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최씨,경주최씨시조,경주최씨조상인물,최치원,경주최씨유래

작성일 : 2017-12-31 13:19 수정일 : 2019-11-12 11:40

경주최씨 득성 유래

소벌공(蘇伐公, 일명 蘇伐都利公)은 처음 형산(兄山)에 강림(降臨)하여 돌산(突山) 고허촌(高塘村) 장(長)이 되었다. 당시에 조선(朝鮮: 고조선을 말함) 유민(遺民)들이 동해 바닷가 산곡(山谷)에 흩어져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촌장은 있었으나 아직 임금이 없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甲子) 하(夏) 사월(四月) 병진(丙辰)일에 공(公)이 다섯 촌장들과 같이 신라(新羅)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개국하였다. 「소벌공사적(蘇伐公事蹟)」에 의하면 개국좌명(開國佐命)의 공(功)으로 고허촌(高墟村)은 사량부(沙梁部)로 승격되고, 공은 촌장에서 대인(大人)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유리왕(儒理王) 9년(壬辰)에 6부에 각각 성(姓)을 하사(下賜)했는데 이때 사량부(沙梁部)에는 최씨 (崔氏)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소벌공(蘇伐公)은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가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甲子) 4월 병진(丙辰)일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니 이 때에 나이 13세였으며, 국호는 서라벌(徐羅伐)이라 칭하였다.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 산곡 간에 나뉘어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하나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요, 둘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요, 셋은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요, 넷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요, 다섯은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요, 여섯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이들이 진한(辰韓)의 육부(六部)이다.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하루는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옆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소리내고 울고 있는지라 가까이 가서 보니 홀연히 말은 간데없고 큰 알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알을 가르니 그 안에서 어린 아기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기를 안고와 길렀는데 나이 10여세에 이미 숙성)하였으므로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기이 하여 높이 받들다가 이때 이르러 임금을 삼았다. 신라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각각 성 (姓)올 하사하니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고치고 이씨(李氏)를 하사했으며, 고허부(高墟村)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최씨(崔氏)를 내렸으며,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潮梁部)로 고치고 손씨(孫氏)를 하사했으며, 우진부(于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정씨(鄭氏)를 하사했으며, 가리부(加利部)는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씨(裵氏)를 하사했으며,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설씨(薛氏)를 하사하였다."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사로(斯盧)의 6촌(村)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 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세거(世居)해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 거족(名門巨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정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 제도가 실시되면서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857년(신라 헌안왕 1) 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출생했던 고운(孤雲)은 어려서부터 총명(聰明)․민첩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했다. “10년 안에 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12세 때 혼자 당(唐)나라에 건너가 18세에 빈공파(賓貢科)에 금방(金榜 : 장원)하여 선주(宣州) 율수(凓水) 현위(縣尉)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治積)을 쌓아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 받았다.

879년(헌강왕 5) 당(唐)나라 반적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했던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는데 그 격문에 이르되 “…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赤地中之鬼 巳議陰誅)”고 하였으니 반적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만큼 가슴을 꿰뚫는 세찬 힘을 지닌 글로서 천하를 감탄시킨 명문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과「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계원필경(桂苑筆耕)」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했으며, 884년(헌강왕 10)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僖宗)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당시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함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태산(太山 : 태인)․함양(咸陽)․부성(富城 : 서산)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진성여왕 8)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嘯風弄月)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 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新羅人)으로서 당나라 명사(名士)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고운(顧雲)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詩)가 있는데 여기에는 고운이 당나라에서의 명성과 활약상을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듣건대 바다위에 황금자라 셋이 있어,

머리에는 높고 높은 산을 이고 있는데,

산위에는 주궁(珠宮), 패궐(貝闕), 황금전(黃金殿),

산 아래는 천만리 넓은 물결일세.

그 곁에 일점 푸른 계림(鷄林) 땅에,

자라산 빼어난 기운 기이한 인물 태어났구나.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그 문장이 중화를 감동시켰고,

18세에 전사원에서 한번 쏜 화살이

금문책을 깨쳤구나.“

이 한편의 시(詩)를 통해서 중원을 주름잡던 고운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남긴 심오한 문장은 깊은 함축 속에 많은 뜻을 간직하여 우리 한문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컫어지고 있다.

조선(朝鮮) 전기의 문장가로 알려졌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계원필경을 봄에 아직도 알지 못할 곳이 있으니 당시의 기풍이 이처럼 놀라왔음은 아직도 이 땅의 문장이 일찍이 예와 같지 않음이로다.>라고 했다.

성종(成宗)때의 대문호였던 성 현(成 俔)은 그의「용재총화(慵齋叢話)」에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비롯된다.(我國文章如發於崔致遠)>고 쓰여 있고, 또 효종(孝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學者) 홍만종(洪萬宗)은 그의「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최치원의 시는 격률이 엄격하고… 표현에 뜻이 깊은 함축이 있어 직접적 표현 대신 끊이지 않는 여운이 있다.” 라고 평했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鷄林黃葉 鵠嶺靑松)”고 말하여, 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高麗) 건국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使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後)로 증시(贈諡)하였다.

조선(朝鮮)때 와서는 인조(仁祖)․명종(明宗)․선조(宣祖)가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嫡庶)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한편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太祖 : 왕조)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露 : 시조 고운의 손자, 원보 은함의 아들)는 나이 겨우 열두 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盆)을 하사(下賜)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사(學士)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를 배우게 하였다.

그 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太祖)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積弊),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 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偶像)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개국공신 후손의 등용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文昌後)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계림군파(鷄林)君派)․충렬공파(忠烈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문밀공파(文密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혀오고 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익재(益齋) 이제현(李劑賢)의 고제(高弟)로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청(淸)은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치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新主) 감무관(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공민왕 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때 사복시(司僕寺) 정(正)이 되어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귀(權貴)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楊州) 풍양(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組)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 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 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 때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左贊成)”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劑顔)의 증손이며 고려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鷄林君)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 : 제안의 현손)는 고려 명종(明宗)때 왜적(倭賊)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내사령(內史令)에 이르러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정랑공(正郞公) 호(號)는 고려 정종(定宗)때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 : 밀적공 선지의 5세손, 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아홉 살에 시(詩)를 지었던 문정공(文正公) 해(瀣)는 원(元)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내고 귀국한 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아 벼슬에 있는 동안 기복(起伏)이 많았으나 조금도 지절을 굽히지 않았고,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당대의 문호(文豪)로 명망을 떨쳤다.

문창후(文昌後)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관직을 거치면서 치적(治績)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5세손 형손(亨孫)은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종질 호(號)는 무과에 장원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 균(元 均)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란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鷄城君)에 추봉되어 가문에 공신(功臣)의 맥(脈)을 이었다.


화숙공 현우(玄祐)의 7세손으로 성종(成宗)때 문과에 급제했던 숙생(淑生)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고, 인조(仁祖)때의 명장 진립(震立)과 정묘호란에 순절한 몽량(夢亮)은 경주 최씨의 <쌍의(雙義)>로 가문에 절맥(節脈)을 이었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했던 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늙었다는 이유로 근왕(勤王)하는 장수를 바꾸려 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종하는 후미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하자 노장(老將)은 용인 험천(龍仁險川)에서 순절했는데,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며, 화살이 다 되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하고는 끝까지 항전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을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이 자약했다고 한다.

늘 한쪽 눈에 반(半)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은 특히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리웠으며, 팔도를 주유(周遊)하다가 금강산(金剛山)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밖에 정조(正祖)때 효행(孝行)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던 흥원(興源)과 시집(詩集)을 남겼던 소(昭)를 비롯한 그의 손자 성효(性孝)가 뛰어났으며, 동학교조(東學敎祖)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경주 귀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득도(得道)하여 동학(東學)을 창설했고, 제병장생(濟病長生)을 토대로 하여 이 세상(世上)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 부족언(不足言)이라 하고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주장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 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표현했으며, 종수(宗秀)의 아들 시형(時亨)은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이름났었다.

한말(韓末)에 경향(京鄕)의 선비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던 대원군(大院君)의 정책을 탄핵하고 일생을 대절(大節)로 살다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을 지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며, 항일 구국 항쟁의 최선봉에 나섰던 한말 최대의 거유(巨儒)였다.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했던 면암(勉庵)은 고종(高宗)때 장령(掌令)을 거쳐 호조 및 공조 판서(戶曹․工曹判書)와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내고,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우리민족이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궐기와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고 하여 전 국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국가 패망의 때를 당하여 여러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결심하고 의기(義旗)를 높이 들어서 싸우고자 한다.”는 거의소(擧義疏)를 채택했다.

“백발이 휘날리어 밭이랑에 드날림은(皓首奮畎)

초야의 충심을 바치려 함이로다(草野願忠心)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할 일(亂賊人皆討)

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요(何須問古令)“

이 시는 당시에 면암이 지은 시(詩)로서 구절마다 애국 충성의 염이 가득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일제는 끝내 굽힐 줄 모르는 면암의 충절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마도 위립영(對馬島衛立營)으로 귀양 보내어 단발을 강요했으나 그는 단식으로 대항하며 제자 임병찬(林柄贊)에게 유소(遺疏)를 구수(口授)하였는데, 왕으로 하여금 오직 영구히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을 예언했고, 자기는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이 모두 적의 공급에 의한 것이므로 단식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이 74세이니 죽는 것이 조금도 애석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면암집(勉庵集)」에 전한다.

1906년(광무 10) 10월 수비대장으로부터 면암에 대한 식비가 한국 정부의 부담이라는 말을 듣고 계속하던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단식으로 병을 얻어 그해 11월 5일에 대마도 병영에서 서거하니 그의 한 많은 일생과 신념으로 일관되었던 생애가 종결되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의 자질문인(子姪門人)은 물론 상무사원(商務社員)을 비롯한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부두에 나와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 이란 조기를 높이 들고 통곡하였다.

「면암집 (勉庵集)」에 남긴 다음 시(詩)는 돌아가신 1906년(광무10, 丙午) 원단(元旦)에 쓴 것으로 추상(秋霜) 같은 절개가 후인(後人)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 북녘보고 임금님께 세배(歲拜)드리니

흰머리 오랑캐 옷에 분한 눈물 흐르는구나

만 번을 죽더라도 진(秦)나라 부귀 탐하지 않음은

한평생 노(魯)나라 「춘추(春秋)」를 읽었음일세"


그 밖의 인물로는 일본의 과중한 과세에 항거했던 봉환(鳳煥)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世宗大王紀念事業會)를 만들어 우리나라 한글 발전에 공헌했던 외솔 최현배(崔鉉培), 독립운동가인 창식(昌植)등이 학문과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경주최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남한(南韓)에 총 945,0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최치원(崔致遠) 857(신라 헌안왕 1)~951년(고려 광종2)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候). 신라(新羅)의 서울 사량부(沙梁部 : 삼국유사에는 본피부라고하며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부근에 있다고 기록함)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정밀․민첩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서기 874년(경문왕 14) 한번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위(宣州 凓水縣慰)의 벼슬에 올랐다.

877년(헌강왕 3) 치적(治績)으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使) 내공봉(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 :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구)를 하사(下賜)받았다. 879년(헌강왕 5) 당(唐)나라 반적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병(高騈 : 당나라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抄)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 돌아와서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받고 당(唐)나라에서 쓴「계원필경(桂苑筆耕)」과「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및 시부(詩賦) 3권을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이 어지러 움으로, 문란한 국정을 개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自請)하여 태산(전북 태인)․부성(충남 서산)등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나라가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시정의 수습책)을 상소하여 아찬(阿湌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관직)의 벼슬을 받았다.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당나라에 가서 익힌 학문과 도학은 때를 만나지 못해 마음껏 펴 보지 못함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산천(山川)과 해변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 삼아 학문에 심취하며 풍월(風月)을 즐기며 유랑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 식솔(食率)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동복(冬服) 형(兄) 현준(賢俊) 승려 정현(定玄)과 도(道)로써 우정을 나누다가 여생을 마쳤다.

1020년(고려 현종 11) 8월 내사령(內史令)에 증직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그 뒤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최언위(崔彦撝) 868(신라 경문왕 8)~944(고려 혜종 1) 초명은 신지(愼之)․인곤(仁滾), 시호(諡號)는 문영(文英). 885년(헌강왕 11)에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909년(신라 효공왕 13)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서서원 박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신라(新羅)가 망하고 고려가 개국되자 935년(태조 18) 태자 사부가 되고 문한(文翰)을 거쳐 원봉성 태학사(元鳳省太學士)․한림원령․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77세로 사망하자 시호(諡號)와 함께 정광(正匡)에 추증되었다.

글씨와 문장(文章)이 뛰어났고, 유필로 낭원대사오진탑비(郎圓大師悟眞塔碑)․법경대사자등지탑(法鏡大師慈燈之塔) 등이 있다.

최은함(崔殷含) 신라(新羅)때 원보(元甫)를 역임하였다.

최승우(崔承祐) 서기 890년(신라 진성여왕 4) 당(唐) 나라에 건너가 국학(國學)에 입학, 3년간 공부하여 빈공과(賓貢科 : 당나라 과거제의 1과)에 급제하고 귀국했다. 문장에 능하여 저서로 「호본집(餬本集)」이 있고, 후백제(後百濟)의 시조인 견훤(甄萱)을 위하여 격서(檄書)를지어 고려(高麗)에 보냈다. 최치원(崔致遠)․최언위(崔彦撝)와 더불어당대의 삼최(三崔)로 일컬어 졌으며, 시(詩) 10수(首)가 전해진다.

최승로(崔承老) 927(고려 태조 10)~989(성종 8)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신라의 원보(元甫) 은함(殷含)의 아들. 12세에 논어(論語)를 읽는 것을 태조(太祖)가 보고 원봉성(元鳳省) 학사에 올렸다.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982년(성종 1) 왕명에 의해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엄금. 공역(貢役)의 균등,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의 시정 및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토호(土豪 : 지방에 웅거하여 재산과 세력이 있는 호족) 들의횡포에 의한 세공 수납의 피해를 시정토록하여 12목(牧)을 설치, 목사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어 갔다. 988년(성종 7)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벼슬에있는 동안 임금에게 올린 청(請)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63세로 사망하자 왕이 매우 슬퍼하며 태사(太師 : 임금의 고문, 국가 최고의 명예직)를 추증하였다.

최양(崔 亮) ?~995(성종 14) 시호(諡號)는 광빈(匡彬). 광종(光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으며, 성종(成宗) 즉위 전에 사우(師友) 관계에 있었으므로 즉위하자 특별히 등용돼 여러 벼슬을 거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참지정사(參知政事) 겸 사위경(司衛卿)에 이르러 병고로 사직 하였다가, 다시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임명되었고 내사시랑(內史侍郞) 겸 민관어사 동내사 문하평장사(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그가 사망했을 때 왕이 그의 죽음에 애도하여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추증(追贈)하였고, 다시 태위태보태사 내사령삼중대광(太尉太保太師內史令三重大匡)에 추증하였다.

최광윤(崔光胤) 평장사(平章事) 언위(彦撝)의 아들. 진사과에 합격하고진(晋)나라에 유학을 가던중, 거란족(契丹族)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재주를 인정받고 거란에서 관리(官吏)가 되었다.

이때 거란이 고려에 공격을 계획하고 있음을 정종(定宗)에게 보고 함으로써, 정종(定宗) 2년 서경(西京)에 왕성(王城)을 쌓고 30만 대군으로 광군사(光軍司)를 창설하여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게끔 하였다.

최숙(崔 肅) 고려(高麗)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최항(崔 沆) 972(광종 23)~1024(현종 15) 자(字)는 내융(內融), 시호(諡號)는 절의(節義), 평장사(平章事) 언위(彦撝)의 손자(孫子), 광윤(光胤)의 아들. 서기 991년(성종 10)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왕의 아낌을 받고 우습유(右拾遺)․지제고(知制 誥)등을 거쳐, 1009년(목종 12)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30여년간 폐지 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케 했다. 1012년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검교태부(檢校太傅)․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청하현 개국후( 淸河縣開國侯)가 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 청렴결백했으며, 불교(佛敎)를 깊이 신봉했고, 현종(顯宗)의 묘정 (廟廷)에 배향, 정광(正匡)에 추증, 시중(侍中)에 가증되었다.

최원신(崔元信)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양(亮)의 아들. 994년(성종 13)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012년(현종 3)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사신이 되어 거란(契丹)에 다녀왔다. 1019년(현종 10)에 예빈경(禮賓卿)으로 이수화(李守和)와 함께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으나, 사신으로서 국위를 손상시켰다 하여 유배 당했다.

최제안(崔齊顔) ?~1046(정종 12) 시호(諡號)는 순공(順恭), 승로(承老)의 손자. 1020년(현종 11) 천령사(千齡使)로 거란(契丹)에 다녀온 후 1034년(덕종 3) 호부 상서(戶部尙書)가 되고, 이해 정종(靖宗)이 즉위하자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그 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등을 역임하고, 뒤에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문종(文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최방언(崔邦彦) 자(字)는 성언(誠彦). 고려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최임(崔 琳) 고려조에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역임하였다.

최문훈(崔文勳)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최상훈(崔尙勳) 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최여해(崔汝諧) 1101(숙종 6)~1186(명종 6)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울주판관(蔚州判官)으로 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좌정언(左正言)․지제고(知制誥)에 특진되고, 이어 시어사(侍御史)․보문각 대제(寶文閣大制)를 거쳐 1176년 간의대부(諫議大夫)․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감시(監試)를 맡았다. 77세에 추밀원사(樞密院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최송년(崔松年) 완산(完山) 출신. 어릴 때 완산의 수령이었던 시랑(侍郞) 박춘려에 의해 최적경(崔陟卿)․최 균(崔 均)등과 함께 문동(文童)으로 뽑혔으며, 모두 문장(文章)으로 일가를 이루어 뒤에 최척 경․최 균과 함께 완산(完山)의 3최(三崔)로 불리었다.

최애(崔 藹) 고려(高麗)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최백륜(崔伯倫) 1282년(충렬왕 8)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민부 의랑(民部議郞)에 있으면서, 원(元)나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의 직(職)을 받았다.

최광위(崔光位)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때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내사령(內史令)을 지내고 계림부원군(鷄林部院君)에 봉해졌다. 충렬공파(忠烈公派)의 파조(派組).

최현우(崔玄祐) 호(號)는 화숙(和淑). 고려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화숙공파(和淑公派)의 파조(派組).

최해(崔 瀣) 1287(충렬왕 13)~1340(충혜왕 복위 1) 자(字)는 언명부(彦明父)․수옹(壽翁), 호(號)는 졸옹(拙翁)․예산농은(猊山農隱).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1320년(충숙왕 7)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병을 핑계하고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檢敎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총명하여 9세의 어린나이로 시(詩)를 지었으며 뜻은 높았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만년(晩年)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을 써서 본국 명현(名賢)의 시문(時文)을 뽑아 25권을 편수하고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 이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며 사람의 선악을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사람의 미움을 받아 처세에 기복(起伏)이 많았다. 저서에는「졸고천백」이 있다.

최제(崔 堤) 시호(諡號)는 문밀(文密), 소감(少監) 인지(仁祉)의 아 들. 고려(高麗)때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문밀공파(文密公派) 의 파조(派組)이다.

최관(崔 灌) ?~1152(의종 6) 1129년 병부 낭중(兵部郎中)으로 천청 절사(天淸節使)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서기 1145년(인종23) 추밀원사(樞密院使)․판삼사사(判三司使)․상서우복야를 거쳐 의종(毅宗)초에 평장사에 올랐다.

최광우(崔光祐) 고려(高麗)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지냈다.

최습(崔 隰) 고려(高麗)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최잉(崔 陾) 고려조(高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최주(崔 周) 고려(高麗)때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지냈다.

최청(崔 淸) 1344 (충혜왕 복위 5)~1414(조선 태종 14) 자(字)는 직재(直哉), 호(號)는 관가정(觀稼亭),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인(門人). 1360년(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 정당문학시랑(政堂文學侍郞)을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다.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감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했으며 신 돈(申 旽)의 지나친 적폐(積幣)를 과감하게 지적, 탄핵상소(彈劾上疎)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 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다가 13 74년(공민왕 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382년(우왕 8)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명(明)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홍무(洪武)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았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양주 풍양(楊洲豐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하자 이성계(李成桂)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그를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까지 지켜 이를 거절하자 태조(太祖)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살던 모옥에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최강(崔 江) 호(號)는 초은(樵隱). 고려(高麗)때 여러 청환직(淸宦織)을 거쳐 판사(判事)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사직(辭職)했다. 조선 태조(太祖)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여주(驪州) 계림동(桂林洞)에 퇴거(退居)하며 여생을 보냈다.

최첨로(崔添老) 호(號)는 석계(石溪). 고려말(高麗末)에 정치(政治)가 문란하고 기강이 흐트러지자 종제(從弟) 이(邇)와 함께 여러 차례 간(諫)했으나 실행되지 않으므로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최이(崔 邇) 호(號)는 돈옹(돈翁). 고려말(高麗末) 온수감무(溫水監務)를 지내다가 정지(政治)가 문란해지자 이를 간(諫)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종형(從兄) 첨로(添老)와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최단(崔 鄲) 시호(諡號)는 광정(匡靖).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때 안동 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했으며 창왕 즉위 후 경상도 도순문사 (慶尙道都巡問使) 박 위(朴 葳)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1390년(공양왕 1)에 한양윤(漢陽尹)에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를 지냈고 1392년(태조 1)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種功臣)이 되었으며, 앞서 회군의 공으로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광정공파(匡靖公派)의 파조(派組).

최홍기(崔弘基) 1339(충숙왕 복위 8)~? 자(字)는 원지(遠之), 문밀공파조(文密公派組) 제(堤)의 손자(孫子). 1359년(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이 일어나 서경(西京)을 침범하자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난을 토평한 공으로 공신(功臣)의 녹훈(錄勳)이 되고, 원보(元甫)에 이르러 1383년(우왕 9) 요동(遼東)의호발도(湖拔都) 양수척(揚水尺)을 대파(大破)하는데 공(功)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최호(崔 澔) 1042년(정종 8) 동경(동경 : 경주) 부유수(副留守)로 왕명에 의하여 전(前)․후한서(後漢書)와 당서(唐書)를 새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불서(佛書)로 이외의 전적(典籍)으로 처음 간행한 것이다. 이 공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서기 1045년(정종 11)에는「예기정의(禮記正義)」80권과「모시정의(毛詩正意)」40권을 간행하였다.

최예(崔 汭) 조선(朝鮮)때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사성공파(司成公派)의 파조(派組).

최유종(崔有悰) 조선(朝鮮)에서 정언(正言)을 지냈다.

최효손(崔孝孫) 조선조(朝鮮朝)에서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최문손(崔文孫) 조선(朝鮮)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최한경(崔漢卿) 자(字)는 언보(彦輔).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최정(崔 釘) 조선(朝鮮)때 정자(正字)를 역임했다.

최진(崔 鎭)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최아(崔 涐) 조선조(朝鮮朝)에서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최영한(崔亨漢) 조선(朝鮮)때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최경지(崔敬止) ?~1479 (성종 10) 자(字)는 화보(和甫), 정랑(正郞) 유부의 아들. 1460년(세조 5)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1466년 지평(持平)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 부응교(藝文館副應敎) 지제교 겸 시독관으로 춘추관 편수에 임명되어「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470년(성종1)「예종실록(睿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476년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79년 직제학(直提學)으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했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사망했다.

최숙생(崔淑生) 1457(세조 2)~1520(중종 15) 자(字)는 자진(子眞), 호(號)는 충재(盅齋), 현우(玄祐)의 7세손, 철중(鐵重)의 아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1496년(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504년(연산군 10) 응교(應敎 : 정4품)로 있을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신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1508년 문신정시(文臣廷試)에 장원하여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고 1518년(중종 13) 우산성(右贊 成)에 올랐으나,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파직 되었다가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최긍(崔 兢) 1438(세종 20)~? 자(字)는 긍신(兢愼), 문밀공(文密公) 제(堤) 8세손 각(珏)의 아들. 세조(世祖)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명천 현감(明川縣監)을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여 후진양성에 전심하던 중,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평소 이 주(李 冑)․최 부(崔 溥)등과 친교(親交)가 있다하여 추긍당하자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忠淸道)로 피난하였으며, 중종(中宗)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추증되었다.

최상정(崔尙貞) 1460년(세조 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의 참군(參軍)을 지냈다.

최우강(崔佑江) 1480년(성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였다.

최항열(崔恒烈) 1392(태조 1)~? 자(字)는 윤수(允守), 문밀공(文密公)의 제(堤) 5세손 학령(學齡)의 아들. 1415년(태종 15)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남 정평 부사(咸南定平府使)를 역임하며 선정(善政)하여 나라에서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최한홍(崔漢洪) 조선(朝鮮)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최운(崔 雲) 자(字)는 자용(子龍). 조선(朝鮮)에서 사도시정(司導寺正)을 역임했다.

최한정(崔漢禎) 조선(朝鮮)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최응허(崔應虛) 자(字는) 공진(拱辰). 조선(朝鮮)때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득하(崔得河) 조선 성종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위부 사맹(龍衛府司猛)을 지냈다.

최삼택(崔三宅) 자(字)는 임향(任鄕).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최호(崔 湖) ?~1597(선조 30)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76년(선조 9) 무과중시(武科重試)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1594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서 야인(野人)에게 감파보(甘坡堡)를 함락당하여 견책을 받았다.1596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평정에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 균(元 均)등과 함께 패사(敗死) 했다.

1604년(선조 37) 앞서 이몽학의 난 때의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 臣) 2 등에 추록(追錄)되었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최중복(崔仲福) 1539(중종 34)~1592(선조 25) 자(字)는 겸오(兼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흥의(興義)의 아들. 1582년(선조 15)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무관직(武官織)을 거치고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이해에 벌진 한산대첩(閑山大捷)에서 전사했다.

최동보(崔東輔) 자(字)는 자익(子翼), 호(號)는 우락재(憂樂齋), 대구(大邱)에서 출생하여 서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부 (仲父) 최 인(崔 認)의 계부(季父 : 아버지의 막내 동생)인 최 계(崔誡) 및 장몽기(張夢紀)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경산(慶山)․경림(慶林)․영천(永川)등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그 당시의 상황을 일기로 적어「신협기(神篋記」를 썼다. 후에 호조 참판에 추증되고, 대구의 평천사(平川祠)에 제향되었다.

최봉천(崔奉天) 1564(명종 19)~15979선조 3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카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각처에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그 공(功)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특진하였고 경상 우후(慶尙虞侯)가 되어 선무(宣武)의 공에 책록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가동(家僮 : 집안 심부름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영천창암(永川倉岩)의 싸움에서 격전 끝에 전사했다.

최진립(崔震立) 1568(선조 1)~1636(인조 14) 자(字)는 사건(士建), 호(號)는 잠와(潛窩), 시호(諡號)는 정무(貞武), 신보(臣輔)의 아들. 1594년(선조 27)에 무과(武科)에 급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 명을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하고 이어 권 율(權 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大勝)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경기도수군절도사로 3도 통제사를 겸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경흥 부사(慶興府使)․공조 참판(貢租參判)을 지냈다.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636년(인조 14)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서 적의 대군(大軍)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죽은 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최계종(崔繼宗) 자(字)는 경승(慶承), 정무공(貞武公) 진립(震立)의 동생.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내고,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국효(國孝)”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최동로(崔東老) 자(字)는 안중(安仲).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최헌상(崔獻祥) 현령(縣令) 한조(漢祚)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려 상경(上京),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렀다가 진격해온 적군을만나 분전하다가 생포되어 죽었다.

최계(崔 誡) 1567(명종 22)~1622(광해군 14) 자(字)는 사훈(士訓), 호(號)는 태동(苔東), 내금위(內禁衛) 종옥(宗沃)의 아들. 1591(선조 24) 무과(武科)에 급제, 현령(縣令)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규합,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光海君)때 대북(大北)의 전횡(專橫)이 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隱居)하였다가 죽은 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최인(崔 認) 조선(朝鮮)때 의병장(義兵將)을 역임하였다.

최몽량(崔夢亮) 1595(선조 28)~1627(인조 5) 자(字)는 계명(啓明), 시호(諡號)는 충의(忠毅)․병마절도사 인(隣)의 증손, 확(確)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진사(進仕)가 되고, 161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25년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종현(鐘峴)에서 독전 중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의주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최시환(崔時煥) 자(字)는 문약(文若).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최시우(崔時遇) 자(字)는 형숙(亨叔).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진남(崔鎭南) 자(字)는 자중(子重). 조선 때 목사(牧使)을 역임하였다.

최준리(崔峻履) 조선(朝鮮)에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최북(崔 北) 초명은 식(埴), 자(字)는 성기(聖器)․유용(有用), 호(號)는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숙종(肅宗)․영조(英祖)때의 화가로서 특히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리었으며,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팔아가며 전국을 주유(周遊),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 시(時)에도 뛰어났으며, 49세로 한양에서 죽었다.

최국성(崔國成) 시호(諡號)는 울진(蔚珍). 조선(朝鮮) 인조(仁祖)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창좌(崔昌佐) 자(字)는 위수(渭叟). 조선(朝鮮)때 통덕랑(通德郞)에이르렀다.

최사건(崔思建) 자(字)는 성집(聖集).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최심건(崔心建) 자(字)는 성회(聖晦). 1732년(영조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역임했다.

최흥원(崔興源) 자(字)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號)는 칠계(漆溪)․백불암(百弗暗). 경북 대구 출생으로 1778년(정조 2)에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거쳐 1782년(정종 6)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가 되고1800년(정조 24) 세자익위사 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학문이 뛰어 났으며 저서에는 백불암 언행록(百弗庵言行錄)이 있다.

최상주(崔尙柱)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목포 수군만호(木浦水軍萬戶)를 지냈다.

최세걸(崔世傑) 자(字)는 문중(文仲). 조선조(朝鮮朝)에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최세규(崔世奎) 자(字)는 광단(匡端). 조선(朝鮮)때 통덕랑(通德郞)에이르렀다.

최세주(崔世株) 자는 평중(平仲), 호는 서호(西湖). 조선 때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최태성(崔泰晟)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최창문(崔昌文) 조선(朝鮮) 정조(正祖)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최상익(崔商翼) 1631(인조 9)~1699(숙종 25) 자(字)는 성백(成伯), 첨지(僉知) 순(淳)의 아들. 1660년(현종 1) 문과에 급제하고 당후(堂後)에 들어갔다가 1667년 전라도사로 부임, 감사 민 점(閔 點)의 부정 사실을 들러싸고 반목이 심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정언(正言)에 있을 때 송시열․송준길을 무고한 서필원(徐必遠) 일당과 맹령한 논쟁을 한 일이 있었다. 1684년(숙종 10)에 안변현감(安邊縣監)으로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99년에 충청(忠淸) 감사가 되어 술선수범하여 법을 지켰다 한다. 병으로 사임했다.

최임(崔 琳) 1779(정조 3)~1841(헌종 7) 초명은 영(瀯), 자(字)는 찬부(贊夫), 호(號)는 외와(畏窩), 종륜(宗崙)의 아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많은 제자(弟子)를 길러냈다. 육경(六經)․음양술(陰陽術)․병서(兵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했고, 저서(著書)에는「외와집(畏窩集)」이 있다.

최진(崔 鎭) 조선(朝鮮)때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최치덕(崔致德) 1709(숙종 35)~? 자(字)는 도겸(道兼), 수사공(水使公) 긍(兢)의 11세손. 영조(英祖)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일어나자 소년 순장(少年巡將)으로 난을 토평하는데 공(功)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을 지냈다. 1774년(영조 50)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최수환(崔壽煥) 조선(朝鮮) 순조(純祖)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사도진 수군첨절제자(蛇渡鎭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최중태(崔重泰) 자(字)는 중여(重如). 조선(朝鮮)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최경식(崔慶湜) 자(字)는 여선(汝善).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명상(崔命相) 자(字)는 자랑(子良).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남두(崔南斗) 조선(朝鮮)때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최경노(崔慶老)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진하(崔鎭夏) 조선(朝鮮)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최유태(崔裕泰)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을 역임하였다.

최제우(崔濟愚) 1824(순조 24)~1864(고종 1) 아명(兒名)은 복술(福述), 호(號)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본래 몰락한 양반의 출신으로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때 아내의 고향인 울산(蔚山)에 내려가 무명 행상(行商)을 직업으로 전국의 각처를 돌아다녔다. 1855년(철종 6)부터 양산군천성내원암(梁山郡千聖內院庵)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1860년(철종11) 4월 천주(天主) 강림의 도(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설하였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입(北京侵入)사건이 있었고, 그 여파로 우리 나라에 대한 열강(列强)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를 조성하였다.

특히 서학류(西學 : 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우리 나라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자 최제우의 머리에는 이들이 시대적 울안으로 반영되어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고유의 신앙으로 새 종교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교리는 제병강생(濟病長生)을 토대로하여 동양적인 유불선(儒彿仙)의 정신을 참작, “인내천(人乃天)”, “천심 즉 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을 주장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시앙을 표현한 것이었다.

동학은 구미(歐美), 일본(日本)의 침략과 정부이 압제로 인하여 농민 사 이에 급속히 파급되고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 많이 전파하여 후일 동학난을 일으키는 주체가되었다.

1863년(철종 14) 정부는 동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최제우를 체포, 이듬해 3월 대구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하였으나 1907년(융희 1)에 그의 죄가 신원(伸寃)되었다.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1898(광무 2) 초명은 경상(慶翔), 호(號)는 해월(海月), 종수(宗秀)의 아들. 조선말기(朝鮮末期) 동학(東學)의 제 2대 교주(敎主).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다가 1861년(철종 12)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그 후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등지로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없이 교조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民亂)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少白山)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寧越)을 거쳐 인제(麟蹄)에 가서「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丹陽)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등 경전(經典)을 완성,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 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이 숙청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자, 이듬해 2월 제 2차 신원운동을 전개,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하여 각 도의 동학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報恩)의 대도소(大刀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는 한편, 교조의 신원과 부패․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언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琒準)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 북접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公州)에서 싸워 참패, 논산을 거쳐 장수(長水)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永同)․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原州)에서 송경인(宋敬仁)에게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伸寃)되었다.

최석민(崔錫敏) 1858(철종 9)~1915 1894년(고종 31) 의정부 주사(議政府主事)가 되고, 이듬해 내각주사(內閣主事)․평양부참사관(平壤府參事官)을 거쳐 통진(通津)․홍원(洪原)․시흥(始興)등의 군수(郡守)를 지냈다. 1905년(광무 9) 법무 참사관에 전임 이어 민사국장(民事局長)을 거쳐 내부(內部)의 경무국장(警務局長), 지방국장, 협판(協辦)을 역임했다. 1907년 (융희 1)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 내장원경 등을 지냈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 의해 (男爵)이 되었다. 그 후 제실심사회 회장, 임시재산정리국 사무촉탁을 지냈다.

최익현(崔益鉉) 1833(순조 33)~1906(광무 10) 자(字)는 찬겸(贊兼), 호(號)는 면암(勉庵). 경기도 출생.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 : 제자 중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남).조선(朝鮮)의 정치가(政治家)로 배일파(排日派)의 거두(巨頭). 유림(儒林)의 명사로 문도(門徒) 수천 명을 헤아렸다.

1855년(철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868년(고종 5)에 장령(掌令)을 거쳐 1873년 11월(고종 10)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상소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귀, 서원(書院)을 폐지하는 등 대원군(大院君)의정책을 탄핵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한일 통상을 반대하여 정배(定配 : 배소를 정해 죄인을 유배시킴)되고, 후에 특사(特赦)를 받아1894년(고종 31)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임명되었다.

그해 김홍집(金弘集)이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어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義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 관찰사등을 임명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1905년(광무 9) 11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여 전라도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하여 거절하므로 임병찬(林柄贊)등의 권고도 듣지 않고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밥을 먹고 살겠느냐, 너희들이나 살아서 돌아가 나라를 구해라” 하며 단식하다가 병(病)을 얻어 죽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저서(著書)에는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최석호(崔錫浩) 조선(朝鮮) 고종(高宗)때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을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최봉환(崔鳳煥) 평남 순천(順川)에서 직물상을 경영하던 중 1909년(융희 3) 일본이 과중한 납세를 요구하자 상인들을 규합, 납세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어 항구적인 납세거부 투쟁을 위해 상무회(常務會)를 조직, 회장으로서 상인들의 행동을 통일하여 철시(撤市)등으로 일제의 납세정책에 대항했다.

이듬해 1월 일본인 세무서 주사(主事) 노자와가 일본 경찰을 동원, 강제로 세금 징수를 단행하자 상인들을 지휘하여 이들에게 항거, 주재소(駐在所)에 방화하고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했다.

최창식(崔昌植) 「황성신문(皇城新聞)」후기의 소장기자(少壯記者)였으나 경술정변 이후 오성학교(五星學敎)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한국사(韓國史)의 연술(演述)과 은창가자(隱唱歌者)에 관련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기미년(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 문부대신(文部大臣)을 지낸 후 귀국하였다가 다시 서울에서 영어(囹圄) 생활을 하였으며, 8.15전까지 상해에 있었으나 중공 침략 후 소식이 묘연하다.

최현배(崔鉉培) 1894~1970 호(號)는 외솔. 한글 학자. 울산 출신.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를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칭병사퇴(稱病辭退)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 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 교오토(京都) 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그 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제 사직되었다. 그동안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도 겸직하였는데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을 발간하였고, 1941년 연희전문학교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광복때까지 3년간 옥중생활을 겪었다.

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 그 기틀을 잡았으며 한글학회 상무이사, 이어서 이사장 등의 직책을 맡아 국어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가 1954년 연세대학교로 돌아가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는 한편, 1955년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받았다.

1958년 학술원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世宗大王記念事業會)를 창립, 그 이사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61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고, 같은 해 재단법인 연세대학교 이사에 추임하였으며 1964년 동아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받았으며, 주요 저서에 「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나라 사랑의 길」등이 있다.

최인규(崔仁圭) 1916~1961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연희전문상과(延禧專門商科) 및 미국뉴욕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1950년 정부의 무역사절단 동남아시아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대한교역사(大韓交易社) 이사장을 거쳐 운크라(유엔 한국재건위원단) 미국주재 한국대표를 역임했다.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 : 외자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을 지냈으며, 1958년 4대 국회의원(경기 광주지역)에 당선되어 같은 해 9월 교통부장관에 올랐다.

1959년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을 역임하여 자유당 말기의 격동기에 정치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으나, 4․19가 일어나 그 전에 실시되었던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 투표를 지휘하였다고 하여 투옥되었다고 5․16군사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