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김해김씨,김해김씨시조,김수로왕,김해김씨조상인물,김해김씨본관

작성일 : 2017-12-30 19:13 수정일 : 2018-01-09 10:25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삼국유사(三國遺事)」와「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蜂)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한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한줄기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定)하고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王妃)로 맞았다.

그후 10대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선양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달성(達成)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세계(世系)를 이루었다.


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古代國歌)인 6가야(六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중심지였으나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급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우다가 680년(문무왕 20)에 가락국(駕洛國) 역사와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신라 김씨(新羅金氏)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金氏)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죽(名門巨族)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중시조(中始祖) 유신(庾信)의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派別)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派祖)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목경(牧卿)의 맏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 :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功)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고,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 : 동지중추부사)․영서(永瑞 : 현감)․영정(永貞 ; 성종때 대사헌)․영순(永純 : 한성 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 때 명신(名臣) 우항(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派祖)인 익경(益卿)의 손자(孫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께 은거(隱居)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銚)는 세종(世宗) 때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忠臣)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世宗)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 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 : 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功)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 방어사(昌城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 3등 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將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淸)나라 장수(將守)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동광(錬光 : 이상의 아들)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城)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城)의 정문(正門)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행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엇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士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 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좌기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 되었다.

일손(馹損)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 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미쳤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경서(景瑞)와「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風俗畵)의 조종(祖宗)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天澤)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金海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456,7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