경종 2)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도원(金道元) 1733년(영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장후(金章厚) 자는 성지(成之).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김광윤(金光潤) 1733년(영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헌성(金憲聖) 자는 천검(天儉).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홍제(金弘濟)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지냈다.

김 단(金 壇) 자는 여진(汝眞).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역임했다.

김 언(金 堰) 자는 사형(士亨).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영상(金永相) 자는 승여(昇如).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후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일 단식(斷食) 끝에 죽었다.

김기술(金箕述) 자는 정범(正範), 호는 국헌(菊軒). 한말(韓末)의 우국지사였다.

김재의(金在義) 1823 (순조 23) ~ 1887 (고종24)

자는 문초(文初), 호는 동곡(東谷).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고, 효행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김정술(金廷述) 자는 광국(光國), 호는 포석(圃石). 천성이 효우(孝友)하여 고종(高宗) 때 효덕 참판(孝德參判)이 되었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광복을 도모(圖謨)하다가 피체(被逮)되어 3년간 옥고를 겪었다.

김직술(金直述) 자는 정경(正慶), 호는 화개헌(和介軒). 한말에 교관(敎官)을 역임했다.

김천술(金天述) 호는 희당(稀堂).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국가의 운명을 개탄하다 우물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김백흠(金伯欽) 자는 정서(正瑞).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 했다.

김정흠(金珽欽) 1794 (정조 14) ~ 1860 (철종 11)

자는 명서(明瑞).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영학(金永學) 1851 (철종 2) ~ 1914

자는 사원(士元), 호는 춘봉(春峯).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김영관(金永灌) 1857 (철종 8) ~ 1916

한말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