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녕조씨시조(昌寧曺氏),조계룡(曺繼龍),창녕조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1-02 11:01 수정일 : 2019-09-10 13:5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창녕조씨시조(昌寧曺氏 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제26대, 재위기간 :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전해온다.

예향(禮香)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腹中)에 병(病)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病)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장부(丈夫)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龍)의 아들 옥결(玉玦)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子孫萬代) 번영(繁榮)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容貌)가 준수(俊秀)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李學士)가 이상히 여겨 왕(王)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下賜) 하였다고 한다.

계룡(繼龍)은 자라서 진평왕(眞平王)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계룡(繼龍)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겸(謙)은 신라 말(新羅末)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혼인(婚姻)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조씨가첩(昌寧曺氏家牒)」에 의하면 겸(謙)의 손자(孫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여 가문(家門)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傳)하다.

고려 말에 와서 크게 이름을 떨친 민수(敏修)는 공민왕(恭愍王) 때 순주 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라 우왕(禑王) 초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를 물리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창왕(昌王)을 세우는데 공(功)을 세워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이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관찰사를 지낸 항(沆)의 아들 석문(錫文)이 유명하였는데,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이조(吏曹)․형조(刑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지냈고, 세조(世祖) 즉위에 공(功)을 세워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는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난(亂)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왕명(王命)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을 거쳐,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위(偉)는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때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승문원 정자(丞文院正字)가 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성종대(成宗代)에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지도자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碩學) 식(植)은 판교(判校)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儒學界) 대학자(大學者)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여러번 벼슬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門下)에서 김효원(金孝元)․김우옹(金宇顒)․정인홍(鄭仁弘) 등 저명한 학자(學者)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한편 중종(中宗)때 무신(武臣)으로 이름난 윤손(潤孫)은 대사헌(大司憲)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수차에 걸친 야인(野人) 정벌에 공(功)을 세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인 계상(繼商)과 계은(繼殷) 형제는 영흥 판관을 지낸 구서(九敍)의 아들로, 계상은 공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계은은 목사(牧師)를 거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계상의 아들 광원(光遠)은 명종(明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 문수(文秀)는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하여 명필(名筆)로 손꼽혔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영조(英祖) 때 교리(敎理)․이조 정랑(吏曹正郞)․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낸 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오른 명교(命敎)가 글씨에 뛰어나「능가사사적비(愣伽寺事蹟碑)」를 비롯한 많은 비문(碑文)을 남겼으며, 윤형(允亨)도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은 풀․돌․대나무를 잘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종(中宗) 때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치우(致虞)와 그의 증손(曾孫) 광익(光益)․호익(好益)이 이름났다. 호익(好益)은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군민(軍民)을 규합하여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下賜) 받았고, 정유재란 때는 다시 강동(江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한 후 안주(安州)․성천(成川)․정주(定州) 등지의 목사(牧師)를 역임했다.

연산군(燕山君)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숙기(叔沂)는 주역(周易)에 정통했고, 중종(中宗) 때의 반정공신(反正功臣) 계형(繼衡)과 인조(仁祖)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우인(友人), 이조판서(吏曹判書) 석우(錫雨) 등이 뛰어났으며, 근대(近代)에 와서는 만식(晩植)이 민족독립운동가(民族獨立運動家)로 조선일보사장(朝鮮日報社長)을 역임하여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여 명망 높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가문(家門)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남한(南韓)에 366,7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창녕조씨조상인물

조겸(曺 謙) 고려(高麗) 때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역임하였다.

조연우(曺延祐) 자(子)는 자기(自奇).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조한지(曺漢知) 고려(高麗)에서 상호군(上護軍)․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조용기(曺用寄) 자(子)는 방언(邦彦), 호(號)는 강세선(降世仙),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高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조저(曺 著) 시호(諡號)는 장양(將養).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조익청(曺益淸) ?~1353(공민왕 2) 시호(諡號)는 양평(襄平). 충숙왕(忠肅王)때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충혜왕(忠惠王) 때 충숙왕․충혜왕 부자간의 불화를 극력 말렸으며, 충혜왕 초에 대호군(大護軍)으로 간신의 무리 송팔랑(宋八郞)․홍 장(洪 莊) 등을 잡아 문초하다가 도리어 그들의 무고를 입어 1332년(충숙왕 1)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로 좌천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이 운(李 芸)․기 철(奇 轍) 등과 원나라에 있으면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탐학 무도함을 극언하고 고려(高麗)를 원나라 영토의 일부로서 성(省)을 두어 백성들을편안케 할 것을 청했다.

1351년(충정왕 3)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공민왕(恭愍王)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1352년(공민왕 1) 1등공신이 되어 좌정승(左定丞)에 올라 하성부원군(下誠府院君)에 봉해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되었다.

조의생(曺義生) 호(號)는 원촌(遠村). 고려 때 태학사(太學士)를 지냈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조광한(曺匡漢) 고려조(高麗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조계방(曺桂芳) 호(號)는 청구당(靑邱當).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 學)을 지냈다.

조정통(曺精通) 호(號)는 수운(水雲).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248년(충렬왕 10) 호군(護軍)에 오르고, 1290년(충렬왕 16) 도첨의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조한룡(曺漢龍) 호(號)는 세염(洗染), 시호(諡號)는 청간(淸簡).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조유인(曺由仁) 1370(공민왕 19)~1434(세종 16) 1390년(공양왕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395년(태조 4) 문과(文科)에 급제, 장기 현감(長鬐縣監)을 거쳐 수원도호부사(水源都護府使)에 이르렀다.

조민수(曺敏修) ?~1390(공양왕 1) 1361년(공민왕 10) 순주 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공신에 올랐다. 이듬해 양광도 도순문사(揚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 판서(典理判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등을 역임, 1368년 명(明)나라가 원(元)나라 서울인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서 의정주등처 안무사(義靜州等處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했으며,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에 녹훈(錄勳) 되었다.

우왕(禑王) 초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倭寇)를 물리쳤고,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우왕(禑王)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우는데 중요 역할을 하여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揚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가 되었다.

조희직(曺希直) 고려조(高麗朝)에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중의 한 사람이다.

조신충(曺信忠) 고려(高麗)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조서(曺 庶) 자(子)는 여중(女衆), 호(號)는 청간(淸簡). 조선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조문택(曺文澤) 시호(諡號)는 충익(忠翊). 조선 때 이조 판서(梨棗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상치(曺尙治) 자(子)는 자경(子景), 호(號)는 단고(丹皐)․정재(靜齋),시호(諡號)는 충정(忠貞), 강계 병마사(江界兵馬使) 신충(信忠)의 아들. 길 재(吉 再)의 문인. 1419년(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수학했다.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의 세왕을 섬겨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함께 특별한 총애를 받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富提學)에 발탁되었다.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임명 되었으나 사퇴,「노산조부제학 포인 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를 미리 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히고 외부와의 접촉을끊었다. 임종 때 자기 시문(詩文)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조비형(曺備衡) 1376(우왕 2)~1440(세종 22) 자(子)는 평보(平父), 시호(諡號)는 안무(安武). 1402년(태종 2) 무과(武科)에 급제, 호군(護軍)이 되었다.

1405년 옹진 병마사(甕津兵馬使)로 부임, 기근에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위하여 사재(私財)를 털어 구제, 칭송을 받았으며, 이듬해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상호군(上護軍)․경기좌도대진등처(京畿左道大津等處)․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의주병마절제사(義州兵馬節制使)․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냈다.

1414년(태종 14) 경원부(慶元府)가 새로 설치되자 경원등처 병마절제사(慶原等處兵馬節制使)가 되고, 1418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 1420년(세종2) 도청제(都摠制)를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참찬(參贊)․평안도 병마도절제사․중추원사(中樞院使)․경상도 병마도절제사 등을 역임했다.

조석문(曺錫文) 1413(태종 13)~1477(성종 8) 초명(初名)은 석문(碩門), 자(子)는 순보(順甫),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관찰사(觀察使) 항(沆)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를 거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이 되고, 정언(正言)을 지낸 뒤 이조(吏曹)․형조(刑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부임, 치적을 쌓아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

다시 관찰사의 추천으로 상호군(上護軍)․지형조사(知刑曹事)에 올랐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세조의 즉위에 공헌하여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도승지(都承旨)에 승진했다. 1459년(세조 5)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466년 우찬성(右贊成) 겸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 1등공신(敵愾一等功臣)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북정록(北征錄)」을 편찬 했고, 예종(睿宗) 즉위 초 남 이(南 怡)․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잘 처리하여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또 좌리 1등공신(佐理一等功臣)이 되었다.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조효문(曺孝門) ?~1462(세조 8) 자(字)는 행원(行願), 시호(諡號)는 성도(成度), 참판(參判) 혼(渾)의 아들. 1444년(세종 26)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454년(단종 2) 정언(正言)을 거쳐 이듬해 사인 (舍人)으로 승진했다.

이해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의 등극(登極)을 도와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이 되고, 다음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58년(세조 4) 예조 참의(禮曹參議)에서 예조 참판(禮曹參 判)에 승진하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추원 부사(中樞院府使)가 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으로 개성부 선위사(開成府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1460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다음해 예조 참판에 재임되어 악학도감 제조(樂學都監提調)를 겸직,악률(樂律)을 개정했고, 창녕부원군(昌寧副院君)에 진봉(進奉)되었다.

조변륭(曺變隆) 조선조(朝鮮朝)에 정자(正字)를 지냈다.

조변안(曺變安) 자(子)는 통지(通之). 조선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조숙기(曺淑沂) 1434(세종 6)~1509(중종 4) 자(子)는 문위(文偉), 현령(懸令) 안중(顔仲)의 아들. 1474년(성종 5)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어(射御)에 능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이조 좌랑 (吏曹佐郞)으로 윤필상(尹弼商)의 건주(建州) 정벌에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 전략가(戰略家)로서 많은 공을 세워 3관등이 특진되었다.

그뒤 교리(校理)․순천 군수(順天郡守)․집의(執義)․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강릉 부사(江陵府使)․의주 목사(義州牧使)․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연산군(燕山君) 초 대사간(大司諫)․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경성 부사 (鏡城府使)․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500년(연산군 6) 천추사(千秋 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무를 겸비했고「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조위(曺 偉) 1454(단종 2)~1503(연산군 9) 자(字)는 태허(太虛), 호(號)는 매계(梅溪), 시호(諡號)는 문장(文莊),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74년 (성종 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479년(성종 10) 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이 되었다.

여러 차례 시제(試製) 장원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성종(成宗)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검토관(檢討官)․시독관(試讀官) 등으로 경연(經筵)에 나갔다. 지평(持平)․응교(應敎)를 거쳐 1485년(성종 16)에 노모(老母)를 봉양하려고 사퇴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고향의 수령인 함양 군수(咸陽郡守)에 전임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수차 표리(表裏)․녹피(鹿皮)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91년(성종 22) 검상(檢詳)․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를 역임, 1493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고, 이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大司成)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의주(義州)에서 피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李克均)의 극간(極諫)으로 선왕 (先王)의 총신이라 하여 죽음을 면하고 의주에 장류(杖流)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士林)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지도자였다. 글씨를 잘썼다. 황 간(黃 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신(曺 伸) 자(字)는 숙분(叔奮), 호(號)는 적암(適庵), 현감(縣監) 계문(季文)의 아들, 위(偉)의 동생(同生).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잘 지었다. 1479년(성종 10) 통신사(通信士)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돌아와 왕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했는데, 그 글이 매우 훌륭하여 사역원정으로 발탁되었고, 중종(中宗)의 명으로「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외국어에도 뛰어나 역관(譯官)으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 다녀왔고,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시로 수창(酬唱), 외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는 은퇴하여 금산(金山)에 거주,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조한보(曺漢輔) 호(號)는 망기당(忘機堂), 상치(尙治)의 손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생원(生員) 임 지(任 沚)․최희철(崔希哲) 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여 동맹휴학(同盟休學)을 했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후 이언적(李彦迪)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 스승과 무극(無極)․태극(太極)에 대한 의견 교환을 4, 5차나 거듭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널리 고서(古書)를 통독하여 학식이 풍부했으며 선학(禪學)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조수문(曺秀文) 자(字)는 장보(章甫), 호(號)는 죽림(竹林).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조호(曺 浩) 자(字)는 호연(浩然).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조치우(曺致虞) 자(字)는 순경(舜卿), 호(號)는 정우당(淨友堂), 군수(郡守) 말손(末孫)의 아들. 1494년(성종 25) 진사(進士)로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사옹원정(司饔院正)에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대구 부사(大丘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뒤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효행(孝行)이 뛰어나 왕으로부터「소학(小學)」과 옥비(玉碑)를 하사 받았으며, 55세에 모친의 봉양을 위해 사직했다.

조계상(曺繼常) 1466(세조 12)~1543(중종 38) 자(字)는 종성(宗聖),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상치(尙治)의 증손, 부사(府使) 구서(九叙)의 아들. 1495년(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12년(중종 7)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18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등용을 반대하다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파직, 뒤에 다시등용되어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랐으나 1531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부처(付處)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자 우찬성(右贊成)으로 기용되고,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했다.

조계은(曺繼殷) 자(字)는 준성(遵聖), 목사(牧使) 구서(九叙)의 아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계상(繼商)의 형.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으며, 1511년(중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를 거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조언형(曺彦亨) 1469(예종 1)~1526(중종 21) 자(字)는 형지(亨之), 봉사(奉事) 영(永)의 아들. 1504년(연산군 10)생원(生員)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판교(判校)․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조효연(曺孝淵) 1486(성종 17)~1530(중종 25) 자(字)는 언박(彦薄), 사옹원정(司饔院 正) 치우(致虞)의 아들. 1513년(중종 8) 생원(生員)이 되고, 15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사록(司錄)․전적(典籍)을 거쳐 1528년 함안군수(咸安郡守)가 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조희(曺 禧) 1490(성종 21)~1564(명종 19) 자(字)는 중경(仲慶), 호(號)는 수운헌(水雲軒).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17년(중종 1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를 거쳐 병조 정랑(兵曹正郞)․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 정랑(工曹正郞)․고부 군수(古阜郡守)․무장 현감(茂長縣監)을 지내고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올랐고, 동래(東萊)․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조광원(曺光遠) 1492(성종 23)~1573(선조 6) 자(字)는 회보(晦甫),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우찬성(右贊成) 계상(繼商)의 아들. 1522년(중종 1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등을 지낸 뒤 1538년 장령(掌令)에 기용, 이어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1540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도승지(都承旨)에 승진했다.

판결사(判決使)․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1545년 명종(明宗)이즉위하자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고, 이해부터 3년 동안 함경남․북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548년(명종 3)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고, 대사헌(大司憲)․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평안도 관찰사․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으며,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때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都巡察使)로 활약, 좌참찬(左參贊)․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거쳐 155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156 1년 70세가 되자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윤손(曺潤孫) 자(字)는 억지(億之), 시호(諡號)는 장호(莊胡), 대사헌숙기(淑沂)의 아들. 1502년(연산군 8) 무과(武科)에 급제,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06년 류 빈(柳 濱)․윤상로(尹漡老)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燕山君)을 폐하려 했으나,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의 반정(反正)이 먼저 성공함으로써 공신녹권(功臣錄券)만을받았다.

1509년(중종 4) 웅천 현감(熊川縣監)이 되어 남해안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倭寇)를 격파했고, 1512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야인(野人)을 토벌했다. 이듬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에 특진되어 여연(閭延)․무창(茂昌)에 들어와 정착하려 하는 야인(野人)을 몰아냈다.

1528년(중종 23)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야인의 침입을 격퇴했고, 1533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36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현(曺 縣) ?~1555(명종 10) 자(字)는 희경(希慶), 호(號)는 월헌(月軒). 무과(武科)에 급제,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때 가리포 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增)되고 능주(綾州)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조식(曺 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자(字)는 건중(楗仲), 호(號)는 남명(南冥),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판교(判校) 언형(彦亨)의 아들. 삼가(三嘉) 출신.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하며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여러 대가(大家)의 서적을섭렵(涉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장하고 경의(敬意)를 신조로 하여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로삼았다. 1552년(명종 7)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몽량(李夢亮)의 천거로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단성 현감(丹城縣監)․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이해 왕의 부름으로치국(治國)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두류산(頭流山) 덕산동(德山洞)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수차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했다. 문하에서 김효원(金孝元)․김우옹(金宇顒)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宣祖) 때 대사간(大司諫)에 추증(追贈), 광해군(光海君) 때에영의정(領議政)이 더해졌다. 진주(晋州)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金海)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三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흡(曺 洽) 시호(諡號)는 공희(恭僖). 조선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조광익(曺光益) 1537(중종 32)~1578(선조 11) 자(字)는 가회(可晦), 호(號)는 죽와(竹窩)․취원당(聚遠黨), 군수(郡守) 효연(曉然)의 손자, 윤신(允愼)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61년(명종 61) 생원(生員)이 되고, 156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감찰(鑑察)을 지냈고, 1576년(선조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조호익(曺好益)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자(字)는 사우(社友), 호(號)는 지산(芝山), 시호(諡號)는 정간(丁艱),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開始), 윤신(允愼)의 아들. 창원(蒼遠)출신.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576년 (선조 9)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최 황(崔 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검독(檢督)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사퇴하자 명령을 거부한다고 대노(大怒)한 최 항에 의해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되어 강동(江東)에 유배되었다.

배소(配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關西)지방에서 학풍(學風)을 크게 떨쳤다. 15 92년 임진왜란 때 류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 나와 소모관(召募官)이 되고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中和)․상원(上元) 등지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녹비(廘 皮)를 하사 받았다.

그후 성주 목사(城主牧使)를 거쳐 1595년 안주 목사(安州牧使)가 되고, 이어 성천(成川)․정주(定州)의 목사를 역임한 뒤 사직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뒤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죽은 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江東)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대중(曺大中) 1549(명종 4)~1590(선조 23) 자(字)는 화우(和宇), 호(號)는 정곡(鼎谷), 참봉(參奉) 세명(世明)의 아들. 이 황(李 愰)의 문인. 1576년(선조 9) 진사(進士)가 되고, 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9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를 역임하였다.

조탁(曺 倬) 1552(명종 7)~1621(광해군 13) 자(字)는 대이(大而), 호(號)는 이양당(理養堂)․치재(耻齋), 몽정(夢禎)의 아들.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에 왕을 호종(扈從), 만여언(萬餘言)에 달하는 부흥책(復興策) 10조(條)를 올려 왕의 동의를 얻었다.

1599년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예조․호조․병조의 좌랑(佐郞), 정언(正言)을 지내고, 1603년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가 되었다. 이어 필선(弼善)․사예(司藝)․장령(掌令) ․사옹원정(司饔院正)을 거쳐 1610년(광해군 2)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그뒤 형조 참판(刑曹參判)․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내고, 1618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이첨(李爾瞻) 등과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홍립(曺弘立) 1558(명종 13)~1640(인조 18) 자(字)는 극원(克遠), 호(號)는 수죽(脩竹), 광복(光福)의 아들. 1579년(선조 12)에 진사(進士)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정언(正言)을 역임, 1590년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이 연로(年老)하여 사퇴했다.

1601년(선조 34) 병조의 좌랑(佐郞)에서 정랑(正郞)으로 승진, 1607년 탐학한 관리라 하여 파직되었다가 뒤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복직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후 대북(大北)파의 전횡이 심해지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영광군수(靈光郡守)에 보직되었으나 파직, 후에 등용되어 사섬시정(司贍寺正)․사도시정(司導寺正)․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등을 역임했다.

1626년(인조 4) 정언(正言)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으나, 1628년 류효립(柳孝立)의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되어 하동(河童)에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풀려 나왔다. 그후 후진 교육에 전심하다가 1637년(인조 15)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조사남(曺士男) 1560(명종 15)~1592(선조 25) 자(字)는 백능(百能).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 가담, 공을 세웠으나 지산에서 전사했다.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조우인(曺友仁) 1561(명종16)~1625(인조3) 자(字)는 여익(汝益), 호(號)는 매호(梅湖)․이재(怡齋), 우부승지(右副承旨) 계형(繼衡)의 증손, 몽신(夢臣)의 아들, 1588년(선조 21)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參奉)을 지낸 뒤 165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가 1621년(광해군 13)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와 고궁 (古宮)의 황폐함을 보고 시를 지은 것이 백대연(白大衍) 등 이이첨 (李爾瞻) 일당에 의해 대역의 뜻이 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다. 글씨․그림․시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졌으며, 글씨는 특히진체(晋體)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조명욱(曺明勗) 1572(선조 5)~1637(인조 15) 자(字)는 여우(汝偶), 호(號)는 율촌(栗村), 참판(參判) 탁(倬)의 아들,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05년 별제(別提)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9년(광해군 1) 정인홍 (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의 탄핵으로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당했다.

1610년 다시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가 되고, 그후 교리(校理)․수찬(修撰)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13년 수찬(修撰)으로 정 조(鄭造)․윤 인(尹 訒)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자 이를 극간(極諫)하여 중지케 했고, 그후 교리․장령(掌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남양 부사․영천 군수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울산 부사(蔚山府使)․태안 군수(泰安郡守)․영천 군수(榮川郡守) 등을 역임, 1636년(인조 14) 이천 부사(利川府使)가 되어 이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曺 溥) 자(字)는 도연(道淵),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조수성(曺守誠) 호(號)는 청강(淸江), 조선(朝鮮) 때 절개(節槪)를 지킨신하(臣下)로 주변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조신준(曺臣俊) 1573(선조 6)~? 자(字)는 공저(公著), 호(號)는 영내(寧耐)․무민옹(無悶翁), 장단 부사(長湍府使) 천령(千齡)의 손자, 욱(旭)의 아들, 차운로(車雲輅)의 문인. 개성(開城) 출신. 1606년(선조 39)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삼례도 찰방(參禮道察訪)을 거쳐 장연 부사(長淵府使)에 이르렀다.

조전주(曺殿周) 1580(선조 13)~1636(인조 14) 자(字)는 만취(萬聚),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상치(尙治)의 후손. 1600년(선조 3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학문을 즐겼으며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예리하여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했다.

조명교(曺命敎) 1687(숙종 13)~1753(영조 29) 자(字)는 이보(彝甫), 호(號)는 담운(澹雲), 판결사(判決事) 하기(夏奇)의 아들. 1717년(숙종 4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21년(경종 1) 검열(檢閱)로 재직중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당하고, 1724년(경종 4) 정언(正言)에등용되어 소론(少論)의 타도에 앞장섰다.

교리(校理)․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747년(영조 23)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다.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배천군수(白川郡守)․성천 부사(成川府使)․광주부 유수(光州府留守)를 지내고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덕행(德行)과 학문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다.

조문수(曺文秀) 1590(선조 23)~1647(인조 25) 자(字)는 자실(字實), 호(號)는 설정(雪汀), 주부(主簿) 경인(景仁)의 아들. 1609년(광해군 1) 진사(進士)가 되고, 1624년(인조 2) 현감(縣 監)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수찬(修撰)․필선(弼善)을 지냈고, 16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특진관(特進官)을 겸했다.

1645년 좌승지(左承旨)에 이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졌으며, 1647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임지(任地)에서 죽었다. 시(詩)와 해서(楷書)에 능했다.

조행립(曺行立) ?~1663(현종 4)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태호(兌湖), 도사(都事) 인서(麟瑞)의 아들. 박동열(朴東說)․김장생(金長生)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촉망을 받았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정국의 혼란을 피해 시골에 내려갔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어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감찰(監察)을 역임하고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 관기(官紀)를 바로 잡았다.

그후 평시서령(平市署令)․익산(益山)과 온양(溫陽)의 군수(郡守),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사퇴, 고향에 내려가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풍속의 순화(醇化)에 노력하고, 뒤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죽었다. 영암(靈巖)의 구림사(鳩林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조한영(曺漢英) 1608(선조 41)~1670(현종 11) 자(字)는 수이(守而), 호(號)는 회곡(晦谷),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참판(參判) 문수(文秀)의 아들. 이 식(李 植)․김장생(金長生)의문인. 1627년(인조 5) 생원(生員)이 되고, 163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 공격을 위해 원병 파견과 원손(元孫)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지평(持平)으로 이를반대하는 만언소를 올렸다.

이에 배청파(排淸派)로서 김상헌(金尙憲)․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청나라의 심양에 잡혀가서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 이때 김상헌과「설교주창집(雪窖酬唱集)」을 지었으며, 1642년 의주(義州)에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효종(孝宗)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남인(南人)인 윤 휴(尹 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면직되고, 현종(顯宗)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어 하흥군(夏興君)을 습봉(襲封), 형조와 예조의 참판(參判)․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났고, 시조(時調) 2수가 전한다.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효창(曺孝昌) 1623(인조 1)~1680(숙종 6) 자(字)는 행원(行源), 호(號)는 계양(桂陽)․청은(淸隱), 예빈시정(藝賓寺正) 윤희(胤禧)의 손자, 익(瀷)의 아들. 1666년(현종 7) 진사(進 士)가 되고, 1678년(숙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거쳐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 1679년 예조 좌랑(禮曹左郞)에 전임했다가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에 부임하여 이듬해 죽었다.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조윤신(曺允愼) 자(字)는 성중(誠中), 호(號)는 고암(古巖). 조선(朝鮮)때 덕망 높은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조하망(曺夏望) 1682(숙종 8)~1747(영조 23) 자(字)는 아중(雅仲), 호(號)는 서주(西州), 금구 현령(金溝縣令) 헌주(憲周)의 아들. 1711년(숙종 3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22년(경종 2)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그후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 좌랑(工曹佐郞)․의령 현령(宜寧縣令) 등을 역임했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724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여 경포대(鏡浦臺)를 중수 (重修), 상량문(上樑文)을 지어 그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1746년 영월 부사(寧越府使)로 전임했다가 병을 사퇴했다. 경사(經史)에 밝고 시부(試賦)가 뛰어났으며 술을 즐겼다.

조붕구(曺鵬九) 1700(숙종 26)~1735(영조 11) 자(字)는 능만(能萬), 호(號)는 옥여재(玉余齋). 신동(神童)으로서 18세에「주역(周易)」에 통달, 항상 책을 지어 감추어 두었다. 죽은뒤 2백여 권의 저서가 발견되었으나 빗물이 스며들어 대부분이 못보게 되었다.

조윤형(曺允亨) 1725(영조 1)~1799(정조 23) 자(字)는 치행(穉行), 호(號)는 송하옹(松下翁), 명교(命敎)의 아들. 학행으로 천거되어 1781년(정조 5)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가 되고,1784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보덕(輔德)으로서 책례도감 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했다.

이어 안악 군수(安岳郡守)․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역임하고, 1719년 호조 참의(戶曹參議), 1797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고 그림은 풀․돌․대나무를잘 그렸다.

조윤대(曺允大) 1748(영조 24)~1813(순조 13) 자(字)는 사원(士元), 호(號)는 동포(東浦), 대사간(大司諫) 하망(夏望)의 손자. 명준(命峻)의 아들. 1779년(정조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1783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고,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78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이듬해 경원 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1798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1800년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 1801년(순조 1) 형조 판서(刑曹判書)로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이해 신유박해(辛酉迫害)로처형된 중국(中國)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전후사실을 보고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수원부 유수(水源府留守)가 되고 1806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大司憲)․예조 판서(禮曹判書), 다음해 판의금부사 (判義禁府事)․이조 판서(吏曹判書)․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 1811년 동지사(同知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 우빈객(右賓客), 1813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다.

조광진(曺匡振) 1772(영조 48)~1840(헌종 6) 자(字)는 정보(正甫), 호(號)는 구눌(口訥)․눌인(訥人). 평양(平壤)출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우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書體)를 터득했다.

특히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있어서는 청나라의 유용(有用)을 따르고, 예서(隸書)는 장도악(張道渥)을 따랐다. 당시의 명필 신 위 (申 緯)․김정희(金正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봉진(曺鳳振) 1777(정조 1)~? 자(字)는 의경(儀卿), 호(號)는 신암(愼庵), 이조 판서(吏曹判書) 윤대(允大)의 아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812년정언(正言), 그뒤 부교리(府校理)․필선(弼善),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를 역임, 1823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고, 형조 판서(刑曹判書)․공조 판서(工曹判書) 등을 지냈다.

1825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서 둔전(屯田)에 대한 세제(稅制)의 개혁, 실시에 있어서의 민폐(民弊)의 유무(有無)를 묻는 왕에게 폐가 없다고 한 뒤 세자에게는 3가지 폐가 있다고 하여 탄핵을받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1829년 풀려나와 다시 기용, 183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1838년(헌종 4)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조명채(曺命采) 자(字)는 주경(疇卿), 호(號)는 난곡(蘭谷),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조석우(曺錫雨) 1810(순조 10)~? 자(字)는 치용(稚用), 호(號)는 연암(烟巖), 용진(龍振)의 아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53년(철종 4)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고, 이듬해 고조부(高祖父)인 하망(夏望)의 문집「서주집(西州集)」을 간행했다.

그중 윤 증(尹 拯)에 대한 제문(祭文) 속에서 송시열(松時烈)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말썽이 되어 유생(儒生)들의 항의로 파직(罷職), 중화(中和)에 유배되었다. 1857년 풀려 나와 공조 참판(工曹參 判)을 거쳐 1867년(고종 4)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글씨도 잘썼다.

조석여(曺錫輿) 1813(순조 13)~ ? 자(字)는 치경(穉敬), 호(號)는 하강(荷江), 용진(龍振)의 아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를 거쳐 1866년(고종 3)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고, 18 83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썼다.

조석원(曺錫元) 1817(순조 17)~? 자(字)는 현로(玄老), 호(號)는 소운(紹雲), 성진(星振)의 아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조시영(曺始永) 자(字)는 치극(致克), 호(號)는 후매(後梅). 1897년(광무1)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 재임중 창녕의 화왕산 용지반(龍池盤)에 득성조(得姓祖)의 비(碑)를 세웠다.

조인승(曺寅承) 자(字)는 경빈(景賓), 호(號)는 동곡(東谷),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조세걸(曺世杰) 호(號)는 패주(浿洲)․수천(須川), 평양(平壤) 출신. 김명국(金命國)에게 그림을 배웠고,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중국(中國)의 명적을 많이 소장했고, 김명국(金命國)의 화법(畵 法)을 후세에 전했다.

산수(山水)․인물(人物)을 잘 그렸고, 그의 단채(丹彩)는 보통 화가의 수묵도말(水墨塗抹)과 다른 독자적 수법을 보였으며 또한 섬세․정교한 필치와 선명한 색채로써 명말(明末)․청초(淸初)의 화풍(畵 風)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환(曺成煥) 1875(고종 12)~1948 일명(一名) 욱(煜), 호(號)는 청사(晴蓑), 서울 출신, 26세 때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부패한 군부(軍部)를 숙청하려다 발각,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칙명(勅命)으로 3년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참위(參尉)에 임관되었으나 사직하고, 1907년(융희 1) 안창호(安昌浩)․이 갑(李 甲)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한일합방 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중국에 망명, 북경(北京)에서 중국혁명가 진기미(陣其美)와 한중공동전선(韓中共同戰線)을 펴 항일투쟁을 벌일 것에 합의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의 만주 방문을 게기로 암살하려다 실패,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석방되어 만주로 망 명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군무차장(軍務次長)을 지내고, 다시만주에 가서 서 일(徐 一)․계 화(桂 和)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부장(軍事部長)에 취임, 청산리(靑山里) 싸움 후에 독립운동단체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될 때 외교부장(外交部長)이 되고, 이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감찰위원장을 거쳐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8년간 재직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임시정부의 군사특파원(軍事特派員)으로 서안(西安)에파견되어 중국 정부와 협의,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닦았다.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최고통수부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있다가 해방으로 귀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조만식(曺晩植) 1882(고종 19)~? 호(號)는 고당(古堂), 경학의 아들. 평남 강서(江西) 출신. 15세까지서당(書堂)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05년(광무 9)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 중 기독교(基督敎)에 입교(入敎), 1908년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꾸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했다.

그동안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 주의에 크게감동 받아 자기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0년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부(法學部)에 입학, 1913년 졸업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취임했고, 1919년 동교교장이 되었다.

이해 교장을 사직하고 3․1 운동에 참가,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잡혀 평양 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1년 평양 기독교 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의 장로(長老)로 사무, 이듬해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했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다음해 이들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뒤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이 되었다가, 1926년 일제(日帝)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직했다.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참여했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좌절된 후 1930년에는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이 되어 민족언록창달에 공헌했다.

그 뒤 많은 후진들과 기독교인들의 무저항 민족주의(無抵抗民族主義)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에 지원병(志願兵)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하러온 조선군 사령관 이다가끼(權垣征四郞)와의 면담을 거절, 이를 극력 반대하다 구금당했다.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 교회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폐쇄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평안남도(平安南道)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평남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의 위원장(委員長)이되어 질서 유지와 국민의 지도에 앞장섰다.

한편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北朝鮮人民政治委員會)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 공산화(韓國共産化) 정책을 간파하여 취임을 거부하고, 이해 11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反共路線)을 뚜렷이 하고 반탁운동(反託運動)의 선봉에 나섰다.

이에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은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接受)되고 그는 소련군에 의해 고려(高麗) 호텔에 연 금,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월남(越南)을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동포를 남겨 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없다고 거부했다. 6․25사변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봉암(曺奉岩) 1898(광무 2)~1959 호(號)는 죽산(竹山). 강화(江華) 출신.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 군청(郡廳)에 근무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修學)했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복역,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오꼬오(東京) 쥬우오오 대학(中央大學)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秘密結 社) 흑도회(黑濤會)에 가담,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이어 초대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이해 11월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 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