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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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2-31 15:45 수정일 : 2019-07-29 14:20

시조와 본관의 유래

인동장씨의 시조는 고려삼중대광신호위싱장군(高麗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이다. 시조 장금용은 고려초 경상도 인동고을(縣․府․郡)의 본 바닥인 옥산(玉山) 땅(현재 구미시 인동동 인의리 386번지) 현 대종가 터에 처음 자리를 잡고(肇基) 전거(奠居)하였으니 千有餘年을 종손이 대대(代代)로 세거(世居)해와 지금은 38대종손에 이르고 대성(大姓)답게 고려(高麗) 초(初)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28개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각파의 파조(派祖)는 다 이 종택에서 출생(出生)하여 그 후손이 70만에 이르고, 전국에 걸쳐 산거(散居)하고 있다. 장씨하면 그 명성이나 세족(世族) 수(數)에 있어 으레 인동장씨를 연상하게 한다.

본관을 관적으로 삼은 인동(仁同)과 별호 옥산(玉山)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1923년 호적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주로 본관을 옥산으로 사용하였다. 그 사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해 공훈(功勳)을 세운 인동장씨 선대(先代) 조상들에게 왕이 봉군의 호를 내릴 때 관적(貫籍)의 이름과 그 뜻을 넣어 군호(君號)를 내려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옥산군(玉山君),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등에 봉해졌고, 인동장씨를 평할 때 옥산화벌(玉山華閥), 옥산명벌(玉山名閥)이라 해왔으며, 지금도 본향(本鄕) 인동에서는 혼서(婚書), 명정(銘旌), 묘갈(墓碣)에 옥산장공(玉山張公)으로 쓰고 있다.

관적(貫籍) 인동(仁同)의 연혁(沿革)은 신라(新羅) 때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이었는데 그 후 수동현(壽同縣)으로 개칭(改稱)하였는데 연기는 미상이며 경덕왕 16년(서기 739년)에 지금의 이름인 인동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서기 1018년) 경산부(京山府:星州)에 영속(營屬)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서기 1390년)에 경산부(京山府)에서 분리(分離)되어 인동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약목현(若木縣)을 영속시켰다.

조선 태종 13년(서기 1413년) 10월 전국의 감무(監務)를 폐지할 때 다시 인동현(仁同縣)이 되었다. 선조(宣祖) 34년(서기 1601년) 찰리사(察里使) 망우당(亡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인동의 주악(主嶽) 천생산(天生山)에 성곽(城郭)을 수축(修築)하였다.

선조(宣祖) 37년(서기 1604년)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의 계청(啓請)으로 인동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陞格)시켜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조방장(助防將)을 겸(兼)하였다. 선조(宣祖) 39년(서기 1606년) 선산부(善山府)에 속한 해평현(海平縣)을 인동도호부에 영속시켰다가 선조 41년(서기 1608년) 조방장(助防將)을 폐지하면서 해평현을 다시 선산부(善山府)로 환속(還屬)시켰다.

인조(仁祖) 22년(서기 1644년) 칠곡부(漆谷府)를 신설(新設) 분리(分離)하고, 고종(高宗) 32년(서기 1895년) 지방 주군현(州郡縣) 통합 시 인동군으로 개편되어 읍내면, 북면, 동면, 장곡면, 문량면, 석적면, 북삼면, 지산면 등 9개면을 관장하다가 1914년 3월 1일 칠곡군(漆谷郡)에 합병되어 속면이 되어 그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통합하여 인동면이 되었다.

1978년 2월 15일 선산군 구미읍이 칠곡군 인동면이 병합하여 구미시(龜尾市)로 승격(昇格)하였다. 1983년 2월 15일 인동면의 인의동(仁義洞)과 황상동(黃桑洞), 신동(新洞), 구평동(九坪洞)을 합쳐 인동동(仁同洞)으로, 구포동(龜浦洞), 금전동(金田洞), 거의동(居依洞), 옥계동(玉溪洞), 양호동(陽湖洞)의 일부(一部)를 합하여 양포동(陽浦洞)으로, 진평동(眞坪洞)과 시미동(侍美洞), 임수동(臨洙洞)을 합쳐 진미동(眞美洞)으로 개편(改編)하였다.

인동의 중심지이고 본 바닥인 인동면 이었던 인동동 지역 일원을 장씨의 관향산인 옥산(玉山)의 산 이름을 따서 옥산이라 하였는데 신라시대부터 인동고을의 목민관이 집무하던 관아(官衙)가 1914년 칠곡군에 병합(倂合)될 때까지 옥산에 있었다. 장씨가 본관을 인동과 옥산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緣由)에서 기인된 것이다.

1989년 3월에 발간된 한국족보대전(韓國族譜大典)과 그 후 혹자(或者)들은 인동의 별호를 연복(延福)이라 운운(云云)하였고, 초(草)간(磵) 권문해(權文海) 저서(著書) 대동운옥(大東韻玉)에 노전즉인동구호야(蘆田卽仁同舊號也)라 하였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옥산지(玉山志), 인동읍지(仁同邑誌) 등 우리나리 공사(公私) 지리지(地理誌)에 인동의 읍호(邑號)와 별호(別號)는 옥산(玉山)이라 하였을 뿐 연복(延福)과 노전(蘆田)이라는 기록은 없다.

장태사(張太師)를 시조(始祖)로 모시는 안동(安東) 등 일부 장씨 등의 족보(族譜)에 인동장씨 시조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號衛)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을 장태사(張太師)의 14세손(世孫)으로 무계(誣系)한 장계(張桂) 혹은 장익(張木益))의 장자(長子)로 무계(誣系)하였다가 근래에 와서는 장태사의 차손(次孫) 장기(張記)(錦用)와 동일인(同一人)으로 날조(捏造)한 무계(誣系)를 일체(一切)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始祖)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 장금용(張金用)과 2세조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장선(張善) 부자(父子)는 고려건국 초기에 부월(鈇銊)과 현직(顯職)을 맡아 종묘(宗廟)사직(社稷)을 보익(補益)하였으며 어지러운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였고 4세조 장국신(張國伸)은 성종 원년(서기 982년)에서 문종 15년(서기 1061년) 간에 국정최고기관인 내사성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내사령(內史令)을 역임하였다.

그 후 대대로 고관(高官) 현직(顯職)이 화출(華出)되고 중낭장(中郎將) 청계(淸溪) 장득선(張得善)은 충렬왕조에 몽고군의 참략을 방위하다 순절하였고, 덕령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는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 한 분이고 김해부사(金海府使) 장중양(張仲陽), 한림학사(翰林學士) 장중일(張仲日) 3부자(父子)와 밀직부사(密直副使) 장재양(張載陽), 판사재감(判司宰監) 장안국(張安國) 등은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관직을 제수하여 징소(徵召)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자정(自정(靖)하였고 인동장씨가 고려의 구신가문(舊臣家門)으로 조선조(朝鮮朝) 초기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세종조에 이르러 장수(張脩)가 친명(親命)으로 비로서 일(逸)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출사하여 지평(持平)과 집의(執義)로 재임하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우뚝 서서 규정(糾正)하였다. 중종조에 장수문(張秀文)이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것을 필두로 조선조에 37인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명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선조조(宣祖朝)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 판관(判官) 장홍한(張鴻翰) 형제와 장사진(張士珍)과 장사규(張士珪) 형제, 심곡(深谷) 장제원(張悌元) 장원기(張元紀) 장원국(張元國) 형제,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장응두(張應斗), 부사(府使) 장희적(張希籍) 봉사(奉事) 장희한(張希翰) 장보한(張輔翰), 장우한(張宇翰), 선전관(宣傳官) 장인기(張仁紀), 장섬(張暹), 장덕수(張德守)와 장덕춘(張德春) 형제 등은 의병장(義兵將) 혹은 관군(官軍)으로 참전(參戰)하여 순국(殉國)하였다.

광해조에서는 폭정(暴政)에 항거하여 송계(松溪) 장우환(張遇漢)은 한성에서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의 소두(疏頭)로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는 인동에서 영남(嶺南) 유림(儒林)의 소두(疏頭)로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 일당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과 옥산군(玉山君) 장돈(張暾)은 인조반정에 참가하고, 이괄(李适)의 난(亂)이 발생하여 장만(張晩)은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옥산군(玉山君) 장돈(張暾), 장귀상(張貴尙), 장귀한(張歸漢), 장경립(張景立) 등(等)은 참전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장만은 도원수로 관군을 총지휘했으나 패전(敗戰)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국치(國恥)를 당했다. 여현(旅顯) 장현광(張顯光)은 경상도 호소사(號召使)로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고, 옥산군수(玉山郡守) 장돈(張暾)은 관군(官軍)을 지휘하다 개천(价川)에서 순국(殉國)하였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와 삼우당(三憂堂) 장해(張해) 부자(父子)는 인동 의병장(義兵將)으로, 수훈제(守訓齊) 장내정(張乃貞),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 죽와(竹窩) 장시익(張時益) 경헌(警軒) 장남기(張南驥) 장의철(張義喆) 장명(張溟) 등이 의병(義兵) 혹은 관군(官軍)으로 참전(參戰)하였다. 영조조(英祖朝)에 무신란(戊申亂) 때는 복제(復齊) 장걸(張杰), 수풍정(樹風亭) 장담(張潭), 장오(張澳) 형제, 증(贈) 참판(參判) 장광표(張光表) 장수한(張壽漢), 장석창(張錫昌), 장한기(張翰耆) 장광하(張光夏) 등이 창의(倡義)하였다.

조선조에 고위(高位)관직(官職) 자로는 충정공(忠定公) 장만(張晩)은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은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무용공(武庸公) 장붕익(張鵬翼)은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서반(西班)의 총융사(摠戎使),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는 총융사(摠戎使), 장태소(張泰紹)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장지항(張志恒)은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서반(西班)의 총융사(摠戎使), 장현택(張鉉宅)은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서반직(西班職)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장지풍(張志豊)은 포도대장(捕盜大將), 문헌공(文憲公) 장석룡(張錫龍)은 형조판서(刑曹判書)와 특진관(特進官), 문목공(文穆公) 장응일(張應一)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간(大司諫), 장기한(張起漢)은 병조(兵曹)와 이조참판(吏曹參判) 장인원(張仁遠)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장시표(張時杓)는 형조참판(刑曹參判), 장태수(張泰秀)는 형조참판(刑曹參判)과 부원경(副遠卿), 장승원(張承遠)은 경상도(慶尙道)관찰사(觀察使), 장헌상(張憲相)은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인동장문의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學文)에 전렴한 분이 많으며 진사(進士) 죽창(竹窓) 장신손(張信孫), 진사(進士) 죽정(竹亭) 장잠(張潛), 진사(進士) 학거(鶴渠) 장순(張峋), 진사(進士) 장진문(張振文)은 유학자(儒學者)이고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20여 차례 관직(官職)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오직 학문(學文)에 전심(專心)하여 성리학(性理學)의 태두(泰斗)로 우리나라 유학(幼學)의 종사(宗師)로 숭앙(崇仰)받아 오며, 와천(臥川) 장천한(張天翰)과 기촌(岐村) 장용한(張龍翰)의 6형제,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 심곡(深谷) 장제원(張悌元),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검곡(儉谷) 장내도(張乃度), 청천당(聽天堂) 장응일(張應一)과 그 형제. 안(安)제(齊) 장류(張瑠), 만(晩)회(悔)당(堂) 장(張)경(慶)우(遇), 소매당(訴梅堂) 장구(張銶), 남파(南坡) 장학(張澩), 태허당(太虛堂) 장호(張昊), 낙주(洛州) 장선흥(張善興), 육의당(六宜堂) 장대임(張大臨), 만인당(晩忍堂) 장지학(張趾學), 만제(晩齊) 장진홍(張晉洪), 산은(散隱) 장시현(張始顯), 지제(知齊) 장보현(張普顯), 동암(東庵) 장대방(張大方), 외암(畏庵) 장운한(張韻翰) 이계(耳溪) 장사경(張思敬), 강해(江海) 장심학(張深學), 죽와(竹窩) 장두현(張斗鉉), 가곡(家谷) 장경목(張敬穆)과 한말(韓末) 사미헌(四未軒) 장복극(張福極)은 외삼증사(巍三徵士)의 한 분이며 그 문인(門人)은 회당(悔堂) 장석영(張錫英), 담옥(澹屋) 장부원(張付遠),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창주(滄洲) 장시택(張時澤), 용여(用旅) 장심택(張心澤), 지제(知齊) 장영각(張永恪), 화강(華岡) 장상학(張相學), 견산(見山) 장명상(張命相) 등이 있었다.

실기(實記)와 유고(遺稿)를 남긴 학자(學者)는 141인(人)에 이르고 인동장씨가 시호(諡號)를 받은 분은 8인(人)이고 봉군(封君)된 분도 8인(人)이다.

일본(日本) 강점기(强占期)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위암(偉菴) 장지연(張志淵)과 비서원(秘書院) 부경(副卿) 장태수(張泰秀), 창여(滄旅) 장진홍(張鎭弘), 자하(紫下) 장기석(張基碩), 장세번(張世磻), 회산(回山) 장준호(張俊灝), 회당(悔堂) 장석영(張錫英), 장재성(張在星), 장용희(張龍熙), 장영조(張永駣), 소해(宵海) 장건상(張建相), 황제(黃齊) 장길상(張吉相),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등 많은 종친(宗親)들이 항일(抗日)조국(祖國)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여 모진 고문(拷問)과 옥고(獄苦)를 치르고 순국(殉國)한 분도 있고, 독립(獨立) 군자금(軍資金)을 제공(提供)한 분도 있다.

8.15 광복(光復) 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에서 운석(雲石) 장면(張勉)은 부통령(副統領)과 제2공화국 행정부(行政府) 수반(首班)인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은 초대(初代)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과 국무총리(國務總理)와 국회(國會)부의장(副議長), 장기영(張基榮)은 부총리(副總理) 겸 경제기획원장관(經濟企劃院長官), 국회의원(國會議員)과 국무위원(國務委員)을 역임(歷任)한 분이 27인 정무위원(政務委員)과 청장(廳長) 및 광역(廣域)시장(市長) 및 도지사(道知事)를 역임한 분 6인(人)이 배출(輩出)되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인동장씨는 전국에 666,6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인동장씨조상인물

장금용(張金用) : 인동장씨 시조(始祖)로 고려 개국(開國) 초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虎衛)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유허지(遺墟址)인 인동(仁洞)에 옥산사(玉山祀)를 세워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향사(享祀)를 봉향(奉享)하고 경내(境內)에는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장선(張 善) : 시조 장금용의 자(子)로 금오위(金吾衛)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장진(張 震) : 상장군 장선의 아들로 교위(校尉)를 역임했다.

장국신(張國伸) : 교위(校尉) 장진(張震)의 아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내사령(內史令)을 역임했다.

장신원(張信元) : 내사령 장국신(張國伸)의 아들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관직(官職)을 전(傳)하여지지 않는다.

장세림(張世林) : 장신원의 아들로 조의랑 직장을 역임하였다.

장효우(張孝友) : 봉어(奉御) 장세림(張世林)의 아들로 선의랑(宣議郞) 위위시(衛尉寺) 주부(主簿)동정(동(同正)을 역임했다.

장위(張 偉) : 선의랑 장효우의 아들로 군기감(軍器監)의 감(監)을 역임했다.

장인숙(張仁淑) : 군기감(軍器監) 장위의 아들로 정의대부 판통례문사를 역임했다.

장순(張 純) : 판통례문사 장위의 아들로 봉익대부 밀직사 부사를 역임했다.

장균(張 均) : 밀직부사 장순의 아들로 문과에 등과(登科) 관적은 부전(不傳)

장안세(張安世) : 장균의 아들로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지함주사(知咸州事)를 거쳐 덕령부(德寧府: 충렬왕비의부(忠烈王妃府))의 윤(尹)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잠저(潛邸)의 구의(舊誼)로 여러번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로 불사하고 은거(隱居)수지(遂志)하여 두문(杜門) 72현의 1인이다. 두문동 순절실(殉節室) 금구의 서강사(西岡祀) 인동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지함주사 시(時) 함주에 만세교를 건설하여 치수의 공을 이룩하여 우(禹)임금의 지수에 비유하였으며 낙민루 현판 및 거사비가 있고 인동옥계서원 경내에 유허비가 있으며 실기 1궝이 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장중양(張仲陽) : 충정공 장안세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김해부사를 역임했다. 조선조에 한성윤(漢城尹)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하고 절의를 지켰으며 임종시 묘갈에 전조의 벼슬을 기록하였다.

장표(張 彪) : 장세규의 후(後)로 흥위위(興威衛) 보승낭장(保勝郞將)을 역임했다.

장안식(張安栻) : 장게(張게)의 아들로 어사대(御史臺)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했다.

장견(張 堅) : 장득선의 아들로 합문(閤門)의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역임했다.

장원석(張元錫) : 장견의 아들로 전의시(典醫寺) 판사(判事)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좌복사(左僕射)를 역임했다. 태조 이성계가 잠저(潛邸)의 옛정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불사(不仕)하였다.

장수(張 脩) : 장중양의 아들로 조선조에 처음 벼슬을 하였다. 세종 9년(거기 1427년) 6월에 은일(隱逸)로 사헝부(府) 지평(持平) 집의(執義) 호조정랑 장령을 역임했고 그 후 남양(南陽)도호부사(都護府使), 선공감(繕工監) 판사(判事)를 역임했다. 조정에 불합하여 옥산에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불의와 타협과 굴하지 않고 직언을 하는 강직한 선비이다.

장보(張 俌) : 장령 장수의 아들로 풍저창(豊儲倉) 승(丞)을 역임했다. 세조조에 좌익원종공신 3등에 훈록(勳祿)되었다.

장우(張 亻吳) : 장령 장수의 차자로 중작대부 사천현감 겸 병마절제사를 역임했다. 남산파의 파조이며 사천(泗川)에 사적비(事蹟碑)가 있다.

장맹저(張孟儲) : 충정공(忠貞公) 장안세(張安世)의 현손(玄孫)이다. 풍저창승(豊儲倉丞) 장보의 자이다.

장맹창(張孟倡) : 장보(張俌)의 아들로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순(張 山旬) : 자(字)는 경앙(景仰)이고 호(號)는 학거(鶴渠)이며 장항(張沆)의 아들이다. 명종 16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여헌 정현광에 수학했다.

장영(張 山榮) : 자(字)는 경인(景仁)이고 호(號)는 송와(松窩)이며 진사(進士) 장신손(張信孫)의 손자(孫子)이다. 송정 최응룡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여헌 장현광과 두곡 고응섭이 공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을 심(深)가(加) 추중(推重)하였다.

장급(張 岌) : 자(字)는 경안(景安)이고 호(號)는 기산(岐山)이다. 진사 장신손(張信孫)의 손자로 일찍부터 오직 학업에만 전염하여 여헌 장현광이 만제(輓祭)에 추중(推重)하였으며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저명하였으며 인동 봉림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장현광(張顯光) : 자(字)는 덕회(德晦)이고 호(號)는여(旅)헌(軒)이며. 증(贈) 이조(吏曹)판서(判書) 장열(張烈)의 아들이다. 도일원론(道一元論)을 창시한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선조 28년 서기1595년 학덕(學德)으로 천거(薦擧)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시토했다. 그 후 형조좌랑 순천군수 합천군수 선공감 첨정(僉正)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공조참의 이조참판 대사헌 우참찬 지중추부사 등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동안 1년 미만 사환(仕宦)에 있었으며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2년 이괄의 난 후에 부름을 받아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하였고 19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경상(慶尙)우도(右道) 호소사(號召使)로 각 주군현(州郡縣)에 격문(檄文)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으며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立巖:영일군 입암면 중장리, 당시는 역천군에 속함)에 들어가 은둔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정수(精修)하다가 그해 9월 7일 향수(享壽) 84세로 졸(卒)하였다. 그가 주장한 이론은 덕(德)은 도의 지선한 것이라 정의하고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理)와 기(氣)는 서로 체용(體用)될 뿐이므로 경(經)과 위(緯)로 나누어 해석(解釋)해야한다는 것과 의학(醫學)에도 조예(造詣)가 깊었다. 효종8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인동의 동락(東洛)서원(書院)과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에 주향(主享)되고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과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영일의 입암서원(立巖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義城)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로 여헌문집(旅軒文集)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역괘총설 급구설(易卦總說及究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도서발휘(圖書發揮) 등 다수(多數)가 있다.

장현도(張顯道) : 자(字)는 덕우(德優)이고 호(號)는 월포(月浦)이며 증(贈) 승지(承旨) 장희(張)熙)의 아들이다. 한강(寒岡) 정술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양문(兩門)에 수학(修學)하여 학행으로 추중(推重)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인동 신월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장제원(張悌元) : 자(字)는 중순(仲順)이고 호(號)는 심곡(深谷)이며 장학거(張鶴渠)의 아들로 한강(寒岡) 정술과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다.

장내범(張乃範) : 자(字)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극명당(克明堂)이며 판결사 장사영(張士瑛)의 아들로 한강 정술과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예학에 밝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 인동 정제장(整齊將)으로 창의(倡義)하였고 만년(晩年)에는 반계(磻溪)에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반계거사(磻溪居士)라 하였다. 평생(平生)동안 사엽(四葉)금단(金丹)을 복용을 복용(復用)하면서 분노(忿怒)를 누르고, 기호(嗜好)와 욕심(慾心)을 끊으며 말을 적게하고 심기를 편안하게 함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양생금단계(養生金丹契)를 저술(著述)하였다. 공조참판에 증직(贈職)되고 옥계사(玉溪祀)와 기산(岐山)의 숙암서원에 배향되고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에 신도비가 있고 가정예절과 문집이있다.

장해(張 해) : 자(字)는 거원(巨源)이고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만회당(晩悔堂)이며 장경우(將慶遇)의 아들이다. 부자(父子)가 병자호란 시 의병장(義兵將)으로 창의하여 상주 북천까지 출병하였으나 이미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한 후에 귀환(歸還)했다. 1642년 사마에 입격하고 누차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당세에 학문과 행이로 추중(推重)하였다.

장학(張 澩) : 자(字)는 성원(聖源)이고 호(號)는 남파(南坡), 만회당(晩悔堂)이며 장경우(張慶遇)의 차자(次子)이다. 여헌(旅軒) 장현관(張顯光)의 문인(門人)이다. 인조 20년 서기 1642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여 효종 3년 서기 1652년 창릉(昌陵: 예종능(睿宗陵) 00에 제수되었으나 불사(不仕)했다. 문장(文章)에 능하여 선사(先師) 유집(遺集)을 교정(校正)했다. 저서(著書)로 육약설(六若說) 경의잠(慶義箴), 목동문집(木童文集) 옥산지(玉山志) 서문(序文) 등(等)이 있다.

장응일(張應一) : 자(字)는 경숙(經叔)이고 호(號)는 청천당(聽天堂)이며 장현도(張顯道)의 차자(次子)로 종숙(從叔) 장현광(張顯光)의 계자(系子)이다. 인조 7년 서기 1629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필선(弼善)을 역임한 후 1646년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으로서 이미 사사(賜死)의 명(命)이 내린 민회빈(愍懷嬪) 강씨 (姜氏)의 구명(救命) 상소(上疏)를 9일 동안 계속했다. 품성은 청렴(淸廉) 강직(剛直)하였으며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장영(張 金永) : 자(字)는 명세(鳴世)이고 호(號)는 소매당(訴梅堂)이며 부제학(副提學) 장응일(張應一)의 장자(長子)이다. 현종(顯宗) 3년 서기 1662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여 세자(世子) 익위사(翊衛司) 위솔(衛率)을 역임하였으며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문집(文集)이 있다.

장건(張 鍵) : 자(字)는 천개(天開)이고 호(號)는 옥란헌(玉蘭軒)이며 부제학 장을일의 차자이다. 선교랑(宣敎郞)으로 효종 3년 서기 1652년 증광(增廣)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장령(掌令), 전라(全羅) 도사(都事)를 거쳐 진주(晉州)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장옥(張 鈺) : 자(字)는 이상(而相)이고 부제학 장응일의 3자이다. 인조조에 산음(山陰: 현재 경남 산청군)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전한(張天翰) : 자(字)는 원거(元擧)이고 호(號)는 와천(臥川)이며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손자(孫子)이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고 문장(文章)이 숙성(夙成)하여 사림(士林)에서 와천선생이라 불렀다. 여헌 장현광에게 준 자작시인 산군행시(山君行詩)와 옥자시(屋子詩)가 옥산지(玉山志)에 실려있다.

장광한(張光翰) : 자(字)는 사거(斯擧)이고 호(號)는 자성정(自醒亭)이다.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손자(孫子)이다. 여헌 장형광의 문인(門人)으로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추존(追尊)받았다. 오산서원장이 되어 임진왜란 시 소진(燒盡)된 서원을 중건하였다. 여헌 장현광이 지은 자성전기(自醒亭記)가 있다.

장경한(張景翰) : 자(字)는 중거(仲擧)이고 호(號)신암(愼巖)이며 증(贈)호조(戶曹)참의(參議) 곤(崑)의 아들이다. 조봉대부 군기감(軍器監) 주부(主簿)를 역임하고 효성(孝誠)지극하고 학자(學者)로도 명성(名聲)이 높았다.

장용한(張龍翰) : 자(字)는 견학(見學)이고 호(號)는 기촌(岐村), 죽정(竹亭)이며 참의(參議) 장곤(張崑)의 아들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으로 문장(文章)이 숙성(夙成)하였다. 학문에 전심수학하여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원리(原理)를 통달(通達)하였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부모(父母)의 상(喪)에 3년 동안 지성으로 시묘(侍墓)하니 그곳을 시묘동이라 하였다. 기산(岐山)의 봉양서원(鳳陽書院)가 비안(比安) 구천서원(龜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저서(著書)로 대학연의집주(大學衍義集註), 주역36도설(周易36圖說), 성리론(性理論), 경전주해(經傳註解)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창건문(創建文) 등(等)이 있다.

장내절(張乃節) : 자(字)는 절보(節甫)이고 장광한(張光翰)의 아들이다. 신창(新昌)현감(縣監)을 거쳐 인조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운양도감(運糧都監)을 역임했다.

장내도(張乃度) : 자(字)는 입보(立甫)이고 호(號)는 검곡(儉谷)이며 판결사(判決事) 장사영(張士暎)의 아들이다. 장현광의 문인으로 예서(隸書)와 산술(算術)에 능(能)하였으며 역학(易學)에도 밝아 장현광이 역학도설을 저술할 때 산수(算數)관계는 서로 논의(論議)하여 정(定)하였다 한다.

장내량(張乃亮) : 자(字)는 명보(明甫)이고 호(號)는 송제(松齊), 장용한(張龍翰)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군자감(軍資監) 정(正)에 주증되었다.

장내정(張乃貞) : 자(字)는 정보(貞甫)고 호(號)는 수훈제(守訓齊), 죽정(竹亭)이며 장경한(張景翰)의 아들이다. 충청도(忠淸道) 단양(丹陽)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내창(張乃昌) : 자(字)는 성보(聖甫)이고 무민당(无憫堂) 장덕원(張德元)의 아들이며 장현광의 문인이다. 덕행(德行)에 경근불태(敬謹不怠)하여 조정에서 문기행의(聞其行誼)하고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주부(主簿)를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不仕)했다.

장경달(張慶達) : 자(字)는 태정(泰亭)이고 호(號)는 만취(晩醉), 송제(松齊)이며 장내량(張乃亮)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장경식(張景栻) : 자(字)는 경수(敬叟)이고 호(號)는 조문옹(朝聞翁)이다. 장동후(張東垕)의 아들이다. 경서(經書)와 예서(隸書)를 정수(精修)하여 필력(筆力)이 있고 의기(義氣)가 강하고 문장이 뛰어 났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경유(張慶遒) : 자(字)는 태언(泰彦)이고 호(號)는 만계(晩溪)이며 장내범(張乃範)의 아들이다. 장현광의 문인으로 배상룡(裵尙龍), 김경장(金慶長) 등과 같이 선사(先師)의 문집(文集)을 발간(發刊)하였으며 통정대부에 추증(追贈)되었다.

장경취(張慶冣) : 자(字)는 대숙(大叔)이고 호(號)는 남취헌(攬翠軒), 죽정(竹亭) 후이며 장악원(掌樂院) 정(正) 장내적(張乃迪)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저명(著名)하였으며 극명당(克明堂) 장경주(張慶遒)의 제문(祭文)과 신유(申유) 장군(將軍)의 만시(輓詩) 등이 있다.

장경홍(張慶弘) : 자(字)는 자관(子寬)이고 호(號)는 수일당(守一堂), 죽정(竹亭) 후이며 장내절(張乃節)의 아들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종유(從遊)하였으며 문행(行)으로 세인(世人)의 추존(追尊)을 받았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금전동(金田洞)에 영모제(永慕齊)가 있다.

장광정(張光鼎) : 자(字)는 상덕(尙德)이고 호(號)는 각금헌(覺今軒)이고 영장(營將) 장우원(張宇遠)의 증손(曾孫)이다.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장내겸(張乃謙) : 자(字)는 익보(翼甫)이고 호(號)는 지와(止窩)이고 심곡(深谷) 장제원(張悌元)의 아들이다. 장현광의 문인(門人)으로 성품(性稟)이 온화(溫和)하고 문행(文行)이 있엇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장철견(張哲堅) : 동부렬(東部令) 장지(張智)의 아들이다.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 병절교위(秉節校尉) 부사맹(副司猛)을 역임했다.

장진문(張振文) : 장철견(張哲堅)의 장자(長子)이다. 연산(燕山) 7년 서기 1501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부인(婦人) 김씨(金氏)는 정렬(貞烈)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장효문(張孝文) : 장철견(張哲堅)의 아들이다. 부(副)사직(司直)과 효능(孝陵) 시능관(侍陵官)을 역임했다.

장계문(張季文) : 자(資)는 비연(斐然)이고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증손이다. 연산 10년 서기 1504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중종 14년 식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통례원(通禮院) 통례(通禮), 부평 부사 강능부사를 역임하였다.

장봉정(張鳳禎) : 자(字)는 응화(應和)이고 장계문(張季文)의 아들이다. 선무랑(宣務郞) 상서원(祥瑞院) 부직장(副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선고(先考) 환우(患憂)에 아우 장기정과 더불어 좌우(左右) 단지(斷指) 주혈(注血)하고 시묘(侍墓) 3년하여 효성으로 삼강행실록에 등제되었다.

장기정(張麒禎) : 자(字)는 성유(聖游)이고 장계문(張季文)의 차자(次子)이다. 명종(明宗) 16년 서기 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부정(張富禎) :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의 3자(子)이다. 처음 이름은 귀정(歸楨)이었다. 전특서(典特署) 직장(直長)을 역임했다.

장호(張 昊) : 호(號)는 태허(太虛)이고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현손(玄孫)이다. 별검(別檢)을 역임하였다.

장만(張 晩) : 자(字)는 호고(好古)이고 호(號)는 낙서(洛西)이며 인조조의 공신이다. 군수(郡守) 장기정(張麒楨)의 3자(子)이다. 선조22년 서기 1589년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입격(入格)하고 선조24년 서기 1591년 별시(別試)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 승문원에 등관(登官)하여 예문관(禮文館) 검열(檢閱) 시교(侍敎) 기사관(記事官),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형조 예조 좌랑,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세자(世子)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봉산(鳳山)군수(郡守)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 충청도 관찰사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知), 공조(工曹)참판(參判) 의금부(義禁府) 동지사(同知事), 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 광해군 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호조(戶曹) 참판(參判),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체찰부사(體察副使), 형조(刑曹) 및 병조(兵曹)판서를 역임하고 인조반정 후 특진관(特進官) 우참찬(右參贊),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 8도(道) 도원수(都元帥)에 제수(除授)되어 원수부(元首府) 평양에 두고 관서지방을 진정하였다.인조 2년 서기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을 진압하여 진무(振武)1등(等)공신(功臣)에 책록(策祿)되고 도원수겸 개성유수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8년 서기 1630년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충정사(忠定祀)에 배향(配享)되고 부조묘(不逃廟)가 있으며 낙서집(洛西集) 4권(卷)이 있다.

장돈(張 暾) : 자(字)는 여명(汝明)이고 장부정(張富楨)의 4자(子)이고 장만(張晩)의 종제(從弟)이다. 인조 원년 4월 증산(甑山) 현령(縣令)에 재임 중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策祿)되고 옥산군(玉山君) 에 피봉(皮封)되었다. 인조 2년 서기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부조묘(不逃廟) 사우(祠宇)에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장귀상(張貴尙) : 자(字)는 상보(尙甫)이고 호(號)는 무송(撫松)이며 장내영(張乃永)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이괄(李适)의 난(亂)에 공(功)을 세웠고 묘갈(墓碣)이 있다.

장기한(張起漢) : 자(字)는 신숙(伸叔)이고 호(號)는 심제(深齊) 남호산인(南瑚山人)이며 증(贈)호조(戶曹)참판(參判) 장호(張昊)의 아들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이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역임했다.

장필한(張弼漢) : 군수(郡守) 장(張)돈(暾)의 자(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하고 습작(襲爵)으로 옥평군(玉平郡)에 피봉(皮封)되었다.

장붕한(張鵬漢) : 자(字)는 운거(雲擧)이고 호(號)는 우우제(憂憂齊)이며 증(贈)이조판서 장하현(張夏鉉)의 아들이다. 영조조(英祖朝)의 무신(武臣)으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창원(昌原) 대도호부(大都護府) 부사(府使)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응 역임하고 경종(景宗) 3년 신사사화(辛巳士禍)에 피화(被禍)되어 함경도(咸鏡道)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원년 왕의 특명으로 사면(赦免)되어 군기시(軍器寺) 제조(提調) 어영대장(御營大將) 훈련대장(訓練大將) 형조(刑曹)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영조4년 이인좌의 난에 총관(摠管)이 되어 왕을 호위하였다. 포도대장(捕盜大將) 한성(漢城)좌윤(左尹) 진영(鎭營)대장(大將)으로 북한산성을 수호(守護)하고 총융사(摠戎使)로 수원에서 반란군(叛亂軍) 괴수(魁首) 이배(李培)를 잡아 난을 평정하고 한성(漢城)판윤(判尹)을 역임하고 영조 8년에 훈련대장(訓練大將)에 다시 제수(除授)되고 영조 11년 형조판서 재임 시 전선 개조도(改造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시호(諡號)는 무숙(武肅)이고 경남(慶南) 창원(昌原)에 선정비(善政碑)가 있고 부도묘(不逃廟)가 있다.

장상원(張象元) : 공조(工曹)참의(參議) 장중(張仲)의 아들이다. 영조(英祖)조(朝)의 원훈(元勳)으로 봉사(奉祀)승전(承傳)참봉(參奉)에 특지(特旨)되고 현풍(玄風), 회양(淮陽), 영산(靈山)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정조조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특승(特陞)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의(參議)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에 증직(贈職)되고 옥은군(玉恩君)에 피봉(皮封)되었다.

장차주(張次周) : 자(字)는 문재(文哉)이고 장계문(張季文)의 아들이다. 인조 8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인조22년 서기 1644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황해도(黃海道) 도사(都事) 해운(海運)판관(判官) 효종(孝宗) 즉위(卽位) 년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지내고 어사(御使)가 되어 영남(嶺南)으로 암행(暗行)하여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장태소(張泰紹) :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후손(後孫)으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낙안군수(樂安郡守)를 거쳐 여산(礪山) 수원(水原) 평산(平山) 회령(會寧) 등(等)의 부사(府使)를 역임한 후 전라(全羅)좌도(左道)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전라(全羅), 평안(平安)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양주(楊州) 목사(牧使)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을 역임하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했다.

장지항(張志恒) : 자(字)는 월여(月汝)이고 통제사 장태소(張泰紹)의 아들이며 영조(英祖)조의 무신(武臣)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영조(英祖) 35년 서기 1749년에 전라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정도사 광주부윤 함경도병마절도사 용호위(龍虎衛) 대장(大將) 어영대장(御營大將) 한성(漢城) 좌윤(左尹) 총융사(摠戎使)를 역임했다. 정조(正祖) 원년(元年)에 어영대장(御營大將) 훈련대장(訓練大將)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왕능(王陵) 호종(扈從) 불참(不參)으로 영암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사면(赦免) 복권(復權)된 후(後) 3도(道)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다.영암 유배(流配) 시(時) 역모(逆謀)했다는 간신(奸臣)들의 무고(誣告)로 국문(鞠問) 장살(杖殺)되었다. 그 후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장지풍(張志豊) : 자(字)는 명여(明如)d고 태상경(太常卿) 장(張)백(伯)의 후손(後孫)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훈련원(訓練院) 정(正)을 거쳐 삭주(朔州) 목사(牧使), 경기(京畿) 충청도(忠淸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 파주(坡州) 목사(牧使) 금위영(禁衛營) 별장(別將),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역임하였다.

장중(張 仲) : 호조(戶曹)참의(參議) 장학명(張學明)의 아들이다. 원훈(元勳)으로 봉사(奉祀)승(承)전(傳)충의유서(忠義諭書)특은(特恩)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工曹)참판(參判)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에 증직(贈職)되고 옥은군(玉恩君)에 피봉(皮封)되었다.

장현택(張鉉宅) : 태상경(太常卿) 장(張)백(伯)의 후손(後孫)으로 정조 2년 서기 1778년 내시(內試) 사과(射科)에 입격(入格)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장희재(張希載) : 장석손(張碩孫)의 후손(後孫)으로 숙종조(肅宗朝)의 무신(武臣)이며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라비다. 금위영(禁衛營) 별장(別將), 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고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의 정쟁(政爭)에 휘말려 제주도(濟州道)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불려와 참수(斬首)담했다.

장강(張 康) : 자(字)는 형원(亨源)이고 호(號)는 만회당(晩悔堂)이며 장경우(張慶遇)의 아들이다. 인조조(仁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제주(濟州)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장격(張 格) : 자(字)는 문숙(文叔)이고 증(贈)호조(戶曹)참판(參判) 장세기(張世紀)의 아들이다. 효종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언양(彦陽) 현감(縣監)과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

장세기(張世紀) : 자(字)는 자진(子陳)이고 장내겸(張乃謙)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추부(中樞府) 첨지(僉知事)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세익(張世益) : 자(字)는 익재(益哉)이고 호(號)는 일제(逸齊)이며 장홍의(張鴻儀)의 아들이다. 숙종(肅宗) 2년 서기 167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숙종 38년 서기 1712년 4월 청국(淸國)의 북경(北京)총관(摠管)과 삼강(三江: 알록강 토문강 오룡강)의 국경선(國境線)을 설정(設定)할 때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파견(派遣)되어 강(江)의 발원 지점(發源地點)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경종(景宗) 2년 충주(忠州)영장(營將)으로 재임(在任) 시(時)에 졸(卒)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으며 판서(判書) 장석용(張錫龍)이 쓴 비문(碑文)의 묘갈(墓碣)이 있다.

장수용(張受容) : 자(字)는 중용(仲庸)이고 호(號)는 송설(松卨)이며 장흥옥(張興玉)의 아들이다. 식년(式年)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장계환(張啓煥) : 자(字)는 공직(公直)이고 길주(吉州) 방어사(防禦使) 장두형(張斗衡)의 아들이다. 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折衷)장군(將軍) 삼척(三陟)부사(府使) 겸 영장(營將)을 역임하였으며 선정(善政)을 배풀어 삼척(三陟)군민(群民)이 세운 영세(永世)불망비(不忘碑)가 있다.

장계섭(張繼燮) : 자(字)는 이창(爾昌)이고 장동원(張東源)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장원(壯元)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장교섭(張敎燮) : 자(字)는 익서(益瑞)이고 호(號)는 만청(晩晴)이며 장용표(張龍杓)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년 서기 1865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장교원(張敎源) : 자(字)는 경원(景遠)이고 갑산부사 장세익(張世益)의 7세손(世孫)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평해(平海) 현령(縣令),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역임하였다.

장교원(張敎遠) : 자(字)는 순집(舜執)이고 호(號)는 해산(海山)이며 전주(全州)판관(判官) 장석봉(張錫鳳)의 아들이다. 고종 17년 서기 1880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영월(寧越)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병국(張炳國) : 군수(郡守) 장교원(張敎遠)의 손자(孫子)로 영양(英陽)군수를 역임했다.

장교준(張敎駿) : 자(字)는 자삼(子三)이고 운봉(雲峰) 현감(縣監) 장운학(張雲鶴)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역임했다.

장덕현(張德顯) : 군수 장교준(張敎駿)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장교한(張敎漢) : 자(字)는 여량(汝良)이고 통덕랑(通德郞) 장두근(張斗根)의 자(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장교헌(張敎憲) : 자(字)는 문징(文徵)이고 통덕랑(通德郞) 장인근(張仁根)의 자(子)이다. 고종(高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용양위(龍驤衛) 좌부장(左部將)을 역임했다.

장기원(張箕遠) : 장진학(張振鶴)의 손자(孫子)이고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장기원(張紀遠) : 자(字)는 치강(致綱)이고 호(號)는 지운(芝雲)이며 장학로(張學魯)의 아들이다. 승훈랑(承訓郞)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를 역임했다.

장대주(張大周) : 자(字)는 덕명(德明)이고 진주(晉州) 우후(虞侯) 장진만(張鎭萬)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라도 진도군수를 역임했다.

장덕오(張德五) : 초명(初名)은 용우(龍羽)이고 자(字)는 계현(季玄)이고 군수(郡守) 장유문(張有聞)의 아들이다. 철종 13년 서기 1862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기장현감, 제주도(濟州道) 대정(大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으며 기장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장덕희(張德希) : 자(字)는 희천(希天)이고 길주(吉州) 방어사(防禦使) 장두형(張斗衡)의 아버지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했다.

장동발(張東潑) : 자(字)는 활지(活之)이고 장광운(張光運)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승(秘書丞) 감(監)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동옥(張東玉) : 자(字)는 충백(忠伯)이고 장한공(張漢功)의 아들로 장한지(張漢智)에게 출계(出系)했다. 정조조(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함경도(咸鏡道) 훈융진(訓戎鎭) 첨사(僉使)를 역임했다.

장동원(張東源) : 자(字)는 화심(華深)이고 호(號)는 신천(信天)이며 장광표(張光表)의 아들이다. 정조조(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주(慶州)영장(營將)을 역임하였고 수직(壽職)으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장동칠(張東七) : 자(字)는 여수(汝綏)이고 장광재(張光載)의 아들로 장광덕(張光德)에게 출계(出系)했다. 정조조(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낙안(洛安)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두빈(張斗斌) : 자(字)는 유신(惟信)이고 호(號)는 낙설(樂卨)이다. 통덕랑(通德郞) 장언국(張彦國)의 아들로 숙부(叔父) 장언극(張彦極)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순조조(純祖)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황해 전라도 순영(巡營) 중군(中軍) 장기(長鬐), 고창(高敞)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함경도(咸鏡道) 훈융진(訓戎鎭)첨절제사를 역임했다. 장기현감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있으며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장두참(張斗參) : 자(字)는치회(稚晦)이고 군수(郡守) 장덕오(張德五)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10년 서기 1873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공조(工曹) 좌랑(佐郞)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하동(河東)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경남(慶南) 하동(河東)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장두표(張斗表) : 자(字)는 의칠(儀七)이고 장용응(張龍應)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00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두형(張斗衡) : 자(字)는 치도(稚道)이고 호(號)는 석금헌(石琴軒)이고 절제사(節制使) 장덕희(張德希)의 아들이다. 순조조(純)祖朝)에 무과(武科)에 장원(壯元) 급제(及第)하여 첨사(僉使) 길주목사 겸 방어(防禦)사(使) 경상(慶尙)좌도(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하고, 길주 목사 재임 시 선정(善政)을 배풀어 주민(住民)이 세운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주(慶州)영장(營將)을 역임하였다.

장만기(張萬紀) : 자(字)는 인징(仁徵)이고 호(號)는 남강(南崗)이며 소(訴)회(誨)당(堂) 장영(張영)의 아들이다. 현종 7년 서기 1666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 호조 좌랑, 정랑을 거쳐 청도(淸道), 괴산(槐山)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吏曹)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만섭(張萬燮) : 자(字)는 윤경(倫卿)이고 호(號)는 해제(海齊)이며 영장(營將),장동원(張東源)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장원(壯元)급제(及第)하여 통례원(通禮院) 인의(仁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공조좌랑 제주판관 겸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서(陞敍)되었다.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에 제수되었다.

장만익(張萬益) : 자(字)는 숙겸(叔謙)이고 소회당(訴誨堂) 장영의 아들이다. 숙종 2년 서기 167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장흥 현감을 역임했다.

장병익(張炳翊) : 자(字)는 가(可)선(善)이고 호(號)는 청운(聽雲)이며 장규상(張奎相)의 아들이다.고종(高宗) 22년 서기 1885년 식년(式年)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등과(登科)하여 승사랑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고종 30년 서기 1893년 시정(市政)의 폐단(弊端)을 진언(眞言)했다가 평안도 연변에 정배(定配)된 후 학문(學文)에만 전념했다.

장복원(張福遠) : 자(字)는 원겸(元兼)이고 현감(縣監) 장석우(張錫愚)의 아들이다. 철종 12년 서기 1861년 장능(莊陵:단종(端宗)능(陵) 참봉(參奉)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읍(井邑)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봉우(張鳳羽) : 자(字)는 광지(光之)이고 장건인(張建寅)의 아들인데 백부(伯父) 장건추(張建樞)에게 출계(出系)했다. 순조조 26년 서기 182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청주(淸州)우후(虞侯), 진주(晉州) 영장(營將)을 역임했다. 1849년 고창현감으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을 배풀어 고을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장봉주(張鳳周) : 자(字)는 우문(遇文)이고 오(梧)는 성와(省窩)이며 장진구(張鎭九)의 아들인데 장진오(張鎭五)에게 출계(出系)했다. 순조(純祖) 10년 서기 1810년 식년(式年)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다.

장봉호(張鳳昊) : 자(字)는 의경(儀卿)이고 장건우(張建宇)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고령(高靈) 첨사(僉使)를 역임하엿다.

장상기(張相岐) : 자(字)는 봉래(鳳來)이고 호(號)는 서강(西岡)이며 장주익(張周翼)의 아들이다. 철종조(哲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진해(鎭海)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석(張 晳) : 자(字)는 찬숙(燦叔)이고 호조(戶曹)참판(參判) 장세기(張世紀)의 아들이다. 현종조(顯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흥해(興海), 벽동(碧潼)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석주(張錫疇) : 초휘(初諱) 석노(錫老)이고 자(字)는 극수(極壽)이고 장진벽(張晉碧)의 아들인데 장00(張00)에게 출계(出系)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장광표(張光表) : 자(字)는 수(秀)명(明)이고 호(號)는 인묵(忍黙)이며 장석주(張錫疇)의 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석구(張錫龜) : 자(字)는 의백(儀伯) 호(號)는 연사(蓮史)이고 장석봉(張錫鳳)의 아우이다. 고종11년 서기 1874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통훈대부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석룡(張錫龍) : 초휘(初諱)는 용규(龍逵)이고 자(字)는 진백(震伯)이며 호(號)는 유헌(遊軒), 운진(雲田)으로 학추(學樞)의 아들로 증이조판서 덕(㯖)에계 출계(出系)했다. 헌종(憲宗) 12년 서기 1846년 정식문과에 장원(壯元)으로 등과(登科)해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현풍(玄風)현감(縣監)응교(應敎) 등을 거쳐 철종 13년 통훈대부 병조참의가 되고 공조, 형조 참의와 도정(都正)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장석봉(張錫鳳) : 자(字)는 기백(紀百)이고 호(號)는 오하(梧下)이며 사호옹(四好翁) 장학추(張學樞)의 아들이다. 헌종 6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여 장능(章陵: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능) 참봉과 휘능(徽陵: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壯烈)왕후(王后) 능(陵) 령(令), 청안(淸安)현감(縣監) 천안(天安) 군수(郡守) 전주(全州) 판관(判官) 청주(淸州)진(鎭)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軍資監) 정(正)역임하였고 유집(遺集)이 있다.

장석신(張錫藎) : 자(字)는 순명(舜鳴)이고 호(號)는 과(果)제(齊)이며 참판(參判) 장시표(張時杓)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31년 서기 1894년 식년(式年)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정언(正言), 수찬(修撰), 중추원(中樞院)의관(議官) 비서원(秘書院) 승(丞)을 역임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석오(張錫五) : 자(字)는 사극(士極)이고 호(號)는 우인(又忍)이며 돈령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 장준모(張俊模)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3년 서기 1886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응교(應敎) 비서승(秘書丞) 인동(仁同) 및 함(咸)창(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석훈(張錫勳) : 초휘(初諱)는 치백(致伯)이고 자(字)는 윤언(允元)이며 장흔(張昕)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광양군구(光陽郡守)를 역임했다.

장석량(張錫良) : 자(字)는 천이(天以)이며 장정(張晸)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석우(張錫愚) : 자(字)는 성백(省伯)이고 호(號)는 신제(新齊)이며 통덕랑(通德郞) 장숙(張琡)의 아들이다. 순조(純祖) 13년 서기 1813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경릉(敬陵:성종의 생부(生父) 덕종(德宗)의 능(陵)참봉(參奉)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목천(木川) 현감(縣監) 통훈대부(通訓大夫) 경모궁(景慕宮) 령(令)을 역임하였다.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로 상례촬요(喪禮撮要)와 문집이 있다.

장석유(張錫裕) : 자(字)는 회백(晦伯)이요 호(號)는 춘담(春潭)이며 장운표(張運杓)의 아들이다. 사미헌(士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인(門人)이다. 고종 8년 서기 1813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고종20년 서기 1883년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校理),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장석정(張錫禎) : 자(字)는 계인(季仁)이고 승지(承旨) 석유(錫裕)의 아우이다. 음보(蔭補)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장석조(張錫祚) : 초명(初名)은 석휴(錫烋)이고 자(字)는 양(揚)중(仲)이고 호(號)는 소정(小亭)이며 승지(承旨) 장석유(張錫裕)의 아우이다. 고종(高宗) 2년 식년(式年)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고종 8년 서기 1871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었다. 그 후 정언(正言) 수찬(修撰) 교리(校理) 사간(司諫), 좌통례(左通禮) 등을 역임하고 고종 20년 서기 188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도정(都正) 부호군(副護軍) 호조(戶曹)참의(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성형도찰방시 선정(善政)을 배풀어 당시 고을 사람들이 세운 영세(永世)불망비(不忘碑)지가 대구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장석준(張錫駿) : 자(字)는 견가(見可)이고 호(號)는 춘고(春皐)이며 장호추(張好樞)의 아들이다. 철종 3년 서기 1852년 식년(式年)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등과(登科)하여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교리(校理) 등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장선(張 銑) : 자(字)는 자윤(子潤)이고 장우일(張遇一)의 후손(後孫)이다. 숙종조(肅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남해(南海) 현령(縣令)과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中樞府) 첨지(僉知事)를 역임했다.

장성(張 晟) : 자(字)는 천위(天爲)이고 장우상(張宇相)의 아들이다. 숙종조(肅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통훈대부(通訓大夫) 강진(康津) 현감(縣監) 겸(兼) 김해진영(金海鎭營)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했다.

장걸(張 杰) : 자(字)는 흥가(興可)이고 호(號)는 복제(復齊)이며 사인(舍人) 장해(張楷)의 아들이다. 문사(文詞)가 뛰어났으며 영조 4년 서기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도총(都摠) 이동무(李東茂), 부총(副摠) 성치찬(成致纘)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성한(張成漢) : 자(字)는 순보(順甫)이고 증(贈)좌승지(左承旨) 장태일(張台一)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정(僉正),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 경력(經歷), 공주진영(公州鎭營) 장(將), 풍전(豊川)부사(府使)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세창(張世昌) : 자(字)는 봉(鳳)후(侯)이고 호(號)는 혜정(惠廷)이며 정언(正言) 장병익(張炳翊)의 아들이다. 융희(隆熙) 2년 서기 1907년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을 역임했다.

장수언(張壽彦) : 자(字)는 중언(仲彦)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戶曹) 참의(參議)에 증작(爵)되었다.

장수충(張守忠) : 자(字)는 중(仲)필(弼)이고 장한경(張漢經)의 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수초(張守初) : 자(字)는 태린(太隣)이고 호(號)는 거연제(居然齊)이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장한경(張漢經)의 아들이다. 정조조(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남해 현감을 지내고 그곳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공주진영(公州鎭營) 장(將) 겸 토포사(討捕使)를 거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인동장씨(仁同張氏) 무자보(戊子譜) 서문(序文)을 쓰고 유집(遺集) 2권(卷)이 있으며 칠곡군 석적면 중리에 묘소가 있다.

장승원(張承遠) : 자(字)는 공유(公裕)이고 호(號)는 운정(雲庭)이고 장석구(張錫龜)의 아들로 판서(判書) 장석룡(張錫龍)에게 출계(出系)했다. 고종 22년 서기 1885년 증광(增廣)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고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사험부(副) 집의(執義), 비서원(秘書院) 승(丞)을 역임했다. 광무 1년 서기 1904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그 후 청송(靑松) 군수(郡守)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찬위(贊尉)를 역임하고 광무 10년 서기 1906년 비서승(秘書丞)을 거쳐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했으며 융희(隆熙) 3년 서기 1910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의정(議政) 민영규(閔泳奎)가 비문(碑文)을 지었고 묘소는 금능군 대항면 직지사 옆에 있다.

장시윤(張時潤) : 자(字)는 응팔(應八)이고 호(號)는 차노(此蘆)이며 진사(進士) 장주(張鑄)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9년 서기 1892년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장시표(張時杓) : 초명(初名)은 응표(膺杓)이고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호(號)는 운고(運皐)이다. 장봉상(張鳳祥)의 차자(次子)로 증(贈)이조(吏曹) 참판(參判) 장빈(張賓)에게 출계(出系)했다. 헌종 15년 서기 1849년 정식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현풍(玄風) 현감(縣監) 북청(北靑) 현감(縣監) 병조(兵曹) 및 공조(工曹)참의(參議)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刑曹)참판(參判)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북청(北靑)현감(縣監) 재임(在任) 시(時) 선정(善政)을 배풀어 읍민(邑民)들이 북청(北靑)향교(鄕校)와 만경제(萬景齊)에 흥학비(興學碑)세우고 우레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장언극(張彦極) : 자(字)는 사광(士光)이고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장성한(張成漢)의 아들이다. 정조(正祖) 8년 서기 1784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진주영(晉州營) 장(將),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

장여간(張汝衎) : 자(字)는 화중(和仲)이고 통덕랑(通德郞) 장(張)보(輔)한(漢)의 아들이다. 인조(仁祖) 13년 서기 1635년 증광(增廣)문과(文科) 별시(別試)에 등과(登科)하여 00찰방(00察訪)과 00현감(00縣監)을 역임했다.

장영섭(張永燮) : 장안세(張安世)의 후손(後孫)으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중군(中軍)을 역임했다.

장룡팔(張龍八) : 자(字)는 백응(伯應)이고 호(號)는 남와(南窩)이며 장인섭(張寅燮)의 아들로 장운섭(張運燮)에게 출계(出系)했다. 순조조(純祖朝)에 춘당대시(春塘臺試:증광(增廣)별시(別試)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성환도(成歡道) 찰방(察訪) 이조(吏曹) 정랑(正郞)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통훈대부(通訓大夫) 우통례(右通禮)를 역임하였으며 이조(吏曹)정랑(正郞) 선조(先祖) 충정공(忠貞公) 선시관(宣諡官)이 되었다. 경성(鏡城)판관(判官) 재임(在任) 시(時) 낙민루(樂民樓) 운(韻)에 차운(次韻)을 게판(揭板)하였다.

장용하(張龍河) : 초명(初名)은 성팔(聲八)이고 자(字)는 운로(雲路)이고 호(號)는 석헌(石軒)이다. 통덕랑(通德郞) 장훈섭(張勳燮)의 아들로 순조조(純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기장(機張)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우구(張宇九) : 자(字)는 정여(鼎汝)이고 장기학(張箕鶴)의 아들이다. 고종조(高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수문장(守門將) 부사과(副司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장우극(張宇極) : 자(字)는 공지(拱之)이고 삼우당(三優堂)의 아들이다. 숙종 2년 서기 167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 군수(郡守) 삼수(三水)부사(府使)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거제(巨濟)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장우상(張宇相) : 조명(嘲名)은 우환(宇寰)이고 자(字)는 보경(輔卿)이며 호(號)는 침류정(枕流亭)이다. 증(贈)참판(參判) 장원(張原)의 아들로 현종 13년 서기 1672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장(副將)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 판관(判官)을 거쳐 북진 첨사(僉使)로 나갔으나 곧 사임하고 돌아왔다. 숙종 15년 서기 1689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경력(經歷) 겸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이 되었고 숙종 19년 서기 1690년에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실기(實記) 1권(卷)과 유필(遺筆)이 있다.

장우추(張宇樞) : 자(字)는 두경(斗卿)이고 호(號)는 임졸제(任拙齊)이며 장원의 아들이다. 숙종 7년 서기 1681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체국(體局)이 장대(壯大)하고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여 시망(時望)이 있었으나 우율천향소(牛栗斥享疏)에 송암(松庵) 김순발(金順發)과 종형(從兄) 사비암(四非庵) 장우명(張羽溟)과 더불어 의소(義疏)하여 마침내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장우성(張羽成) : 자(字)는 성숙(成叔)이고 장광한(張光翰)의 아우이다. 진영(鎭營)의 영장(營將)과 순영(巡營)중군(中軍)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우영(張羽瀛) : 자(字)는 봉거(鳳擧)이고 남파(南坡) 장학(張澩)의 차자(次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했다.

장추(張 추) : 자(字)는 천원(天源)이고 장경유(張慶遒)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진주진영(晉州鎭營) 장(將) 겸(兼) 토포사(討捕使)를 역임하였다.

장우일(張遇一) : 자(字)는 경중(經仲)이고 호(號)는 귀로정(歸老亭)이며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의 아들이다. 현종(顯宗) 1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그 해 증광(增廣)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현종 13년 서기 1672년 고성(固城) 현감(縣監), 숙종 19년 서기 1693년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장우진(張佑軫) :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장진희(張鎭禧)의 아들이다. 헌종조(憲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이원(利原)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우철(張禹喆) : 초명(初名)은 원찬(元燦)이고 자(字)는 대여(大汝)이며 진사(進士) 장신손(張信孫)의 후손(後孫)이다. 순조조(純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00판관(00判官)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함경도(咸鏡道) 순영(巡營) 중군(中軍)을 역임했다.

장우택(張佑澤) : 자(字)는 중윤(仲潤)이고 사인(士人)계의 아들로 통덕랑(通德郞) 장양(張양)에게 출계(出系)했다. 숙종 2년 서기 1676년 무과에 급제(及第)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선전관(宣傳官)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陞階)하여 숙종(肅宗) 46년 서기 1720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우후(水軍虞侯)를 역임했다.

장우한(張宇翰) : 자(字)는 홍거(鴻擧)이고 호(號)는 삼당헌(三堂軒)이며 장해의 아들이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을 역임하고 효행(孝行)으로 의괘방(擬掛坊)에 천거(薦擧)되었다.

장우원(張宇遠) : 자(字)는 제천(梯天)이고 처음이름은 우천(羽天)이며 장해(張海)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전주(全州)진영(鎭營) 영장(營將)겸 포토사(捕討使)를 역임하였다. 학문(學問)에 정심(精深)하였으며 필법(筆法)이 우수(優秀)했다.

장운택(張雲澤) : 자(字)는 용견(龍見)이고 호(號)는 석농(石儂)이며 장우붕(張有鵬)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10년 서기 1873년 10월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의흥위(義興衛) 좌부장(左部長) 주부(主簿) 언양(彦陽) 현감(縣監)을 거쳐 고종 27년 서기 1890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계(陞階)되고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내금위(內禁衛) 장(將)을 역임했다. 그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인동, 청하, 영해 군수를 역임했다.

장원상(張原相) : 자(字)는 학부(學夫)이고 참판(參判) 장인원(張仁遠)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1년 서기 1864년 증광(增廣)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00참의(00參議)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했다.

장원팔(張原八) :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후손(後孫)으로 무과(武科)에 급(及)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장유령(張有齡) : 자(字)는 학구(鶴九)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후손(後孫)으로 장수초(張守初)의 아들이다. 순조조(純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훈련원(訓練院) 참군(參軍),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장유문(張有聞) : 자(字)는 경진(景振)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후손(後孫)으로 증(贈)참판(參判) 장수충(張守忠)의 아들이다. 순조(純祖) 14년 서기 1814년 무과에 급제(及第)하여 고성(固城)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유상(張有相) : 자(字)는 도륵(道勒)이고 장수원(張樹遠)의 아들이다. 고종 28년 서기 1891년 식년(式年)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시독관(侍讀官)을 역임하였다.

장유풍(張有豊) : 자(字)는 일진(日進)이고 통덕랑(通德郞) 장동환(張東煥)의 아들이다. 순조(純祖)조(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참군(參軍) 주부(主簿) 판관(判官) 경력(經歷) 기장(機張)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절충장군에 승계(陞階)되었다. 기장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장유호(張有濩) : 자(字)는 학삼(學三)이고 장병윤(張秉允)의 아들로 장병련(張秉練)에게 출계(出系)했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강원도 간성(杆城) 군수(郡守)와 절충장군(折衝將軍) 내금위(內禁衛) 장(將)을 역임했다.

장윤원(張允遠) : 자(字)는 군석(君錫)이요 호(號)는 한고(韓皐)이며 장석찬(張錫燦)의 아들이다. 고종조(高宗朝)에 영산(靈山) 용인(龍仁)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윤종(張胤宗) : 자(字)는 학삼(學三)이고 호(號)는 노와(老窩)이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7대 주손(冑孫:장손자)이다. 정조조(正祖朝)에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장익(張 翼) : 자(字)는 선(善)명(鳴)이고 호(號)는 망미헌(望美軒)이며 첨지사(僉知事) 장수렴(張受濂)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나주(羅州)진영(鎭營) 영장(營將)및 토포사(討捕使)를 역임했다.

장익상(張益相) : 자(字)는 사양(詞陽)이고 통덕랑(通德郞) 장(張)덕(德)능(能)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현감(縣監) 및 첨절제사(僉節制使) 역임했다.

장익겸(張益謙) : 장효원(張孝元)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엿으며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여 시묘 3년 후에 사람들이 그 동명을 익겸동이라 하였다.

장인오(張仁五) : 처음 이름은 용회(龍晦)이고 자(字)는 맹현(孟賢)이며 장유령(張有齡)의 아들이다. 헌종조(憲宗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장인원(張仁遠) : 처음 이름은 조원(組遠)이고 자(字)는 공무(公武)이고 호(號)는 운초(雲樵)이다. 장석이(張錫頤) 아들로 헌종 5년 서기 1839년 정식(庭式)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보령(保寧) 현감(縣監)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춘천(春川) 부사(府使) 강계(江溪)부사(府使)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장주학(張柱鶴) : 자(字)는 석부(石夫)이고 호(號)는 취석(醉石) 이며 장봉의(張鳳儀)의 아들로 백부(伯父)인 영장(營將) 장봉우(張鳳羽)에게 출계(出系)했다. 고종(高宗) 5년 서기 1868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고성(固城)부사(府使)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하고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지근(張趾根) : 자(字)는 군필(君弼)이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後孫)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역임했다.

장지덕(張趾德) : 자(字)는 여장(汝章)이고 호(號)는 사이당(四而堂)이며 장만기(張萬紀)의 손자(孫子)이다. 정읍(井邑) 현감(縣監)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을 역임하고 천생산(天生山) 아래 신곡(新谷)에 사이당(四而堂)을 지어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했다.

장지영(張志永) : 자(字)는 수경(受卿) 이고 장원상(張原相)의 아들로 장건식(張健植)에게 출계(出系)했다. 공능(恭陵:예종(睿宗)의 계비(繼妃) 장순왕후 능)과 효창원(孝昌園: 정조의 장자 무효세자의 원) 참봉을 거쳐 영릉(寧陵: 효종의능)령(令)을 역임했다.

장진만(張鎭萬) : 자(字)는 군박(君博)이고 장걸(張杰)의 손자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진주(晉州) 우후(虞侯)를 역임했다.

장진원(張晉遠) : 자(字)는 강수(康叟)이고 장(張)석(錫)인(仁)의 아들로 장(張)석(錫)민(敏)에게 출계(出系)했다. 철종(哲宗) 12년 서기 1861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했다.

장진학(張振鶴) : 자(字)는 성칠(聲七)이고 토포사(討捕使) 장익(張翼)의 손자(孫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장천학(張天鶴) : 자(字)는 문백(聞伯)이고 장영주(張永周)의 아들이다. 순조조(純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천(泗川)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장지인(張致仁) : 자(字)는 낙세(洛世)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겸(兼)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장한주(張漢籌) : 자(字)는 이운(而運)이고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後孫)이다. 무과에 급제(及第)하여 청주진(淸州鎭) 영장(營將)을 역임했다.

장한경(張漢經) : 자(字)는 군팔(君八)이고 장석량(張錫良)의 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에 증직되었다.

장홍(張 泓) : 자(字)는 효원(孝源)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아들로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及第)하여 단양(丹陽)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장효일(張孝一) 자(字)는 사종(嗣宗)이고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했다.

장휴(張 烋) : 자(字)는 사언(士彦)이도 장희만(張希萬)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진해(鎭海) 현감(縣監) 및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절충장군 내금위(內禁衛) 장(將)을 역임했다.

장흥섭(張興燮) : 자(字)는 서길(瑞吉)이고 장수규(張守奎)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중군(中軍)을 역임하였다.

장희원(張禧遠) : 자(字)는 여인(汝仁)이고 호(號)는 행산(幸山)이며 군수(郡守) 석구(錫龜)의 아들이다. 통훈대부 경기전【慶基殿: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령(令)을 역임했다.

장대지(張大智) : 자(字)는 약우(若愚)이고 장만익(張萬益)의 아들이다. 재행(才行)으로 영능(英陵: 세종능(世宗陵) 참봉(參奉)을 제수(除授)받아 역임했다.

장만용(張萬容) : 자(字)는 자유(子有)이고 호(號)는 세심당(洗心堂)이고 소매당(訴梅堂) 장영(張영)의 아들로 산음(山陰) 현감(縣監) 장옥(張鈺)에게 출계(出系)했다. 후능(厚陵)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장동재(張東載) : 처음 이름은 대서(大緖)이고 자(字)는 천노(天노)이며 호(號)는 칠탄(七灘)으로 장만용(張萬容)의 아들이다. 경종(景宗) 원년(元年) 서기 1721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장만춘(張萬春) : 자(字)는 유지(攸之)이고 진주(晉州)목사(牧使) 장(張)건(鍵)의 아들이다. 영덕(盈德)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장명동(張命東) : 자(字)는 자현(子賢)이고 장안세(張安世)의 후손(後孫)이다.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제수(除授)받았다.

장명원(張明遠) : 자(字)는 자선(子善)이고 호(號)는 가산(可山)이며 장석규(張錫逵)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7년 서기 1880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했다.

장백석(張伯錫) : 자(字)는 여계(汝啓)이고 장흥복(張興福)의 아들이다. 경종(景宗) 3년 서기 1723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병조(張炳祚) : 자(字)는 공윤(公胤)이고 호(號)는 만사(晩沙)이며 장예상(張禮相)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31년 서기 1894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를 역임했다.

장병학(張炳學) : 자(字)는 덕후(德厚)이고 장(張)세(世)능(能)의 아들이다. 광무(光武) 7년 서기 1903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00000를 제수(除授)받았다.

장복길(張復吉) : 자(字)는 경무(慶茂)이고 장근(張謹)의 아들이다.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장수륜(張壽崙) : 자(字)는 주언(柱彦)이고 호(號)는 정대헌(靜對軒)이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을 역임하고 수직(壽職)으로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제수(除授)받았다.

장승환(張升煥) : 호(號)는기애(岐崖)이고 장광한(張光翰)의 후손(後孫)이다. 고종 7년 서기 1870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장시복(張時復) : 자(字)는 사진(士進)이고 호(號)는 서암(西埯)이다. 정조(征鳥) 13년 서기 178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했다.

장룡삼(張龍參) : 자(字)는 윤집(允集)이고 호(號)는 반운(磻雲)이다. 고종 19년 서기 1882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원표(張源杓) : 자(字)는 구노(九老)이고 호(號)는 해사(海史)이며 장봉상(張鳳祥)의 아들이다. 철종(哲宗) 6년 서기 1855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람에서 추중(推重)하였으며 유집(遺集) 2권이 있다.

장유형(張有亨) : 자(字)는 낙응(洛應)이고 장동운(張東韻)의 아들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과 청주진중(淸州鎭中) 영장(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직(兼職)하였다.

장이(張 怡) : 장익겸(張益謙)의 아들로 숙종 17년 서기 1691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익영(張翼永) : 자(字)는 운거(雲擧)이고 장석오(張錫五)의 아들이다. 고종28년 서기 1891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지창(張志昶) : 자(字)는 주경(周卿)이고 장원상(張原相)의 아들이다. 고종28년 서기 1891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지원(張趾元) : 자(字)는 사준(士俊)이고 장규석(張圭錫)의 아들로 장대규(張大規)에게 출계(出系)했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웅천(熊川) 현감(縣監)과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장영석(張永錫) : 자는 학성(學性)이고 호는 임은(林隱)이며 장기관(張基寬)의 아들이다. 한말(韓末)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역임했다. 송림(松林)에 임은정(林隱亭)을 세웠으며 임은정(林隱亭) 실기(實記)가 있다.

장록원(張綠遠) : 자(字)는 중겸(仲謙)이고 호(號)는 곡은(谷隱)이며 장석우(張錫愚)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이 높았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대임(張大臨) : 자(字)는 천흥(天興)이고 호(號)는 육의강(六宜堂)이며 장만기(張萬紀)의 장자이다. 숙종 19년 서기 168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문장(文章)이 아름다웠다. 숙종 20년 많은 선비의 추대로 소두(疏頭)가 되어 달설군 하빈의 6신사 청액을 올렸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대방(張大方) : 자(字)는 사구(士矩)아고 호(號)는 동암(東巖)이며 장만기(張萬紀)의 차자(次子)이다. 숙종 19년 서기 1689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하고 관로(官路)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하였다. 자(子) 만인당(晩忍堂)이 귀(貴)히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고 문집(文集)이 있다.

장대윤(張大胤) : 자(字)는 군서(君緖)이고 호(號)는 기암(寄庵)이며 장만익(張萬益)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람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었다.

장덕원(張德元) : 자(字)는 사순(士順)이고 호(號)는 무민당(无悶堂)이며 기산(岐山) 장급(張芨)의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으로 성품(性稟)이 온유(溫柔)하고 문명(文名)이 뛰어났으며 광해군 2년 서기 1610년 동락서원(東洛書院)의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창건(創建) 시(時) 량송(樑頌) 15현(賢)의 한 사람이다.

장동도(張東道) : 자(字)는 천경(天經)이고 세심당(洗心堂) 장만용(張萬容)의 아들이다.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문행(文行)이 있었다.

장동윤(張東潤) : 자(字)는 화숙(華淑)이고 호(號)는 옥서(玉西)이며 증(贈)호조(戶曹)참판(參判) 장광표(張光表)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높았다.

장동표(張東杓) : 자(字)는 춘경(春卿)이고 호(號)는 삼졸당(三拙堂)이며 처사(處士) 장석달(張碩達)의 손자(孫子)이다. 도량이 넓고 예학(禮學)과 경서에 밝았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두현(張斗鉉) : 자(字)는 영규(榮奎)이고 호(號)는 죽두(竹두)이며 좌통례(左通禮) 장용팔(張龍八)의 아들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제수(除授)받았다. 문장과 학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유집(遺集)으로 죽두집이 있다.

장류(張 瑠) : 자(字)는 유옥(留玉)이고 호(號)는 안제(安齊)이며 양진당(養眞堂) 장희달(張喜達)의 아들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 31년 서기 1705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문행이 있었으며 유집(遺集) 2권이 있다.

장만원(張萬元) : 자(字)는 구지(久之)이고 목사(牧使) 장건(張鍵)의 아들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門人)이다. 은일(隱逸)로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세인(世人)의 추종을 받는다.

장명상(張命相) : 자는 성초(性初)이고 호(號)는 견(見山)이며 장형원(張馨遠)의 아들이다. 사미헌(四未軒)의 문인(門人)으로 예학(禮學)과 재예(才禮)가 뛰어나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저서(著書)로 오유례수(午酉禮數) 동(東)락(洛)집(集), 옥산(玉山)가전(家傳) 문집(文集) 등(等)이 있다.

장묵(張 黙) : 처음 이름은 중렬(重烈)이고 자(字)는 이용(爾容)이고 호(號)는 졸제(拙齊)이며 장(張檝)의 아들이다. 갈암 이(李)현(玄)일(一)의 문인(門人)으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저명(著名)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복추(張福樞) : 자(字)는 경하(景遐)이고 호(號)는 사미헌(士未軒)이며 장굉(張浤)의 장자(長子)로 백부(伯父) 장관에게 출계(出系)했다. 조부에게 수학(修學)하여 은일(隱逸)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 등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불사(不仕)하고 오직 학문(學文)과 후진(後進) 교육(敎育)에만 전념(專念)하였다. 고종(高宗) 27년 서기 1890년 용리서당(用里書堂)(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을 세워 많은 후진(後進)을 교육(敎育)하여 문인(門人)이 500여명을 배출(輩出)하여 오늘날까지 그 학맥(學脈)과 사상(思想)이 면면(綿綿)히 이어오고 있다. 고종 31년 서기 1894년 부호군(副護軍)과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승서(陞敍)하였으나 모두 불사(不仕)했다.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여 당대(當代) 영남(嶺南) 유종(儒宗)으로 추존(推尊)하였다. 저서(著書)로는 역학(易學)계몽(啓蒙),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 동몽훈(童蒙訓) 등이 있다.

장상학(張相學) : 자(字)는 신노(莘老)이고 호(號)는 화강(華岡)이며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후손(後孫)이다. 재덕(才德)이 특출(特出)하여 숙부(叔父) 장승택(張升澤)에게 수학(修學)하여 많은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였다. 저서(著書)로 춘추(春秋)질서(疾書), 이기설변(理氣說辨), 이례통편(二禮通編) 화강문집(華岡文集) 등이 있다.

장석기(張錫基) : 자(字)는 사원(士元)이고 호(號)는 청초(聽蕉)이다. 장낙추(張洛樞)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이 높고 깊어 사림(士林)의 추존(推尊)을 받았으며 문집 2책(冊)이 있다.

장석봉(張錫鳳) : 자(字)는 의백(儀伯)이고 영장(營將) 장우원(張宇遠)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추존(推尊)을 받았으며 시집(詩集)이 있다.

장석빈(張錫斌) : 자(字)는 비겸(丕兼)이고 호(號)는 횡계(橫溪)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아들로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덕행(德行)으로 사림의 추존(推尊)을 받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장석지(張錫祉) : 처음 이름은 석헌(錫軒)이고 자(字)는 탄가(坦可)이며 호는 소화(小華)이다. 장간추(張幹樞)의 아들로 문사(文詞)에 능통(能通)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석희(張奭喜) : 자는 주약(周若)이고 호(號)는 눌암(訥庵)이며 석은(石隱) 장우덕(張禹德)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당세(當世)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선흥(張善興) : 자(字)는 인노(仁老)이고 호(號)는 낙주(洛洲)이며 남취헌(攬翠軒) 장경적(張慶寂)의 아들이다. 경종(景宗) 3년 서기 1723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났으며 문집이 있다.

장수모(張守模) : 자(字)는 이단(爾短)이고 호(號)는 은제(隱齊)이며 장한시(張漢蓍)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뛰어났으며 수직(壽職)으로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겸(兼) 오위장(五衛將)이 제수(除授)되었다.

장수흥(張壽興) : 자(字)는 인수(仁叟)이고 호(號)는 죽정(竹亭)이며 남취헌(攬翠軒) 장경적(張慶寂)의 아들이다.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하였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장술능(張述能) : 자(字)는 유겸(柔謙)이고 호(號)는 부지헌(不知軒)이며 장자주(張字籌)의 아들이다.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하였으며 전서(篆書)에 능(能)하였고 유집(遺集)이 있다.

장승원(張升遠) : 자(字)는 이가(邇可)이고 호(號)는 담옥(澹屋)이며 장석충(張錫忠)의 아들이다. 고종 30년 서기 1893년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제수(除授)되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문집(文集) 4권이 있다.

장승택(張升澤) : 자(字)는 의백이고 호는 농산이며 장유량의 아들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인(門人)으로 당대 유학자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으며 1912년 뢰(磊)양(陽)정사(精舍)를 건립하고 강학(講學)에 전념(專念)하였으며 많은 문인(門人)을 배출하였다. 저서(著書)로 사유편(四維編) 입농문답(笠農問答) 사례고증(四禮考證) 문집(文集)이 있다.

장시택(張時澤) : 자(字)는 윤(允)화(和)이고 호(號)는 창(滄)주(州)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인(門人으로 문사(文詞)가 능하여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만년(晩年)에 난국계(蘭菊契)를 만들어 제현(諸賢)들과 교유(交遊)했다.

장심택(張心澤) : 자(字)는 성오(誠悟)이고 호(號)는 용여(甬旅)이며 장유원(張有元)의 아들이다.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효우(孝友)가 지극(至極)하였다. 문집(文集) 4권이 있다.

장시현(張始顯) : 자(字)는 양경(楊卿)이고 호(號)는 산은(散隱)이며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의 아들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숙종(肅宗) 17년 서기 169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개령(開寧) 현감(縣監)을 역임한 후(後)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장보현(張普顯) : 자(字)는 제경(濟卿)이고 호(號)는 지제(知齊)이며 사인(舍人) 장계문(張季文)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聰明)하여 관직(官職)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하고 조상(祖上)을 공경(恭敬)하고 종친(宗親)간의 화목(和睦)에 진력(盡力)을 다 하였다. 경종(景宗) 3년 서기 1723년 태상경파(太常卿派) 파보(波譜)를 처음으로 간행(刊行)하였다. 문집(文集)과 저서(著書)를 많이 남겼으며 수직(壽職)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영각(張永恪) : 처음 이름은 영효(永孝)이고 자(字)는 백원(百源)이며 호(號)는 기정(杞亭)이다. 학은(鶴隱) 장한진(張翰鎭)의 아들이다. 학덕(學德)으로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장례(葬禮) 시(時) 유림(儒林) 3백(百)여인(餘人)이 회장(會葬)하였다. 문집(文集)이 있었으나 병화(兵禍)로 일실(逸失)되었다.

장영석(張永奭) : 처음 이름은 영수(永洙)이고 자(字)는 희백(姬白)이며 호(號)는 학초(鶴楚)로 장두칠(張斗七)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세인(世人)의 추중(推重)을 받있다. 문집(文集) 2책이 있다.

장영주(張永冑) : 처음 이름은 영희(永禧)이며 호(號)는 암하(岩下)로 장두식(張斗植)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이 이었으며 비문(碑文) 글씨를 잘 쓰고 유고(遺稿)가 있다.

장용갑(張龍甲) : 자(字)는 경삼(景三)이고 호(號)는 낙애(洛涯)이며 군수(郡守) 장동옥(張東玉)의 손자(孫子)이다. 기절(氣節)이 곧고 문장(文章)이 능통(能通)해다. 유집(遺集) 2권이 있다.

장우명(張羽溟) : 자(字)는 붕거(鵬擧)이고 호(號)는 사비암(四非庵)이며 남파(南坡) 장학(張澩)의 아들이다.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하여 문행(文行)으로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우원(張右遠) : 처음 이름은 시원(是遠)이고 자(字)는 지경(智卿) 호(號)는 현와(弦窩)로 장석영(張錫英)의 아들이다. 가학(家學)에 연원(淵源)하여 문행(文行)이 있어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원(張原下水) : 자(字)는 활원(活源)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우주(張羽柱) : 자(字)는 봉경(奉敬)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손자(孫子)이다. 문행(文行)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고 유집(遺集)이 있다.

장유원(張有遠) : 자(字)는 달천(達泉)이고 호(號)는 국파(菊坡)이며 장수약(張守約)의 아들이다. 문사(文詞)가 출중(出衆)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신섭(張頣燮) : 자(字)는 유양(由養)이고 호(號)는 신절제(愼節齊), 양졸당(養拙堂)이며 장한신(張漢臣)의 아들이다. 문사(文詞)가 출중(出衆)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이인(張以仁) : 자(字)는 춘언(春彦)이고 호(號)는 신야(莘野)이며 검곡(儉谷) 장내도(張乃道)의 후손(後孫) 장일성(張日省)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출중(出衆)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장인목(張寅穆) : 자(字)는 재견(載見)이고 호(號)는 소산(素山)이며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후손(後孫)으로 친상(親喪)을 달하여 3년간 시묘(侍墓)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고 문장(文章)이 능(能)했으며 문집(文集) 2책이 있다.

장주(張 儔) : 자(字)는 노여(老汝)이고 호(號)는 각헌(覺軒)이며 장지목(張趾穆)의 아들이다. 시부(侍賻)에 능(能)하고 기개(氣槪)가 잇었다.

장즙(張 檝) : 처음 이름은 한영(漢英)이고 자는 제여(濟汝)이며 호(號)는 양심제(養心齊)로 장세강(張世綱)의 아들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門人)으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지천(張知天) : 자(字)는 악보(樂甫)이고 호(號)는 낙천당(樂天堂)이며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 장대명(張大溟)의 아들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門人)으로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지학(張趾學) : 자(字)는 사언(思彦)이고 호(號)는 만인당(晩忍堂)이며 장대방(張大方)의 아들이다. 영조조(英祖朝)에 문장가(文章家)로 향시(鄕試)에 여러번 합격(合格)하였으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는 않고 오로지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하였다. 영조49년 서기 1776년 수직(壽職)으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제수(除授)되고 영조 52년 서기 1776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당대에 학문과 행의(行誼)가 추중(推重)하였다.

장집(張 鏶) : 자(字)는 자정(子精)이고 월포(月浦) 장우일(張遇一)의 아들이다. 숙종 15년 거기 168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태학(太學:성균관(成均館)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음며 문행(文行)이 뛰어났다.

장한신(張漢信) : 자(字)는 오겸(五兼)이고 호(號)는 양졸당(養拙堂)이며 장석구(張錫九)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장효창(張孝昌) : 자(字)는 행보(行甫)이고 호(號)는 낭천(浪川)이다. 장빈(張濱)의 아들로 장수흥(張壽興)에게 출계(出系)했다. 학행(學行)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었다.

장희원(張憙遠) : 자(字)는 중휘(仲徽)이고 호(號)는 위당(韋堂)이며 비서원(秘書院) 승(丞) 장석신(張錫藎)의 아들이다. 학행(學行)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제수(除授)되고 문집(文集) 3책(冊)이 있다.

장경우(張敬遇) : 자(字)는 태래(泰來)이고 호(號)는 만회당(晩悔堂)이며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의 아들이다. 족조(族祖)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고 인조(仁祖) 5년 서기 1627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병장(義兵將)으로 강도(江道:강화도(江華島)로 행군(行軍) 도중(途中)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 해산(解散)하였다. 그 후 화산서당(花山書堂)을 세워 강학(講學)과 학문(學文) 연구(硏究)에 전념(專念)하여 효종 5년 서기 1654년 영능(英陵:세종의 능) 참봉(參奉)으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증직(贈職)되고 동락서원(東洛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장사진(張士珍) : 선조조(宣祖朝)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사인(舍人) 장륜(張崙)의 차자(次子)이다. 선조(宣祖) 25년 서기 1592년 군위(軍威) 교생(校生)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격문(檄文)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복수군(復讐軍)이라 이름하고 인동(仁同) 군위(軍威) 등지(等地)에서 왜군(倭軍)을 무찔러 적이 감이 들어오지 못했다. 적(敵)을 추격(追擊)하다가 격전(激戰) 끝에 그 해 9월 30일 한팔을 잃고 한 팔로 싸우다가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하였다. 이 사실(事實)이 조정(朝廷)에 알려지고 조정(朝廷)에서는 그 충성(忠誠)을 찬양(讚揚)하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증직(贈職)하고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가 하사(下賜)되었다. 지금도 군위군 효령면 오천동에 장의사(張義士)가 만든 장군천(將軍泉)이 있으며 매년 한식(寒食)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장수한(張壽漢) : 자(字)는 명호(明浩)이고 장천추(張天樞)의 아들이며 00찰방(00察訪)을 역임했다. 영조(英祖) 4년 이인좌(李麟左)의 난(亂)을 평정(平正)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장홍한(張鴻翰) : 자(字)는 순거(順擧)이고 증(贈)호조(戶曹)참판(參判) 장곤(張崑)의 아들이다. 문장(文章)이 일찍부터 출중(出衆)하고 지략(智略)이 특출(特出)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 금산(金山), 개령(開寧), 선산(善山), 지례(知禮)의 4고을의 소모장(召募將)으로 황간(黃澗)의 의병장(義兵將) 박이용(朴以龍)과 함께 00에서 적(敵)과 싸워 공을 세웠다. 참판(參判) 정광적(鄭光績)의 장계(狀啓)로 상주(尙州) 판관(判官)이 되어 상주(尙州) 목사(牧使) 정기룔(鄭起龍)장군(將軍) 휘하(麾下)에서 왜적(倭敵)을 토벌(討伐)하다 선조 27년 서기 1594년 3월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니 목사 정기룡이 직접 염습(殮襲) 반장(返葬)했으며 괴걸인(魁傑人)이라 칭찬(稱讚)하였다.

장지연(張志淵) : 자(字)는 순소(舜韶)이고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으로 한말(韓末) 언론인(言論人)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이다. 고종(高宗) 31년 서기 1894년 사마시(司馬試)에 이벽하여 진사(進士)되어 승훈랑(承訓郞)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집위원(編輯委員)을 역임했으며 광무(光武) 2년 서기 1898년관직(直)을 버리고, 남궁억(南宮億) 유근(柳謹)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에도 참가(參加)하고 이상재(李商在)와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만민공동회(萬民公同會)를 개최했으며 광무 5년 서기 1902년 3월부터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社長)을 맡아 민중(民衆) 계몽(啓蒙)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하였다. 광무(光武) 8년 서기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자 11월 20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是日也) 방성대곡(放聲大哭)이란 제목(題目)으로 비분(悲憤)에 찬 논설(論說)을 싫어 서울 장안 과 온 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장진홍(張鎭弘) : 다른 이름은 재환(在煥)이고 자(字)는 준극(俊極)이고 호(號)는 창여(滄旅)이며 항일의사(抗日義士)로 장성욱(張聖旭)의 아들이다. 경북 칠곡(漆谷) 인동(仁同) 출신(出身)으로 인명학교(仁明學敎)를 졸업(卒業)하고 서기 1914년 조선(朝鮮) 보병연대(步兵聯隊)에 입대하여 제대(除隊) 후(後)에 광복군(光復단원(團員)에 가입하여 러시아 하바로스크에 망명(亡命)하여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교포(僑胞) 청년(靑年)들에게 군사훈련(軍事訓鍊)을 지도(指導)하고 서기 1919년 3.1운동(運動) 후(後)에 귀국(貴國)하여 일본(日本)의 잔학상(殘虐像)과 만세(萬歲)운동(運動) 자료(資料)를 수집(蒐集)하여 한국(韓國) 독립운동(獨立運動) 진상(眞相)을 저술(著述)하고 그 해 7월 인천항에 들어오는 미국(美國) 군함(軍艦)에 근무(勤務)하는 하사(下士) 김상철(金相哲)에게 책(冊)을 주어 세계(世界) 각국(各國)에 배부(配付)할 것을 부탁(付託)하였다. 그 후 서기 1927년 경북(慶北) 도청(道廳)과 경찰부(警察部) 조선(朝鮮) 및 식산(殖産)은행(銀行) 지점을 폭파(爆破)를 계획(計劃)하고 그 해 10월 18일 오전 9시경 여관 종업원을 시켜 꿀 상자로 위장(僞裝)하여 폭탄(爆彈)을 송달(送達)케 했다. 제일 먼저 배달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오전 11시 50분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日警)이 중상(重傷)을 입고 은행이 대파(大破)되었다.

장태수(張泰秀) : 자(字)는 성안(聖安)이고 호(號)일유제(一逌齊)이며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장한두(張漢斗)의 아들이다. 한말(韓末) 문신(文臣) 및 순국(殉國)의사(義士)이다. 전북(全北) 김제(金堤)에서 출생해 중부(仲父) 한진에게 글을 배워 철종 12년 서기 1861년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고종 6년 서기 1869년 양산군수가 되어 해변의 방비를 굳게 하고 임진왜란 시 순절한 조영규 제단을 수축하며 내치에도 힘써 칭송을 받았다.

장봉한(張鳳翰) : 자(字)는 문(文)거(擧)이고 호(號)는 개옹(介翁)이며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손자(孫子)이다. 정구(鄭逑) 및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 지방(地方)에서 왜군(倭軍)의 앞 잡비가 되어 우리 군사를 괴롭히던 중 찬숙(贊夙)과 왜장(倭將) 상좌수정(上佐水晶)을 사로잡아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에게 보내었다. 의병장(義兵將) 김면이 이 사실(事實)을 조정(朝廷)에 알리려 하니 이를 거절(拒絶)하였다. 성주(星州) 이양서원(伊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장이유(張以兪) : 자(字)는 자유(子裕)이고 호(號)는 지분헌(知分軒)이며 장봉한(張鳳翰)의 아들이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으로 학문(學文)에 전념(專念)하였다. 인조(仁祖) 11년 서기 1633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변무소(辨誣疏)와 사칠변정(四七辯正)을 짓고 인조(仁祖)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에는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군량(軍糧)보급(補給)을 위해 힘썼으나 청군(淸軍)에 대한 항복(降伏) 소식을 듣고 통곡(痛哭)하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왔다. 이양서원(伊陽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장석영(張錫英) : 자(字)는 순화(舜華)이고 호(號)는 회당(晦堂)이며 참판(參判) 장시표(張時杓)의 아들로. 한말(韓末)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학자(學者)이다. 광무(光武) 9년 서기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締結)소식을 듣고 이승만(李承晩) 곽종석(郭鍾錫) 등(等)과 영남(嶺南) 유생(儒生) 300여명을 규합(糾合)하여 조약파기(條約破棄)와 을사(乙巳)오적(五賊) 처단(處斷)을 요구(要求)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항일(抗日)운동(運動)을 시작하였다.

장기석(張基奭) : 자(字)는 진여(進汝)이고 호(號)는 자하(紫下)이며 장세헌(張世憲)의 아들이다. 어릴 적에 성품(性稟)이 온화(溫和)하고 의협심(義俠心)이 강했다. 고종(姑從) 여심연(呂心淵)에게 수학(修學)하여 사서(四書)육경(六經)에 통달(通達)하였으며 후진(後進)양성(養成)을 위한 교육(敎育)에 전념(專念)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 후(後) 성주(星州)군수(郡守) 경찰서장(警察暑葬)의 명의(名義)로 일본왕(日本王) 명치(明治)의 생일(生日) 축하(祝賀) 행사(行事) 초청장(招請狀)에 불응(不應)하여 국경(國慶)반대자(反對者)로 호출장(呼出狀)을 보냈으나 “내 목이 굶어 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怨讐)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하고 호통(號筒)을 치며 출두(出頭)하지 아니하여 일경(日警)이 결박(結縛)하여 가니 부인박씨(夫人朴氏)는 “집안 일은 걱정말고 대의(大義)를 밝히시라.” 격려(激勵)하였다. 갖은 고초(苦草)를 받고 1911년 1월 5일 27일 만에 옥중(獄中)에서 향년(享年) 52세로 눈을 김으니 장례(葬禮) 차(車)가 대구시내(大邱市內)를 나오니 점포(店鋪)에 문(門)을 닫고 거리(距離)에 나와 통곡(痛哭)하는 자가 수만(數萬) 명(名)에 이르렀다. 1911년 3월 8일 경북(慶北)도내(道內) 유림(儒林) 수만(數萬) 명(名)이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함에 만장(輓章)이 수천(數千)이요 제문(祭文)이 수백(數百)이라 이후(以後) 전국(全國) 유림(儒林)이 의논(議論)하여 선생(先生)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해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를 모방(模倣)해 자양산(紫陽山)에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세웠다.

장재성(張在星) : 장병희(張炳熙)의 아들이다. 배제둥학교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하여 일본대학에 입학 의열단원(義烈團員)에 가입(加入) 단원 최탄형(崔坦亨)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밀령(密令)으로 재일동포 및 유학생에게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하고 “말하는 침묵(沈黙)이란” 애국(愛國)시집(詩集)을 배부(配付)하였으며 애국가요(愛國歌謠)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작사(作詞)하여 널리 홍보(弘報)하고 “민족(民族)이여 일어나라” 는 잡지(雜誌)를 발간(發刊)하여 날카로운 필봉(筆鋒)을 휘둘렀으며 민족정신(民族精神)은 국내외(國內外)에 선양(宣揚)할 목적으로 항일 영화 “홍주머니” 시나리오를 창작(創作)하여 영화(映畵)를 제작하려다가 계획(計劃)이 누설(漏泄)되어 1939년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대구감옥에서 옥고(獄苦) 중(仲) 고문(拷問)의 여독(餘毒)으로 1939년 6월 25일 25세로 일생(一生)을 마감(磨勘)했다. 조국광복(祖國光復)과 더불어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8년 3월 1일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80년 선산(善山) 문화원(文化院)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 선산읍 노타리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웠다.

장용희(張龍熙) : 다른 이름은 용희(容熙)이고 장안세(張安世)의 후손(後孫)이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안동군 북후면에서 일제(日帝) 주요(主要) 기관(機關) 폭파(爆破)와 요인(妖人)을 암살(暗殺)하는 계획(計劃)을 하였다. 1927년 12월 장진홍(張鎭弘)이 일본(日本)에서 체포(逮捕)된 후(後) 일경(日警)의 검색(檢索)을 피해 다니다가 자결(自決)하였다.

장영조(張永駣) : 자(字)는 치조(致兆)이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후손(後孫)이며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고종조(高宗朝)에 참봉(參奉)이 제수(除授)되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염원(念願)하던 중(中) 3.1운동(運動)을 계기(契機)로 많은 동민(洞民)을 규합(糾合)하여 한국독립만세(韓國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의거(義擧)를 계속(繼續)하다가 왜경(倭警)에게 주동자(主動者)로 체포(逮捕)되어 대구법원에서 1년 2개월 옥고(獄苦)를 치렀다. 1983년 건국(建國)공로(功勞)로 대통령(大統領) 표창(表彰)이 추서(追敍)되고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장준호(張俊灝) : 자(字)는 경팔(景八)이고 호(號)는 회산(回山)이며 오위장(五衛將) 장희학(張希鶴)의 아들로 독립(獨立) 운동가(運動家)이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자 18세의 나이로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남산(南山) 의징(義陣)에 자원(自願) 입대(入隊)한 후(後) 경주 영천 신령 자양 등지에서 왜적(倭敵)을 격파(擊破)하는데 참전(參戰)하였으며 동해지방의 해상 감시 및 중군장(中軍將)의 임무를 맡았다. 그 후 연일, 청하, 자천, 작전(作戰)에 참전(參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읋 체포되어 융희(隆熙) 3년 서기 1909년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을 받고 옥고(獄苦) 중 1910년 9월 한일합방(韓日合邦) 국치(國恥)로 보석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규설(韓圭卨) 김윤식(金允植) 손진구(孫晉球) 등과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손진구(孫晉球) 등과 동산학원(東山學院)을 설립(設立)하여 후진(後進) 교육(敎育)에 진력(盡力)하다가 귀국(貴國)하여 신간회(新幹會)에 가입(加入)하여 활동을 하다가 43세로 서거(逝去)하였다. 1977년 독립(獨立) 유공자로 건국공로(建國功勞) 대통령(大統領) 표창(表彰)이 추서(追敍)되고 1989년 회산 장준호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전기(傳記) 1책을 간행(刊行)하였다.

장세파(張世播) : 자(字)는 관여(觀汝)이고 장지하(張志廈)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在學) 중 항일학생(抗日學生)결사연구회(結社硏究會)를 조직(組織)하였다. 동회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과 민족의식 고취(鼓吹)를 목적으로 한 단체이었다.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졸업(卒業) 후(後) 안평초등학교에 재직(在職) 중 간행물인 “반디불”이 일경(日警)에 탐지(探知)되어 비밀(秘密)결사(結社) 전모(傳模)가 탄로(綻露)되어 체포된 후 2년여(年餘) 미결수로 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대전형무소에서 5년의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광복(光復)을 눈앞에 두고 순국(殉國)하였다. 1963년 독립유공으로 태통령 포상이 추서(追敍)되었다.

장경욱(張慶昱) : 자(字)는 계숙(啓孰)이고 증(贈)장악원(掌樂院) 정(正) 장내적(張乃迪)의 아들이다.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수학(修學)하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여 부모를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여 알리 세인(世人)의 칭송(稱頌)을 받았다.

장교찬(張敎燦) : 자(字)는 경오(敬五)이고 호는 긍제(兢齊)이다. 진사(進士) 장원표(張源杓)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풍질(風疾)을 앓아 11년 동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루같이 시탕(侍湯)하였다. 변비로 고생하실 때는 대나무 대롱으로 빨아내고 깊은 산골에 약초를 캐러가거나 의원(醫院)을 데리려 밤길을 갈 때는 호랑이가 따라다니며 보호(保護)하였다. 이 사실(事實)이 세상(世上)에 알려지자 사림(士林)의 천거(薦擧)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고 고종 26년 서기 1889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승지(承旨) 장석신(張錫藎)이 지은 묘비문(墓碑文)과 유집(遺集)이 있다.

장석규(張錫奎) : 자(字)는 사운(師雲)이고 호(號)는 연미정(戀美亭)이며 처사(處士) 장시호(張時皥)의 아들이다. 정조(正祖) 24년 서기 1800년 인동부사 이갑회(李甲會)의 무고(誣告)로 부친(父親)은 장사(杖死)당하고 모친(母親)은 태중(胎中)에 옥(屋)에서 태어났다. 한 달도 안되어 어머니 배(裵)씨는 전라도 강진에 있는 섬으로 유배(流配)되고 강보(襁褓)에 싸여 어린 누나와 함께 따라갔다. 그 곳에서 아홉 살 때 밤중에 향리(鄕吏)가 침입(侵入)해 겁탈(劫奪)을 하려하자 모녀(母女)가 바다에 투신(投信)해 절사(節死)하였다. 그 후 해마다 투신(投身) 일(日)에 해풍(海風)이 일어 섬사람이 원혼(冤魂)을 위로(慰勞)하기 위해 제(祭)를 올렸다.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성장(成長)한 후(後) 아들 장기원(張驥遠)을 한양(漢陽)에 보내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지난날의 억울한 사연(事緣)을 호소(呼訴)케 하여 마침내 신원(伸寃)되었다. 그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알려져 널리 칭송(稱頌)하였다. 연미정(戀美亭) 실기(實記)가 있다. 이 사실이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고(逸士遺稿) 3권 한국(韓國) 기인열정(奇人列傳)에 실려있다.

장국주(張國籌) : 자(字)는 태노(台老)이고 호(號)는 검계(儉溪)이며 장탄(張坦)의 아들이다. 일찍 부모를 여위고 선친의 만갑(挽甲)이 되자 가묘(家廟)에 고(告)한 후(後) 제사(齊舍)에서 3년간 여묘(廬墓) 의례(儀禮)를 마쳤다. 처마에는 백구(白鷗)가 날아와 세인(世人)들이 효감(孝感)의 소리라 하였다.

장기원(張驥遠) : 자(字)는 기옥(其玉)이고 호는 학산(鶴山)이며 연미정(戀美亭) 장석규(張錫奎)의 아들이다. 조부모(祖父母)가 인동부사의 무고(誣告)로 전라도(全羅道) 강진에 정배(定配)당하여 만단의 고생으로 성장하여 부친으로부터 억울한 사연을 듣고 부친의 지시로 상경(上京)하여 어가(御駕) 앞에 엎드려 울며 누차(屢次) 면소(免訴)하여 신원(伸寃)하였으며 고종(高宗) 28년 서기 1890년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이 되었다.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칭송(稱頌)되었다.

장석진(張錫震) : 자(字)는 동언(東彦)이고 통덕랑(通德郞) 장돈(張暾)의 이들이다. 영조조(英祖朝)에 부친(父親)이 누명(陋名)을 쓰고 원옥(冤獄)되자 상경(上京)하여 길거리에서 주야(晝夜)로 호곡(號哭)하며 비가 오지 않도록 빌었다. 마침 가뭄이 심한지라 형조판서(刑曹判書) 윤동도(尹東度)가 불러 그 사연(事緣)을 듣고 계문(啓聞)하였다. 효자(孝子)가 원한(怨恨)을 품고 있으니 어찌 가물지 얺겠는가 하면서 사형(死刑)을 감하고 낮은 형벌(刑罰)을 내렸다.

장수중(張守中) : 자(字)는 사정(士政)이고 호(號)는 낙애(洛涯)이며 양졸당(養拙堂) 장한신(張漢信)의 아들이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당시 무릅을 꿀었던 곳에 풀리 전부 말라 죽었다. 또한 학문(學文)에 전심(專心)하여 학덕(學德)과 행의(行誼)가 세인(世人)이 칭송(稱頌)하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장영만(張英萬) : 자(字)는 군실(君實)이고 호(號)는 낙포(洛圃)이며 양무공신(揚務功臣) 장수한(張壽漢)의 후손(後孫)이다. 고종(高宗) 31년 서기 1894년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너무 애통(哀痛)하고 슬퍼한 나머지 몸이 너무 수척(瘦瘠)하니 세인(世人)들이 감동(感動)하고 칭송(稱頌)하였다. 현와(弦窩) 장우원(張右遠)이 지은 묘비문(墓碑文)이 있다.

장적손(張適孫) : 자(字)는 자장(子長)이고 통찬(通贊) 장맹저(張孟儲)의 장남(長男)이다. 성종조(成宗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순위(忠順衛)를 역임했으며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소학산(巢鶴山)에 장례(葬禮)한 후 아우 장신손(張信孫)과 함께 3년을 시묘(侍墓)하고 평생(平生)을 초하루 보름에 삭망제(朔望祭)를 올렸다. 그로부터 이 마을(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을 삭제동(朔祭洞) 소학산(巢鶴山)을 삭제산(朔祭山)이라 불렀다.

장주국(張柱國) : 자(字)는 내숙(來叔)이고 호(號)는 성석(醒石) 통덕랑(通德郞) 기산(岐山) 장급(張岌)의 후손(後孫)이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노환(老患)으로 앓으시는 모친(母親)의 빗질 대소변 시중을 들면서 분뇨(糞尿)의 맛을 보아 병세(病勢)를 가름하며 10년을 하루 같이 구완하여 효행(孝行)으로 칭송(稱頌)되었다. 이정기(李貞基)가 지은 효행전(孝行傳)과 유고(遺稿)가 있다.

장진홍(張晉弘) : 자(字)는 능도(能道)이고 호(號)는 만제(晩齊)이며 장수채(張受采)의 아들이다. 효행(孝行) 지극하여 모친이 병환(病患)이 있어 낮게 해달라고 단지(斷指)하면서 하늘에 빌고 상(喪)을 당해서는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매일 강물을 길러 조석전(朝夕奠)을 올렸는데 기이(奇異)하게도 여막(廬幕) 아래서 샘이 솟아 한번도 마르지 않았다가 시묘(侍墓)를 마치자 샘도 없어졌다. 향리(鄕里)에서 포상(褒賞)을 교장(交章:연명(延命)으로 상소(上疏)하여 철종(哲宗) 10년 서기 1859년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고 문집(文集)이 있다.

장길상(張吉相) : 자(字)는 치상(致祥)이고 호(號)는 황제(黃齊)이며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장승원(張承遠)의 아들이다. 고종조(高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규장각(奎章閣)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장직상(張稷相) : 자는 00이고 호는 00이며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장승원(張承遠)의 차남(次男)이다. 선산(善山)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장택상(張澤相) : 자(字)는 치우(致雨)이고 호(號)는 창랑(滄浪)이며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장승원(張承遠)의 3남이다. 칠곡군 오태리에서 출생(出生)하여 7세에 한학(寒瘧)을 수학(修學)하고 10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한사(漢史)와 당송(唐宋)8대가 외교사(外交史) 등(等)을 통독(通讀)한 후(後) 우남학회(雩南學會)가 경영(經營)하는 한성학교(漢城學校))에 입학(入學) 신학문(新學問)에 입문(入聞) 수학(修學)한 후 도일(渡日)하여 일본(日本) 야마구찌갱(山口縣)의 소학교(小學校)에 입학(入學) 수학(修學)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입학(入學) 수학(修學)하다가 한일합방(韓日合邦) 후(後) 중국(中國) 상하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러시아 군항(軍港)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到着)하여 이상설(李相卨) 열사(烈士)의 권유(勸誘)와 주선(周旋)으로 온갖 고생(苦生)을 무릅쓰고 영국(英國)에 도착(到着)하여 에딘바라대학 경제학과(經濟學科)를 졸업(卒業)한 후 1919년 도미(渡美)하여 이승만(李承晩) 조병옥(趙炳玉) 등(等)과 구미위원(歐美委員)으로 활약하였고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投獄)되어 일인(一人)에게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받았다. 미 군정시절에 수도경찰청장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외무부 장관 3대 국무총리, 2대 국회부의장 UN총회 한국대표, 반공투쟁위원장. 대일굴욕외교범국민투쟁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향년 77세로 서거(逝去)하였다. 건국(建國)공로(功勞)로 국민장(國民葬)을 거행(擧行)하였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國立墓地)에 안장(安葬)하였다. 담백(淡白)한 기질(氣質)과 명랑(明朗) 강직(剛直)한 성격 청빈(淸貧)한 기풍(氣風), 불굴(不屈)의 자유혼(自由魂) 기지(機智)와 해학(諧謔) 및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헌신(獻身)한 건국(建國)공로자(功勞者)며 위대(偉大)한 정치가(政治家)다.

장건상(張建相) : 자(字)는 찬성(贊成)이고 호(號)는 소해(宵海)이며 참봉(參奉) 장기상(張箕相)의 아들이다. 1882년 12월 19일 인동에서 출생하여 부산에 이주(移住)하여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학과(政治學科)에 입학(入學) 수학(修學)하다가 중퇴(中退)하고 미국 인디아나주 발프레이조대학 법학(法學)과에 입학(入學)하여 1912년 졸업(卒業)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김규식(金奎植)을 만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加擔)하여 동립운동(同)의 첫발을 디뎠다. 임시정부(臨時政府) 외무위원(外務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소련 이루츠크에서 고려(高麗) 공산당(共産黨)에 가입(加入)하여 활동(活動)하다가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의열단(義烈團) 고문(顧問)으로 일본인(日本人)을 살상(殺傷)하기 위한 폭탄(爆彈) 제조(製造)를 지휘(指揮)하였으며 일제(日帝)에 체포(逮捕)되어 상해주재일본영사관과 부산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屈伏)하지 않고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비밀리(秘密裏)에 탈출(脫出)하여 중칭(重慶)의 임시정부(臨時政府) 간부(幹部)로 활동하다가 귀국(歸國)하여 여운형(呂運亨)의 노선(路線)을 지지(支持)하였다. 해방(解放) 후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國會議員)으로 부산에서 무소속(無所屬)으로 출마(出馬)하여 전국4위의 표수를 얻어 당선되었다. 1957년 11월 박정호 간첩(間諜)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구속(拘束)되었으나 무죄(無罪)로 석방(釋放)되고 5.16 직후 구속(拘束)되었으나 박정희(朴正熙)의 배려(配慮)로 병(病) 보석(保釋)로 석방(釋放)되었다. 초대 내각 구성(構成) 시 이승만(李承晩)이 입각(入閣)을 요청(要請)했으나 남한(南韓)만의 단독(單獨) 정부수립(政府樹立)으로 남북(南北)분단(分斷)의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거절(拒絶)하였다. 1974년 5월 14일 서울의 오두막집에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다가 92세로 서거(逝去)하였다. 분단시대에 한 복판에 선 건국(建國) 초기(初期)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사상가(思想家)이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면(張 勉) : 호(號)는 운석(雲石)이고 개(㝏)옹(翁) 장봉한(張鳳翰)의 후손(後孫)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서울대 농생대 전신)를 졸업(卒業)하고 도미(渡美)하여 만하탄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만하탄 시튼홀 포덤 등 각 대학(大學)애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고 귀국(歸國)하여 교육계(敎育界)와 천주교(天主敎)에서 활약했다. 해방 후 정계(政界)에 진출(進出)하여 민주의원 입법위원을 거쳐 제한국회의원에 당선되고 UN총회 한국수석대표, 바디칸 한국 특사 초대주미한국대사. 국무총리를 거쳐 자유당(自由黨)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 시(時) 민주당(民主黨)을 창당(創黨)하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申翼熙)의 런닝메이트로 부통령(副統領)에 출마해 선거도중 신익희는 급서(急逝)하고 부통령(副統領)에 당선(當選)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의 부통령 소외(疏外)로 임기동안 하는 일 없는 부통령으로 임기만 체웠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趙炳玉)의 런닝메이트로 다시 부통령(副統領)에 출마(出馬)했으나 자유당(自由黨)의 3.15부정선거(不正選擧)로 부통령(副統領) 직(職)을 사임(辭任)했다. 4.19혁명(革命) 후 제2공화국에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하의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선출(選出)되어 경제개발(經濟開發)을 위한 장기계획(長期計劃) 등을 구상(構想)해 실천(實踐)하려는 순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가 주도(主導)한 군사(軍事) 혁명(革命)으로 실각(失脚)하고 군사혁명(軍事革命) 정부(政府)에게 정권(政權)을 이양(移讓)하였다. 장면정부(張勉政府)는 자유당(自由黨)과 공화당(共和黨)의 독재정권(獨裁政權) 사이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꽃 피우려는 그의 구상(構想)이 무지(無知)한 한국(韓國)국민(國民)의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기질(氣質)로 유연(柔軟)한 자에게는 강하고 경직된 자에게는 약한 면모(面貌)를 유감(遺憾)없이 발휘(發揮)해 데모 천국(天國)으로 사회혼란(社會混亂)이라는 빌미를 정치(政治) 군인(軍人)에게 제공(提供)해 단군(檀君)이래(以來) 처음 얻은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制度)를 스스로 무덤으로 가게해 역사(歷史)의 발전(發展)을 30년 간 뒷걸음치게 한 책임(責任)이 국민(國民)이냐 장면(張勉)이냐의 역사(歷史)의 심판(審判)을 남기게 한 아쉬운 정치 지도자이다.

장기영(張基榮) : 호(號)는 백상(百想)이고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후손(後孫)이다. 선링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조선일보 한국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박정희 정부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국회의원 공화당 당무위원 남북조절위원장 대리 지내는 한편 대한체육회장 IOC 위원 등을 역임했다. 언론, 정치, 국민보건 분야 발전애 크게 공헌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이다.

장을제(張乙濟) : 직장(直長) 령(令) 동정(同正) 보승장군(保勝將軍) 장표(張豹)의 장자(長子)이다. 태종(太宗) 9년 서기 1409년 봉화현감을 역임했다.

장을해(張乙海) : 직장(直長) 령(令) 동정(同正) 보승장군(保勝將軍) 장표(張豹)의 차자(次子)이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전라도 운봉현감을 역임했다.

장을포(張乙浦) : 직장령 동정 보승장군 장표(張豹)의 삼남(三男)이다.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경상도 청하현감을 역임했다.

장윤문(張允文) : 호(號)는 낙헌(樂軒)이고 현감(縣監) 장을제(張乙濟)의 아들이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대정현감을 역임했으며 왜구(倭寇)의 토벌(討伐)로 00원종공신(原從功臣)에 서훈(敍勳)되었다.

장윤(張 允) : 호(號)는 만은(晩隱) 충찬위(忠贊衛) 장(張)희(希)호(浩)의 아들이다. 명종조(明宗朝)에 창능(昌陵)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선(善)류(類)가 형륙(刑戮)됨을 목견(目見)하고 흥해(興海) 이곡(耳谷)으로 은거(隱居)하여 후진(後進)을 가르치다 종로(終老)하였다.

장은한(張雲翰) : 호(號)는 외암(畏暗)이고 장달삼(張達三)의 아들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학문에 전심하여 성취하였으며 제종(諸宗)과 더불어 칠인정(七印亭)을 중건(重建)하였다. 흥해(興海) 읍지(邑誌)에 실려있다.

장사경(張思敬) : 자(字)는 경부(敬夫)이고 호(號)는 이계(耳溪)이며 외암(畏庵) 장운한(張雲翰)의 아들이다. 문장(文章)이 절륜(絶倫)하여 영남(嶺南) 8대문장의 1인이라 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기삼백연의(朞三百衍義) 오행전(五行傳) 선후정도설(先後天圖說) 등(等)이 있으며 문집(文集) 5권이 있다.

장사덕(張思德) : 자(字)는 순부(順夫)이고 호(號)는 은계(隱溪)이며 외암(畏庵) 장운한(張雲翰)의 차남(次男)이다. 문장으로 당세에 저명하였으며 대구향시에 응시하여 선필자(善筆者)로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장호(張 鎬) : 자(字)는 숙경(叔京)이고 증(贈)통정대부(通政大夫) 장우방(張遇邦)의 아들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응휴(張應休) : 자(字)는 유백(儒伯)이고 호(號)는 유암(由庵)이며 장기(張錡)의 아들이다. 과거(科擧)를 포기(抛棄)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저술(著述)에 힘써 저서로 노논심근(魯論心近)이 있다.

장심학(張心學) : 자(字)는 재중(在中)이고 호(號)는 강해(江海)이며 장사경(張思敬)의 손자(孫子)이다. 철종(哲宗) 3년 서기 1853년 등과(登科)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장(五衛將)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통진부사를 역임했다. 문장력이 뛰어나 사시 픙경가를 지어 상주(上奏)했으며 철종(哲宗)이 명(命)하여 악부(樂府)에 등제(登躋)케 하고 승가(升歌)토록하였으며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선생의 동락서원(東洛書院) 배향(配享) 장계(狀啓)를 제술(製述)하였다. 판서(判書) 장석용(張錫龍)이 묘갈(墓碣) 명(銘)을 짓고 흥해읍지에 실려있다.

장원학(張元學) : 자(字)는 선장(善長)이고 호(號)는 노산(魯山)이며 장응필(張應弼)의 아들이다. 강해선생 통진 출재(出(在) 시(時)에 따라가 정무(政務)를 도우고 유행(儒行)이 있어 향려(鄕閭)에서 추중(推重)하여 광무(光武) 6년 서기 190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장익홍(張翊弘) : 자(字)는 사옥(士玉)이고 호(號)는 소계(小溪)이며 장례학(張禮學)의 아들이다.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인(門人)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염하여 후생(後生)을 훈회(訓誨)하였다. 흥해읍지에 실려있다.

장태흠(張泰欽) : 자(字)는 윤중(允中)이고 호(號)는 취연(翠淵)이다. 장호(張鎬)의 5대손으로 천자영오(天姿穎悟)하고 조취학문(早就學問)하여 면우 곽종석(俛宇郭鍾錫) 회당 장석영(晦堂張錫英門)에서 교유(交遊)하였다.

장덕생(張德生) : 사복경(司僕卿) 장인기(張安起)의 아들로 함안 군수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서울 가산리(駕山里)로 이거(移居)한 후 서제(書齊)를 창건(創建)하고 유생(儒生)에게 학문을 강론(講論)하면서 수도(修道)하다가 종노(終老)하였으며 가산리(駕山里)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장여생(張呂生) : 사복경(司僕卿) 장안기(張安起)의 아들로 서운관(書雲觀) 정(正)을 역임했다.

장천우(張天羽) : 장득선(張得宣)의 후손(後孫)으로 한림(翰林)과 서흥 부사를 역임했다.

장희동(張喜仝) : 서운관(書雲觀) 정(正) 장여생(張呂生)의 아들로 충순위(忠順衛)를 역임했다.

장유보(張有甫) : 부사정(副司正) 장신생(張信生)의 아들로 충순위(忠順衛)를 역임했다.

장흥(張 興) : 군수(郡守) 장덕생(張德生)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장사민(張思敏) : 부사직(副司直) 장흥(張興)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岌)제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장사의(張思義) : 부사직(副司直) 장흥(張興)의 아들로 승의랑(承議郞)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담(張 澹) : 승의랑(承議郞) 장사의(張思義) 아들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장경손(張敬孫) : 부사직(副司直) 장사민(張思敏)의 아들로 000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장무신(張武臣) : 지평(持平) 장담(張澹)의 아들로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장공손(張恭孫) : 부사직(副司直) 장사민(張思敏)의 아들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장근(張 謹) : 지평(持平) 장공손(張恭孫)의 아들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과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장언린(張彦鄰) : 판결사(判決事) 장근(張謹)의 이들로 명종(明宗) 원년 서기 1546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명종 17년 서기 1563년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후 훈도(訓導) 정자(正字)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장응벽(張應璧) : 장백년(張栢年)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역임했다.

장언명(張彦明) : 판결사(判決事) 장근(張謹)의 아들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장운망(張雲望) : 부장(部將) 장응벽(張應璧)의 아들로 첨사(僉使)를 역임했다.

장대중(張大中) : 찰방(察訪) 장언린(張彦隣)의 아들로 예조(禮曹)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장순신(張舜臣) : 자(字)는 우경(虞卿)이고 호(號)는 우헌(愚軒)이며 장회(張淮)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20년 서기 1525년 식년(式年)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교서관(校書館) 권지(權知) 평양(平壤)서윤(庶尹)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을 역임했다. 향리 가산리에 서제를 건립하여 유생들에게 강학(講學)하면서 학문에 전심하였다.

장우신(張禹臣) : 자(字)는 하경(夏卿)이고 장회(張淮)의 이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장호신(張虎臣) : 장회(張淮)의 이들로 향교(鄕校)의 훈도(訓導)를 역임했다.

장식(張 軾) : 서윤(庶尹) 장순신(張舜臣)의 아들로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장범(張 範) : 자(字)는 의중(儀中)이고 참봉(參奉) 장우신(張禹臣)의 아들이다. 명종(明宗) 원년(元年) 서기 1546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명종(明宗) 4년 식년(式年)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 형조정랑 예조정랑 사헌부(司憲府)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함안 군수 재임 5년간 금천서원(琴川書院)을 창건(創建)하고 흥학(興學)에 힘섰으며 서헌(書軒)을 중창(重唱)하고 서중방(西中房)을 중수(重修)하여 믾은 치적(治積)을 남겨 함주지(咸州志) 명신조(名臣條)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선조(宣祖) 원년(元年) 서기 1568년 경상도 도사 재임 시 인동을 다녀간 후 인동장씨 청주보 서문(序文)을 지었다.

장응원(張應元) : 참봉(參奉) 장식(張軾)의 아들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中樞府) 00사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응규(張應奎) : 군수(郡守) 장범(張範)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岌)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했다.

장륜(張 輪) : 참봉(參奉) 장우신(張禹臣)의 아들로 명종(明宗) 원년(元年) 서기 1546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원(張 轅) : 참봉(參奉) 장우신(張禹臣)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장(副將)을 역임했다.

장응운(張應運) : 참봉(參奉) 장식(張軾)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한 후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장응세(張應世) : 참봉(參奉) 장식(張軾)의 아들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응익(張應翼) : 자(字)는 경제(景齊)이고 부장(副將) 장원(張轅)의 아들로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장응진(張應軫) : 참봉(參奉) 장식(張軾)의 아들로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응두(張應斗) : 참봉(參奉) 장식(張軾)의 아들로 광해(廣欬) 5년 서기 1613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취례(張就禮) : 군수(郡守) 장범(張範)의 손자(孫子)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했다.

장유남(張有男) : 수문장(守門將) 장취례(張就禮)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했다.

장옥(張 玉) : 자(字)는 자기(子琦)이며 지평(持平) 장응원(張應元)의 아들로 장사랑(壯士郞)으로 훈도(訓導)를 거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장석지(張釋之) : 직제학(直提學) 장옥(張玉)의 아들로 한성(漢城)좌윤(左尹) 겸 참찬관(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운숙(張運䎘) : 자(字)는 숙거(叔擧)이고 참봉(參奉) 장응익(張應翼)의 아들이다.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역임했다.

장상하(張尙夏) : 자(字) 하경(夏卿)이고 통덕랑(通德郞) 장홍(張泓)의 이들로 영조조(英祖朝) 무신란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장대성(張大成) : 자(字)는 집중(集仲)이고 장만강(張萬綱)의 아들이다. 영조조(英祖朝)에 수직(壽職)으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제수(除授)받았다.

장재학(張載學) : 자(字)는 덕윤(德潤)이고 장석린(張錫麟)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除授)되었다.

장육(張 陸) : 자(字)는 육지(陸之)이고 현감(縣監) 장기건(張紀乾)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8년 서기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중종(中宗)19년 서기 1540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풍저창(豊儲倉) 승(丞), 홍문관(弘文館) 지제교, 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했다.

장천고(張千古) : 자(字)는 민이(敏而)이고 승지(承旨) 장육(張陸)의 아들로 중종(中宗) 29년 서기 1550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호조(戶曹)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장만고(張萬古) : 자(字)는 호이(好而)이고 승지(承旨) 장육(張陸)의 아들로 중종(中宗) 38년 서기 155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경귀(張慶貴) : 호(號)는 서제(西齊)이고 장만고(張萬古)의 아들로 장천고(張千古)에 출계(出系)했다. 장예원(掌隸院) 사의(司議),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역임하고 효의(孝義)덕행(德行)으로 세인(世人)이 추중(推重)하였으며 정암(靜庵) 조(趙光祖) 선생 피화(被禍)시 태학생(太學生) 이약수(李若水), 부제학(副提學) 이사구(李思句), 대사헌(大司憲) 유운(柳雲), 전한(典翰) 정응(鄭膺), 교리(校理) 양팽손(梁彭孫)과 함께 상소(上疏) 시 반유(泮儒)로 참소(參疏)하였다.

장몽윤(張夢尹) : 자(字)는 여형(汝衡)이고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 장경귀(張慶貴)의 아들로 선조(宣祖) 38년 서기 1605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을세(張乙世) : 자(字)는 동중(東仲)이고 장몽설(張夢說)의 아들이다. 사포서(司圃署) 직장(直長)을 역임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戶曹) 참의(參議)에 승서(陞敍)되었다.

장복흥(張復興) : 자(字)는 자영(子纓)이고 장을세(張乙世)의 아들이다.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장진유(張鎭維) : 자(字)는 정보(定甫)이고 호(號)는 현암(玄岩)이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조모(祖母) 우(憂)에 주혈(注血)하고 모병(母病)에 가인(家人)이 칼을 감추니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注血)하고 거우진례(居憂盡禮)하여 봉사극경(奉事極敬) 두문독서(杜門讀書)하여 효행(孝行)과 학업(學業)으로 누등향공(累登鄕貢)하였다. 이 사실이 금구 읍지에 실려있다.

장한진(張漢軫) : 자(字)는 효필(孝必)이고 호(號)는 삼수헌(三秀軒)이며 행제(杏齊) 장석보(張錫輔)의 아들이다. 헌종(憲宗) 원년(元年) 서기 1835년 사마시(司馬試)에 입(立)격하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역임했다.

장한규(張漢奎) : 자(字)는 내서(乃瑞)이고 호(號)는 해초(海樵)이며 행제(杏齊) 장석보(張錫輔)의 아들이다. 헌종(憲宗) 14년 서기 1848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여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역임했다.

장한두(張漢斗) : 자(字)는 사길(士吉)이고 호(號)는 삼수헌(三秀軒)이며 행제(杏齊) 장석보(張錫輔)의 아들이다. 철종(哲宗) 9년 서기 1858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변(內部協辨)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복수(張復秀) : 자(字)는 성유(聖有)이고 호(號) 죽헌(竹軒)이며 장한규(張漢奎)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년 서기 1865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했다.

장관수(張觀秀) : 자(字)는 달수(達叟)이고 호(號)는 송간(松磵)이며 협판(協辦) 장한두(張漢斗)의 아들로 무우옹(無憂翁) 장한방(張漢房)에 출계(出系)했다. 고종(高宗) 4년 서기 1866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장영숙(張榮肅) : 자(字)는 약우(若雨)이고 호(號)는 지호(志瑚)이며 생원(生員) 장관수(張觀秀)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7년 서기 1870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했다.

장영국(張榮國) : 자(字)는 경관(景觀)이고 호(號)는 호은(湖隱)이고 학천(鶴川) 장정수(張鼎秀)의 아들이다. 고종(高宗)11년 서기 1874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진산군수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안군수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장영덕(張榮德) : 자(字)는 윤지이고 호(號)는 호은이며 학천 장정수의 아들이다. 고종 17년 서기 1880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장영직(張榮稷) : 자(字)는 순명(舜命)이고 호(號)는 돈암(敦庵)이며 학천(鶴川) 장정수(張鼎秀)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2년 서기 1885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부사과(副司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통례(通禮) 사예(司藝) 홍문관(弘文館) 시독(侍讀) 등을 역임했다.

장영옥(張榮玉) : 자(字)는 보경(寶璟)이고 호(號)는 해사(海史)이며 장정수(張鼎秀)의 아들로 매헌(梅軒) 장유수(張有秀)에게 출계(出系)했다. 고종(高宗) 25년 서기 1888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秘書監) 승(丞)을 역임했다.

장겸수(張謙秀) : 자(字)는 성익(聖益)이고 호(號)는 운파(雲坡)이며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장한두(張漢斗)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역임했다.

장동수(張東秀) : 자(字)는 방훈(方勳)이고 사인(士人) 장한락(張漢洛)의 아들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비서감(秘書監) 승(丞)을 역임했다.

장영순(張榮淳) : 자(字)는 공빈(公彬)이고 호(號)는 후소(後素)이며 학천(鶴川) 장정수(張鼎秀)의 아들이다. 광무(光武) 5년 서기 1901년 창릉(昌陵)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된 후(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비서감(秘書監) 승(丞)과 봉상시(奉常寺)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장영택(張榮澤) : 자(字)는 문경(文敬)이고 호(號)는 풍헌(風軒)이고 부경(副卿) 장태수(張泰秀)의 아들이다. 광무(光武) 5년 창릉(昌陵)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돤 후(後) 몽은(蒙恩)으로 승훈랑(承訓郞)에 승서(陞敍)되었다.

장복규(張復圭) :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호(號)는 학운(鶴雲)이며 생원(生員) 장영국(張榮國)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22년 서기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入格)하여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 평창 군수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