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용인이씨시조(龍仁李氏),이길권(李吉卷),용인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2-05 12:20 수정일 : 2018-08-07 15:1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용인이씨시조(龍仁李氏) 이길권(李吉卷)이며 신라말 용인에서 탄생 하였으며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이며 도승인 도선대사가 공을보고 장차 왕을 도와 큰일을할 재목이라고 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그후 서로 친교하는 사이가 되셨고 공이 많이 배우는바가 있었다 한다.

때는 신라의 국운이 쇠하여 혼미를 거듭하는 란세에 견훤은 완산에 웅거하여 후백제라 칭하고 궁예는 고구려 옛터에서 반 하다가 신라 진성여왕육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바꾸어 태봉이라 하였다. 그후 궁예가 폭악교만 하고 폭정으로 민심이 멀어지자 신라 경명왕 이년 혁명 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때 이길권은 용인지방의 토호로서 왕건을 도와 궁예와 견훤을 평정하고 동예의 고부이 오환등을 격파하여 삼한을 통합 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태조가 즉위 한 후 말하기를 주나라의 대업을 일으킨 여상이나 한나라의 개국을 도운 장자방의 공에 견주어 어찌 이모의 공이 가볍다 하랴 하시며 오백호의 식읍과 산성군에 봉군 하였다 그러나 청렴겸양한 그는 이를 굳이 사양 하면서 신은 본시 산골에서 나무나 하고 신이나 삼으면서 궁하게 살려는 터이온데 어찌 이같은 후녹을 감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그의 뜻과는 달리 또다시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숭록대부 태사의 벼슬을 내리고 사후에는 안의의 시호를 내렸다.

관향에 대하여 처음 창성 하게 된 것은 시조인 이길권이 용구에 계적한데서 유래 되는 것으로 전한다. 그후 그 고장이 용구, 구성, 용인현 등등으로 지명이 변천됨에 따라 용구이씨, 구성이씨, 용인이씨로 불려져 왔으나 관향이 다른 것은 아니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용인이씨조상인물

고려에 용인이씨 인물로는 시조인 이길권을 비롯하여

이헌정 대호군 판부전서 시호는 양간

이정 예부상서 우복사 태자태사 시호는 문익

이회 이부상서 사공 좌복사참지정사 시호는 문정

이효공 태위 시호는 안화

이현후 평장사 사도 시호는 정혜

이보 태사 중서령 시호는장강

이진문 태보 문하시랑 시호는 무숙

이인택 태위 시호는위혜

이당한 호부상서 내사령 국사령 사공 시호는 문화

이유정 공부상서 내시랑중 송국태사 시호는 충신

이석 태부 시호는 문광

이광시 총부전서 판도판서 판전의사사 시호는 간숙

이중인(시호는충숙)의때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새로이 이왕조가 등장 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흉간을 좌시 할수 없었던 그는 앞날을 개탄한 나머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절신이다.

이조가 들어서 그를 다시 구성백으로 봉하자 단호히 이를 물리치면서 백이 숙제와 같은 충절이 더렵혀질까 염려된다 하며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자손들 에게도 이조에는 삼대까지 벼슬하지 말라 타이른 다음 못내 이것이 심화가 되어 팔판(팔판서)과 더불어 성거산에 들어가 분신 자결할 것을 모의하고 나무를 산과 같이 쌓아놓았는데 이들 자손들이 찾어와 읍소만류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팔자이고 보니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크게 비통해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배위 되시는 천안전씨 족보에도 그가 중서성 상서와,구성부원군이 라고 적혀있으며 곧은 충절을 기리는 찬시 까지도 실려있다.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소는 용인의 삼대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매년 시제가 봉행 되고 있으며 한편 의정부시 송산사에도 조송산,원양촌,김농암,김일노정,유송은 고려 오선생과 같이 배향되었다.

용인이문이 그를 중시조로 모시는 것은 시조로부터 선대조 산소를 전부 실전된데다 그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 때문이다. 고려말 형조전서를 지낸 그의 장남 이사영은 이성계일파에 몰려 목은이색등이 유배될때 남원 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 백찬까지 이중인의 손자로 삼대가 벼슬에 나가지 않었다.

그러나 이중인의 둘째아들 이사위는 아버지의 유언과는 달리 고려조에 관찰사등 벼슬을 하고 이조에서도 개성유후를 지냈다.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형제가 걷는길은 서로 달랐다.

이사위가 아버지의뜻(불사이군)을 어길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용인이씨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 개국후 이성계는 민심과 정국안정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유신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등을 돌렸다. 때문에 유신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날로 심했다. 탄압에 견디지 못한 유신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걱정하다가 이사위를 대표로 내세워 벼슬길에 나가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같은 동료들의 처지와 개성백성들의 신망을 저버릴수 없어 벼슬길에 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았다 한다.

용인이씨는 여러파중 가장 수가 많고 융성을 누리기는 십육세이백지의 후손으로 자손의 수나 벼슬한 수가 전체의 60%에 달한다.

○이백지(태종.관찰사.청백리) ○정호 대선사 ○이행검(단종.병마절도사) ○이담(선조.관찰사) ○이덕회(선조.남원판관) ○이일(선조.무용대장) ○정민(선조.정란공신) ○이사경(광해.대사간) 등은 조선초기의 용인이씨의 인물이다.

그중 이행검은 이징옥의란을 당시 함경도 진무로 있으면서 그를 계략 으로 종성에 머물게 한뒤 붙잡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으로 책록 됐다.

이효독(군자감정)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과 군자감정이며 성종때의 인물로 성품이 매우 활달 하고 위엄을 삼가며 대인관계가 매우 성실 하였으며 관직 에 있을때도 근면 신중하고 사리가 밝았다 한다.

특히 효성과 우애로 이름났 으며 어느날 조모님 께서 병이 나시어 지렁이즙이 좋다는 의원말에 이를 구해다 드렸더니 먹기를 꺼려 하심으로 공께서 즉석에서 이를 마셔 보이면서 들게 하셨다 한다.

그리고 아우 효언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을때에도 매일같이 래왕하면서 손수 조약하는등 정성으로 병을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같은 효맥도 길이 이어져오는 또하나의 가범이 되고 있다.

이홍간은 사간 효독의 삼남으로 중종때의 인물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또한 당세의 명인들과 사귀는 것을 즐겼고 특히 조광조 김정등과 친했다.

일찍이 한림으로 있을때 김정과 시사를 논하면서 시폐를 개혁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처사케되면 반드시 후회할때가 있을 것이라고 자주 말한 것이 과연 예언한 대로 후일 기묘사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조광조는 참화까지 당하였다. 평안도 평사때의 일이다.

이공에게 남곤이 유림의 영수 로서 두번씩이나 고변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 스러운 일이라고 거듭 규탄한 말이 남곤에게 알려저 미움을 사게되어 변방으로만 쫓겨다녔다 한다.

남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서 장령에 오르고 그후 영산군이 류배케되자 경연에 나가 세종때의 양녕대군의 고사를 들어 강경히 무고임을 건의 할때 좌우의 조신들은 손에 땀을쥐고 들었을정도 였다고 한다. 마침내 중종도 얼굴빛을 고치고 갸륵히 여기어 방면케 하셨는데 조야는 이일을 모두 통쾌히 여겼다고 한다.

또한 을사사화로 사간 곽순이장살되자 누구하나 친구로서 찾는이가 없어 의논하니 모두 꺼려함으로 공만이 홀로 주위의 눈에 관계없이 문상 하였다고 한다. 후에 동지부사에 이르셨고 이렇듯 어떤 세도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소신을 밝혔다한다.

이정민은 호는 옥계 홍산현감 향성의 아들로 박사암 정송강 성우계등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송강이 류배되었을 때는 공 혼자만이 유배지를 자주 찾아 문안 하였다고 한다. 박지화 율곡등에게 사사했고 한때 사우들의 많은 칭찬도 받았다. 35세에 사마시급제하고 이몽학의 난을 이르키자 창의병을 모집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에 들었다. 당진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떠났는데 그 까닭은 다름 아니라 공이 거처했던 세심태는 경치가 집안에 갑지로 알려젔는데 광해가 이를 뺏고 대신 벼슬을 주려하자 공은 이를 피해 홍주의 봉수산하에 은거 하다가 말년에야 집을짓고 옥계자라 자호 하였다. 그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한편 일기를 적었는데 시사를 쓰시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사실대로를 솔직히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춘추필법이라 말했다고 하는데 바로 옥계파안록이 그 저서이다.

이담은 의학.천문.산수에 능했던 성리학자로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그는 소학을 배울때 과부의 아들에게 특이한 행실이 없거던 시귀지 말라는 구절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밤낮없이 수학 에 힘썼다고 한다. 그는 정미사화(명종3)에 화를 입어 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는데 귀양가면서도 어찌나 태연한지 금부도사 조차 감탄했으며 풀려나 많은 하객들이 찾아와 축하하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 도리어 하객이 무안했을 만큼 신중 침착했다한다.

이일은 중종33년 용인시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여나고 명종13년 무과급제 선조16년 니탕개가 북변의 경원을 공격하자 그는 경원부사에 특배되어 주야로 달려가 임지에 당도했으나 종성마져 포위되었다.

방비에 책략을 다한 결과 드디어 번호 스스로 철수 하였다. 선조17년 니탕개가 다시 2만여 대군으로 회령을 침공하자 회령부사로 발탁되어 그소굴을 습격하여 소탕하는등 크게 공을 세웠다. 선조19년 북병사에 오르고 동21년 대군으로 시전번호의 본거지를 처서 그를 항복시킴으로서 이때부터 북변이 무사 안정케 되었다 한다.

특히 사람을 보시는 눈이 남달라서 이무렵 조산만호였던 이순신이 군법에 저촉되어 중죄로 다스리게 되었을 때 평소 그의 충용함을 아시는 공께서 이를 계청하여 백의종군케 한바 있어 뒷날 수군통제사가되어 이충무공이 나라를 구할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공은 자헌대부 무용대장 개성유수 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겸 지훈련도총관 공은무과급제후 선전관을 위시해서 칠부사 이첨사 전라좌수사 평안도 병사를거쳐 선조33년 남병사가 되셨으나 병으로 정평에서 향년64세로 하세 하였다. 그후 의정부 좌참찬이 증직 되고 경종때 장양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사경의 호는 쌍곡 선조 신축문과에 장원하고 광해조 1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이때 경상,충청,감사들이 올린 진찬장에 이미 폐위된 인목대비의 존호를 쓴사실을 묵인 했다 하여 대북의 탄핵을 받자 자진 사퇴 하여 논쟁을 멋게 하고 이때부터 대각에 들기를 좋아하지 안했다.

그후 승지와 병,예조참의등을 지내셨고 특히 인목대비의 유폐를 보고서는 벼슬 하기를 낙락치 않게 생각 하셨다. 천성이 중후청근 하시고 고을을 맡아 치적이 많아 이름이 났다.

워낙 성품이 곧아 당시의 대세도였던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과는 척분간 인대도 조금도 아부하거나 위협에 굴하는일이 없이 오직 소신에 따라 시비가 분명하고 청렴하여 란세의 완인으로 조신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이후천 쌍곡공의 장남 호는 백치 음직으로 용강현령 으로 계실때 지방 세도들이 많아 관의 령이 서지 않고 백성들이 여기에 붙어 도망가 숨는자가 많았다.

공께서 이를 아시고 세도들의 압력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이를 조치하여 바로 잡았다.

광해군10년 정시문과에 급제 장령이 되시어 시관 김윤 임건등의 비행을 탄핵하여 파직케 하고 지평을 거처 인조2년 명장 모문용이 병력5천을 이끌고 후금을 막는다는 구실로 함흥부를 침공하자 조정에서는 공을 접빈 유격장군으로 삼아 이들의 진격을 막게했다.

대임을 맡은 공은 임기응변의 계책을써 남하를 저지하고 무사히 책임을 완수하여 한국 전사상 유격장군으로 손꼽히게 되셨다. 인조10년 내첨사정 으로 계실 때 춘향친제에 불참한 허물로 그만두셨다가 그 후 종묘 서령 영흥부사를 지내시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70세된 고향친구 4인과 더불어 57계를 만들어 여생을 즐기셨다 한다.

이교악 호는 석음와 후망의 아드님 송우암과 동향으로 일찍이 우암께서 공의 자품을 사랑하시고 자손들과 같이 가숙에서 배우게 했다. 오랫동안 문하에서 보고 배워 성취한 것이 많으셨고 숙종 22년 사마시급제 순안현령 동 31년 알성문과에 장원 지평으로 계실 때 숙종께서 전위의 교가 계시어 등대간쟁하실 때 음성이 매우 크다보니 성상께서 저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시니 좌우에서 교악입니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하교를 거두게 하시니 공의 힘이 컷다한다.

동37년에는 이방언과 함께 최석정을 공척하여 관작을 삭탈케 하고 그의 저서 예기류편을 불사르게했다. 유생 곽경두가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하자 왕의 진노를사 홍우선 이택등과 이를 옹호 하셨다가 안주로 유배되시기도 했고 그후 정언,황해감사, 충주목사 수원부사를 역임하시고 청나라에 동지부사로 다녀와서 다시 대사간 승지가된 얼마 후 소론 윤증일당이 노론을 탄압하고 우암의 사원을 철폐하자 이를 듣고 통변 하였으나 도리어 화를 당하여 경산,동래등지로 류배되셨다.

그후 풀려 영조원년 승지의때이다. 정유가 토역의 소를 올렸는데 성상의 진노가 매우커 정을 면박 하시면서 책상머리의 기물을 깨고. 상소문을 내던지신다 하니 좌우에 시립한 조신들도 모두 떨고 얼굴빛이 없었은나 공만은 태연하여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손수 상소문을 주워 올리면서 간절한 간을 거듭하여 드디어 성상을 감오케 하였다 한다. 그 후 동지의금 한성부우윤 도승지 형,예조참판 대사헌등을 지내시고 동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기용되자 삭출되여 고향에 내려와 계시다가 동4년 소론파인 이인좌의 난이나자 울분심화 끝에 66세로 하세하셨다.

이세백(숙종.좌의정)은 조선조에서 용인이씨가 배출한 최초의 정승이다. 장희빈 사사때에도 세자가 공을 잡고 살려주기를 읍소했으나 공은 대의 로서 랭정하게 이를 거절 하셨다는 일화도있다. 수암 권상하가 어느날 세자에게 공을 평하기를 당세의 현상을 논할때 흔히 김수항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신사때의 일은 아마도 문곡도 그에게는 머리를 낮추어 따랐을 것이라며 참으로 옛사람중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어질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까지 말했다한다. 한마디로 그때의 조정에서는 공을 덮을만한 인물이 없을정도로 출중하였고 심한 당쟁속에서도 공만은 그지위가 확고부동하고 초연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