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원구씨시조,구성길(仇成吉),창원구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2-29 09:06 수정일 : 2019-12-04 10:01

창원구씨의 연원

창원구씨는 원래 仇氏(구씨)였는데 1791년 정조(正祖)의 사성(賜姓)으로 具氏(구씨)로 고처쓰게 되었다. 영조 38년(1762)의 창원구씨 초간세보(初刊世譜) 임오보(壬午譜)에 “仇氏(구씨)는 멀리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어진 재상(宰相)이 이어졌다”라고 되어 있는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의 仇珍(구찐) 장군, 문무왕(文武王) 때의 사찬(沙湌) 구진천(仇珍川), 술간(述干) 구기(仇杞), 사찬(沙湌) 구근(仇近) 등이 신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 기록이 있다.


창원구씨는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具氏의 세거지(世居地)는 겨우 2개소에 불가한 반면 仇氏(구씨)의 세거지(世居地)은 무려 21개소나 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적을 종합하여 볼 때 구씨(仇氏)는 원래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원시조(原始祖) 구성길(仇成吉) 공(公)은 고려 제2대 혜종(惠宗) 2년(945)에 서경(西京 : 지금의 平壤)에서 공(功)을 세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의창군(義昌君)에 봉(封)해 지셨다.

의창(義昌)을 식읍(食邑)으로 받으셨고, 창원(昌原)이 주요 세거지(世居地)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창원을 단일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다. 원시조(原始祖) 이후 자(子) 희(喜)는 후일 역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지냈고, 후손(後孫) 경(景)은 수안현감(遂安縣監)을 지냈고 증손(曾孫) 염(廉)은 참봉(參奉)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후 400년 간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계보(系譜)가 확실(確實)한 고려말(高麗末) 생원(生員) 구설(仇雪)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이세(二世) 구종길(仇宗吉)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그의 아들 복한(復漢)을 부사공파(府使公派, 동설(東薛) 공을 진사공파(進士公派), 동직(東直)을 승지공파(承旨公派)로, 그리고 중시조의 동생 원길(元吉)의 아들 석훈(錫勳)을 처사공파(處士公派)로 사파(四派)가 있어며, 제족(諸族)이 계대(繼代)하고 있다.


仇氏(구씨)를 具씨(구씨)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은 1791년 정조(正祖)가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을 임명하면서 훈련도감집사(訓練都監執事)인 仇始昌(구시창)이 후보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仇姓(구성)이 비록 오래 되었으나 具字姓(구자성)이 더 좋으니 具字로 고처라”하고, 연교문(筵敎文)보냈는데, 더 확실한 문적(文蹟)이 필요하다고 仇門(구문)에서 상서(上書)를 하니, 1798년에 일성록(日省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 사실을 기록하고 확증지었다.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종조에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중시조(中始祖) 구종길(仇宗吉), 세종조에 강계도호부부사(江界都護部府使), 충청도사(忠淸都事),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등을 지낸 구복한(仇復漢), 단종조(端宗祖)에 등과(登科)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구자평(仇自平), 중종조(中宗朝)에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에 상량문(上樑文)을 지은 구유온(仇有溫), 선조조(宣祖朝)에 등과(登科)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구정열(仇廷說), 문열공(文烈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은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구지(仇之), 박정희대통령의 친필휘호(親筆揮毫)를 받은 일문사충(一門四忠) 구응진(仇應辰), 구응삼(仇應參) 형제와 구응성(仇應星), 구동(仇棟) 부자가 있다. 구영취(仇榮鷲) 및 구변(仇忭) 구흔(仇忻) 형제도 역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그 외도 많은 분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록권(錄券)되여 있고 조선역대명신록에도 그 기록이 있다. 구상덕(仇尙德)은 영조조(英祖朝)에 수십년간 승총명(勝總明)이라는 제목의 일기를 남겼다. 근세(近世)에는 한은초대총재(韓銀初代總裁)를 지낸 구용서(具鎔書), 부산시교육감 및 국회의원을 지낸 구용현(具龍鉉),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구영록(具永錄) 박사 등을 들 수 있다.


仇門(구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거족적으로 창의(倡義)하여 희생이 많았고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1등공신이 2명, 2등공신이 6명, 3등공신 까지 합치면 모두 20명이나 되는 공신(功臣)을 많이 배출한 가문(家門)이였다. 하지만 仇氏(구씨)가 具氏(구씨)로 사성(賜姓)된 이후 여러 소문중 전부가 이탈하는 큰 혼란을 겪어 조선조 말기에는 가세(家勢)가 매우 한미(寒微)해졌다. 그러나 갑자보에서 잔여 일족을 정비하였고, 1980년경부터 일가 찾기 운동을 하면서 임오보(1762), 정사보(1797) 및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조선조 장적(帳籍:지금은 호적)등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仇姓(구성)으로 수록된 후손을 찾아 환본하도록 노력한 결과 환본된 소문중도 있고 일부 소문중은 계속 환본을 요구하고 있다.

보책(譜冊)으로는 임오보(壬午譜) 1762년(英祖 38년), 정사보(丁巳譜) 1797년(正祖 21년), 갑자보(甲子譜) 1924년에 착수하여 1930년에 刊行), 을미보(乙未譜) 1955년, 신유보(辛酉譜) 1981년 및 신사보(辛巳譜 2001년)가 있다. 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절충장군(五衛折衝將軍), 부호군첨지(副護軍僉知), 중추부사(中樞府使) 겸 오위장군을 역임하고, 돈영도정(敦寧都正)을 증직(贈職) 받으셨다. 순창문중(淳昌門中) 출신

구익환(具翼煥): 호(號)는 화봉(華峯) 1838~1904 자헌예문관사,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

구해용(具海龍): 자(字)는 선약(善若) 1839~1909 헌종조 조봉대부(朝奉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