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예천권씨,예천권씨시조,예천권씨유래,예천권씨조상

작성일 : 2017-12-29 15:5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예천은 경상북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의 수주현을 신라에서 예천으로 불렀으나 고려 때 와서 안동부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 2) 태자의 태를 이 고을에 묻었다고 하여 기양현으로 승격되었고, 1204년(신종 7) 에 포주로 하였으나 조선 태종조에 왕명에 의하여 포천으로 고쳤다가 1416년(태종 16) 에 다시 예천이라 하였다.


천권씨의 시조 권섬은 호군 흔승단의 아들로 본성 흔씨였으나 고려 충목왕(제29대 왕, 재위기간:1344~1348)의 이름이 흔이었으므로〈국휘를 범한다〉고 하여 그의 외가성인 권씨로 개성한 것이다.

시조 은 고려 충목왕 때 예빈경을 역임한 후 전공 판서에 추증되었고, 후손들이 예천지방에 정착세거하며 관향을 예천으로 삼게 되었다.


예천권씨의 가통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섬의 손자 상과 집이 목사를 지냈고, 집의 아들 맹손은 조선 세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중추원 부사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별제 선의 아들 5형제 중 둘째 오기는 연산군때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봉교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종조에 좌통례가 되었다. 세째 오복은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로 호당(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연려실기술」「연산군고사본말」에 의하면 그는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칭도하였고, 김일손과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교리)로 있다가 노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으로 나간지 3년 만에 화를 당하였는데, 흉하고 포악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한 기절을 굽히지 않고 3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참봉 오상의 손자 문해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학문에 일가를 이룬 학자)로서 고래의 서적을 참고하여「대동운부군옥」을 저술했으며, 그의 아들 별은 고금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는「해동잡록」을 편술하여 부자가 함께 박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권씨는 남한에 총 1,512가구, 4,8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권맹손(權孟孫) 1390 (공양왕 1) ~ 1456 (세조 1)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시호(諡號)는 제평(齊平), 목사(牧使) 상(詳)의 아들. 1408년(태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공조 판서(工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조 판서(吏曹判書)․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官찰使)등을 역임, 1450년(세종 32) 이조 판서(吏曹判書)로서 의창(義倉) 제도의 모순과 관리 들의 부정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을 상소했다. 그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권오기(權五紀) 1463 (세조 8) ~ ?

자는 협지(協之) 호는 졸재(拙齋), 별제(別提) 선(善)의 아들, 오복(五福)의 형.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1511년(중종 6) 지평(持平), 1526년 경상좌도 군적경차관(慶尙左道軍籍敬差官), 1530년(중종 25) 사도시 부정(司䆃侍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오복(權五福) 1467 (세조 12) ~ 1498 (연산군 4)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선(善)의 아들.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가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글씨․시문이 모두 뛰어났고 특히 문장․필법이 힘찼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예천(醴泉)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문해(權文海) 1534 (중종 29) ~ 1591 (선조 24)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지(祉)의 아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부승지(左副承旨)․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되었다.

일찍이 이 황(李 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고, 우리나라 고래의 서적을 널리 참고하여 사실(史實)․인문․지리․문학․예술 등을 총망라해서 운자(韻字)에 의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저술했다.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별(權 鼈) 호는 죽소(竹所), 사간(司諫) 문해(文海)의 아들.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래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왕실의 사적(事蹟)과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인물 열전(列傳)을 집대성하여「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편술했다.

권칠림(權七臨)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권형(權 衡) 조선에서 집의(執義)를 지냈다.

권오행(權五行) 조선조에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대덕(權大德)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권덕여(權德與) 조선조(朝鮮朝)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권계응(權啓應)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권종수(權鍾秀)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지냈다.

권도(勸 導)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권회(權 恢) 조선조에 사간(司諫)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