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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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2-29 09:06 수정일 : 2018-02-25 16:43

창원구씨의 연원

창원구씨는 원래 仇氏(구씨)였는데 1791년 정조(正祖)의 사성(賜姓)으로 具氏(구씨)로 고처쓰게 되었다. 영조 38년(1762)의 창원구씨 초간세보(初刊世譜) 임오보(壬午譜)에 “仇氏(구씨)는 멀리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어진 재상(宰相)이 이어졌다”라고 되어 있는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의 仇珍(구찐) 장군, 문무왕(文武王) 때의 사찬(沙湌) 구진천(仇珍川), 술간(述干) 구기(仇杞), 사찬(沙湌) 구근(仇近) 등이 신라가 삼국(三國)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 기록이 있다.


창원구씨는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具氏의 세거지(世居地)는 겨우 2개소에 불가한 반면 仇氏(구씨)의 세거지(世居地)은 무려 21개소나 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적을 종합하여 볼 때 구씨(仇氏)는 원래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원시조(原始祖) 구성길(仇成吉) 공(公)은 고려 제2대 혜종(惠宗) 2년(945)에 서경(西京 : 지금의 平壤)에서 공(功)을 세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의창군(義昌君)에 봉(封)해 지셨다.

의창(義昌)을 식읍(食邑)으로 받으셨고, 창원(昌原)이 주요 세거지(世居地)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창원을 단일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다. 원시조(原始祖) 이후 자(子) 희(喜)는 후일 역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지냈고, 후손(後孫) 경(景)은 수안현감(遂安縣監)을 지냈고 증손(曾孫) 염(廉)은 참봉(參奉)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후 400년 간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계보(系譜)가 확실(確實)한 고려말(高麗末) 생원(生員) 구설(仇雪)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이세(二世) 구종길(仇宗吉)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그의 아들 복한(復漢)을 부사공파(府使公派, 동설(東薛) 공을 진사공파(進士公派), 동직(東直)을 승지공파(承旨公派)로, 그리고 중시조의 동생 원길(元吉)의 아들 석훈(錫勳)을 처사공파(處士公派)로 사파(四派)가 있어며, 제족(諸族)이 계대(繼代)하고 있다.


仇氏(구씨)를 具씨(구씨)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은 1791년 정조(正祖)가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을 임명하면서 훈련도감집사(訓練都監執事)인 仇始昌(구시창)이 후보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仇姓(구성)이 비록 오래 되었으나 具字姓(구자성)이 더 좋으니 具字로 고처라”하고, 연교문(筵敎文)보냈는데, 더 확실한 문적(文蹟)이 필요하다고 仇門(구문)에서 상서(上書)를 하니, 1798년에 일성록(日省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 사실을 기록하고 확증지었다.


조선조(朝鮮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종조에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중시조(中始祖) 구종길(仇宗吉), 세종조에 강계도호부부사(江界都護部府使), 충청도사(忠淸都事),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등을 지낸 구복한(仇復漢), 단종조(端宗祖)에 등과(登科)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구자평(仇自平), 중종조(中宗朝)에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에 상량문(上樑文)을 지은 구유온(仇有溫), 선조조(宣祖朝)에 등과(登科)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구정열(仇廷說), 문열공(文烈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은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구지(仇之), 박정희대통령의 친필휘호(親筆揮毫)를 받은 일문사충(一門四忠) 구응진(仇應辰), 구응삼(仇應參) 형제와 구응성(仇應星), 구동(仇棟) 부자가 있다. 구영취(仇榮鷲) 및 구변(仇忭) 구흔(仇忻) 형제도 역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그 외도 많은 분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록권(錄券)되여 있고 조선역대명신록에도 그 기록이 있다. 구상덕(仇尙德)은 영조조(英祖朝)에 수십년간 승총명(勝總明)이라는 제목의 일기를 남겼다. 근세(近世)에는 한은초대총재(韓銀初代總裁)를 지낸 구용서(具鎔書), 부산시교육감 및 국회의원을 지낸 구용현(具龍鉉),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구영록(具永錄) 박사 등을 들 수 있다.


仇門(구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거족적으로 창의(倡義)하여 희생이 많았고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1등공신이 2명, 2등공신이 6명, 3등공신 까지 합치면 모두 20명이나 되는 공신(功臣)을 많이 배출한 가문(家門)이였다. 하지만 仇氏(구씨)가 具氏(구씨)로 사성(賜姓)된 이후 여러 소문중 전부가 이탈하는 큰 혼란을 겪어 조선조 말기에는 가세(家勢)가 매우 한미(寒微)해졌다. 그러나 갑자보에서 잔여 일족을 정비하였고, 1980년경부터 일가 찾기 운동을 하면서 임오보(1762), 정사보(1797) 및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조선조 장적(帳籍:지금은 호적)등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仇姓(구성)으로 수록된 후손을 찾아 환본하도록 노력한 결과 환본된 소문중도 있고 일부 소문중은 계속 환본을 요구하고 있다.

보책(譜冊)으로는 임오보(壬午譜) 1762년(英祖 38년), 정사보(丁巳譜) 1797년(正祖 21년), 갑자보(甲子譜) 1924년에 착수하여 1930년에 刊行), 을미보(乙未譜) 1955년, 신유보(辛酉譜) 1981년 및 신사보(辛巳譜 2001년)가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구씨는 전국에 13,339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창원구씨조상인물

신라시대 인물

구진(仇珍): 551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의 도움요청을 받자, 구진 장군을 보내어 백제가 고구려에 빼앗긴 한산주(지금의 서울)를 탈환하여 백제에 주지 않고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구근(仇近): 661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식량을 소정방 군단에 전달하는 과정에 혹한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 군과 대전투(大戰鬪)를 하여 대파하자, 왕은 구근 장군을 사찬(沙湌)으로 승진 시켰다.

구기(仇杞): 668년 라당연합군이 고구려의 평양(平壤)을 총공격할 때 평양남교(平壤南橋)를 적시(適時)에 점령하여 평양에 대 군대가 상륙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술간(述干)의 벼슬과 율(栗) 700석을 하사 받았다.

구진천(仇珍川): 668년 사찬(沙湌) 한번에 많은 화살를 쏘는 쇠뇌를 만들어 천보(千步) 밖 목표물에 명중시키는 쇠뇌(활)를 만드는 유명한 노사(弩師)로 라당연합군이 이 쇠뇌를 사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전쟁이 끝나자 당나라에 불려가서 당나라 고종의 명령을 무시하고 끝까지 제작하기를 거부했다.

구족달(仇足達) 벼슬은 사찬(沙湌)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에 명필가 940년에 건립한 보현사 탑비(보물192호)에 쓴 강한 필력을 볼 때 신라 김생(金生) 이후에 최고 명필가(名筆家)로 인정 받고 있다.


고려시대 인물

구성길(仇成吉): 자(字)는 완지(完之) 창원구씨 원시조(原始祖)이다 고려 혜종(惠宗) 2년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공을 세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받고 의창군(義昌君)에 봉(封)해 지셨고, 의창(義昌: 지금은 창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으셨다. 묘소는 재영월부 남십리허 취 봉경태용경좌(在寧越部 南十里許 鷲峯 庚兌龍庚坐)라 하나 묘는 실전 상태다.

구희(仇喜): 자(字)는 군열(君悅) 부친에 이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셨다.

구경(仇景): 자(字)는 여앙(汝仰) 수안현감(遂安縣監)을 역임했다.

구염(仇廉) : 자(字)는 자순(子順) 참봉(參奉)을지 내셨다.


조선시대 인물

구종길(仇宗吉): 호(號)는 천곡(川谷) 1422년 세종4년 과거 정시(庭試)에 장원(壯元) 급제하고 일년이 지나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어머님 생각에 병이 났다. 더디어 왕이 휴가를 보내면서 명주(明珠) 한알를 표신(標信)으로 하사했다.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다. 나중에 사부(師傅)가 되셨다. 이 이야기는 조선역대명신록(朝鮮歷代名臣錄)에 있다.

구복한(仇復漢): 부사공파파조(府使公派派祖)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충청도도사, 강계부사(江界府使),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事)를 역임했다. 강계부사 시절 백성들이 복한(復漢)공의 은덕(恩德)을 칭송(稱頌)하며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이 이야기는 교남지(嶠南誌)에 있다.

구석종(仇碩從): 자(字)는 예원(禮元) 성종조(成宗祖) 때 의성훈도(義城訓導) 통선랑(通善郞)을 역임하셨다.

구순종(仇順從): 성종조(成宗朝)에 진사(進士)를 지내고 그 후 손이 창원 동읍에서 사남면(泗南面) 능화(陵花)에서 번창하여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다.

구동직(仇東直): 자(字)는 여방(汝邦) 승지공파파조(承旨公派派祖), 조선조 초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내셨다.

구유온(仇有溫): 호(號)는 하계(荷溪) 중종(中宗) 8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42년 중종 37년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의 청으로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에 상낭문(上樑文)을 지으셨다. 밀양징신록(密陽徵信錄) 및 중요 향사(鄕史)에도 기록이 있다.

구선달(仇善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창원사곡리(昌原斜谷里)에서 경기도 이천 송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하고, 그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구자평(仇自平): 호(號)는 월정(月亭) 단종(端宗) 2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선전관(宣傳官)으로, 함길도도사(咸吉道都事), 이시애(李施愛) 난(亂)에 남이장군과 같이 출정(出征)하여 함길도문천(咸吉道文川) 주둔(駐屯) 사령관, 예조정랑(禮曹正郞), 성종 (成宗) 때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참석하여 임사홍(任士洪)을 타핵(彈劾)하여 처벌하자는 발언이 회의록으로 왕조실록에 있다.

구인복(仇仁福): 일휘 자설(自雪) 중종조(中宗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 및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내셨다. 담양군(潭陽郡) 천동문중(泉洞門中)이다.

구수겸(仇守謙): 자(字)는 익지(益之) 중종 20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전주훈도(全州訓導)를 지내셨다.

구수영(仇守榮): 선조조(宣祖朝)에 장사랑(將仕郞), 강예 습독관(講隸習讀官), 시거(始居) 황해도 안악(安岳), 처사공파(處士公派).

구진립(仇震岦): 자(字)는 현맹(見孟) 중종조(中宗朝)에 훈련원 첨정(僉正) 및 천견강제록도(天譴降除鹿島) 만호(萬戶)를 역임하셨다.

구자범(仇自範): 자(字)는 사장(士章) 중종조(中宗朝)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교하(敎河) 현감(縣監 을 역임하셨다.

구협(仇協): 자는 공직(公直) 명종조(明宗朝)에 부호군(副護軍)이었다. 풍천임씨세보(豊川任氏世譜) 인명록(人名錄)에 구협(仇協)을 사위로 수록되어 있다.

구서(仇恕): 자(字)는 군화(君和) 1516~1577 명종조(明宗朝)에 생원이 되었고 통정예조참의(通政禮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으셨다.

구응진(仇應辰): 호(號)는 청사(淸沙) 제포만호(薺浦萬戶) 명종(明宗)6년 1551년 출생하여, 선조(宣祖)16년 계미별시(癸未別試)에 급제, 재포수군사령관(齋浦水軍司令官)으로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자 김해 노현(露峴)에서 왜적과 치열한 해전을 하다 전사했다. 그의 충절를 포상(褒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훈에 올랐다. 조선역대명신록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 “일문사충(一門四忠)”을 순의기적비(殉義紀蹟碑)에 새겨 넣었다.

구응삼(仇應參): 호(號)는 충모당(忠慕堂)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금군(禁軍)이 되어 왕을 호위하며 때로는 가까이 다가오는 왜적과 전투를 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록 1등훈을 받으셨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일문사충”을 받으셨다.

구응두(仇應斗):정사보(丁譜譜)휘(諱)두전(斗專)1578~1620 선조조(宣祖朝)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다.

구응성(仇應星): 호(號)는 송은(松隱) 훈련원 주부(主簿)로 임진왜난이 터지자 향리로 돌아와 단신(單身)으로 창의(倡義)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하자, 고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부하로 모인 사람이 수 천명이 되였다. 그 길로 곽재우 장군 진영에 합류하여 전투를 했다. 곽재우 및 권율 장군의 포상상신(褒賞上申)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훈을 받었다. 조선역대명신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親筆揮毫)“ 일문사충(一門四忠)”을 기적비에 새겨 넣었다.

구동(仇棟): 호(號)는 모의당(慕義堂) 응성공의 아들로 21세에 부친을 따라 의병(義兵)으로 창의(倡義)하여 곽재우 장군 진영에 들어가서 적을 토벌하고 큰 전공을 세웠다. 곽 장군은 세 번이나 포상을 상신 했다. 조선역대명신록, 고성읍지에 그 사연이 기술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휘호 “일문사충(一 四忠)”을 기적비에 새겨 넣었다.

구영취(仇榮鷲): 임진년 4월 14일 왜병이 부산진을 함락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동래성으로 달려가 여러 의병들과 합세하여 왜적들과 혈전을 치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여러 의병들과 같이 소산역구에 집결하여 동래와 양산 사이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유격전으로 선무원종공신 3등훈을 포상 받았다. 동래성 혈전에서 장렬히 순직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더불어 충열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구변(仇忭): 참사(參事)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자 즉시 창의(倡義)하여 참전하고 큰 전공(戰功)을 세우니 선무원종공신 3등훈을 받으셨다. 이천문중이다.

구흔(仇忻): 보인(保人:正軍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사람) 형 변(忭)과 같이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3등훈을 받으셨다. 이 사실이 명신록에 수록되어 있다.

구윤걸(仇允杰): 자(字)는 정순(正順) 1574~1605 선조조(宣祖祖)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응진(應辰)공의 장남이다. 고종 병오년에 통정밀서원승(通政密書院丞)을 증정(贈呈) 받으셨다.

구정열(仇廷說): 호(號)는 연기(烟磯)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선조(宣祖)5년에 과거에 급제하셨고, 문장력과 필법의 오묘함을 보시고 칭찬하면서 충청도 도사(都事)로 제수 되셨다. 얼마 후 옥당교리(玉堂校理)로 있다가 은퇴했다. 말년에는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증직 받으셨다.

구정려(仇廷呂): 호(號)는 봉암(鳳巖)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재직시 임진왜란이 터졌다. 동지인 안의(安義), 손홍록(孫弘錄)등과 협의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정읍(井邑) 내장산 용굴암(龍屈菴)으로 옮겼다. 다시 묘향산으로 옮기기도 하고, 후일 다시 본전(本殿)으로 옮기었다.

구지(仇之): 시호(諡號)는 문열공(文烈公) 옥당교리 정열(廷說)의 차자(次子)이다. 전주판관(全州判官)을 거처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재직 시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지역에서 군졸(軍卒)을 모아서 창의(倡義)하여 왜적들과 혈전을 치르며 곳곳에서 큰 전과(戰果)를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훈(一等勳)에 포상되셨다. 후일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겸부사(判義禁府事)를 증직(贈職) 받으셨다.

구일생(仇逸生):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5년만에 순절(殉節)하니 통훈사헌부지평(通訓司憲府持平)을 증정(贈呈) 받으셨다. 성주(星州) 벽진문중(碧珍門中)이다.

구용(仇龍): 임진왜란에 영면주(領綿紬)에 나가 선조왕을 극진히 보살피자 다른 사람의 열배나 되는 공로가 있다고 하시면서 비변사(備邊司) 수첩(授帖)에 실렸다.

구연용(仇淵龍): 자(字)는 이현(而見) 고성군 회화면 화양리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화동재(華東齋)에 봉위(奉位)하고 있다. 회화문중(會華門中)이다.

구경남(仇景男) 구경운(仇景運): 1658년 효종(孝宗) 9년 계후등록(繼後謄錄)이란 양자입양을 허가를 받는 제도로 이천문중(利川門中) 10세손 이준(以俊)공이 후손이 없어 계자(繼子)를 신청하여 동의를 받은 예조편(禮曹篇)의 문서로서 문장 통정대부 구경남과 첨사(僉使) 구경운이 신청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차지(金次知)가 승낙한 문서이다

구석린(仇錫麟): 영조(英祖) 19년 생여각(生閭閣)의 영(令)이 내렸다, 고산군수(高山郡守)에게 보내는 글에, 천만 뜻밖에 정표(旌表)의 공문과 관청의 곡식이 이미 도착하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공하고 부끄러워 표창의 은전(恩典)을 거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글을 써서 관청에 보냈다.

구용진(仇龍進): 호(號)는 불지암(不知菴) 1712년 8월 숙종(肅宗)38년 15세에 반월시(半月詩) 등 시 두편을 남겼다.

구흥생(仇興生): 자(字)는 이태(爾泰) 1618~1697 인조조(仁祖朝)에 무과에 급제하고 부호군(副護軍) 및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증직(贈職) 받으셨다.

구처형(仇處亨): 자(字)는 통여(通汝)1678~1760 숙종조(肅宗祖)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장락원(掌樂院) 첨정(僉正)을 지내셨다.

구주성(仇周星):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부친께서 병이 전염되어 기절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따라드리니 소생하였다. 1670년 현종(顯宗) 11년 이 사실을 뜯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동래읍지(東萊邑誌)에 그 내용이 수록 되어 있다.

구학령(仇鶴齡)공 배위(配位) 진양강씨 열행기(烈行記: 영조조(英祖朝)에 있은 열행기(烈行記). 죽은 남편의 부인을 미망인(따라죽지 못한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령공의 빈소에서 밤을 세우고 상여가 떠난 후 목욕하고 새 옷 갈아입고 목숨을 끊었다. 열행기(烈行記)가 고성읍지(固城邑誌)에 있다.

구상덕(仇尙德): 호(號)는 월봉(月峯) 1706~1761 영조조에 월봉서원을 세우고 후배양성에 진력하면서 제목을 승총명록(勝聰明錄)으로 하고 수 십년간 일기를 쓰셨는데, 그 시대의 생활상, 일반평민들의 문화와 풍속, 금전 거래 등 그 시대의 다양한 자료가 보존가치가 크다고 인정되어 한국정신문화원에서 국역(國譯)하여 보존하고 있다.

구태종(仇泰琮): 1762년 영조 38년에 최초의 창원구씨 족보 오보(壬午譜)를 주간하여 편찬했다. 그 때 창원구씨(昌原仇氏) 임오보(壬午譜)가 있으므로 우리의 뿌리 창원구씨(昌原仇氏)를 영구히 보존할 수있는 계기(契機)를 마련하셨다.

구세정(仇世貞):자(字)는 상운(祥雲) 영조조 1695- 1757. 가선동추(嘉善同樞)를 증직(贈職) 받았다. 배(配) 신안주씨는 천성순효정신(天性純孝貞信)하여 향토 유림에서 효행상(孝行賞) 당주장(棠繡狀)을 증정 받으셨다. 시부(媤父)님을 극진히 보살핀 이야기는 교남지(嶠南誌)에 있다.

구봉익(仇鳳翼): 1680~1770 졸 1761년 영조 37년에 족계절목(族契節目)을 만들고 족계문장(族契門長)이 되었다. 족계절목이란 오늘날 종친회 회칙에 해당되는 이야기 이고, 족계문장이란 종친회회장이다, 특히 묘사에 관한 관심과 경비조달 방법이 절목에 들어있다.

구세안(仇世安): 전라도 담양부 천동면(泉洞面) 무송(茂松) 황윤석의 필본 저서 “이재유고”에 의하면 창원구씨 임오보에 입보한 후손이라고 했으며 창원에서 이사 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구명신(具命新): 자(字)는 현보(顯甫) 1777~1842 김해지(金海誌)에 이르기를 효행이 깊어 어버이가 병들어 아플때 눈 속에서 특이한 뱀을 얻었고 섣달이 지난 후에 생감(生柿)을 구해 공양하였다.

구시창(具始昌): 정조 15년(1791) 7월 금위조직(禁衛組織)인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 후보로 훈련도감집사(訓練都監執事)인 구시창(仇始昌)이 올랐는데 정조왕이 보시고 구씨성(仇氏姓)이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구씨성(具氏姓)이 좋으니 고쳐 쓰라고 했다. 그해 9월 장용영 입시(入侍)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성을 교시(敎示) 했는데 모두 고쳤느냐 하니, 구시창은 확실한 문적이 없어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니, 왕은 채재공(蔡濟恭)을 통하여 연교문(筵敎文)을 보냈다. 그래도 문적(文蹟)이 약하다고 더 확실한 문적을 구문(仇門)에서 요구하자 정조 22년(1798) 6월에 일승록(日省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賜姓)을 명(命)하는 기록을 하고 확증 지었다.

구형윤(具亨允) 구명윤(具明允): 1792년 1월 좌의정(左議政)에 올린 글에 “구시창의 지친(至親)이 사는 해서지방(海西地方:黃海道)에만 공문을 띄웠는데, 仇姓(구성)은 원래 한본이므로 삼남지방(三南地方:忠淸道 慶尙道 全羅道)에도 마땅히 사성(賜姓)할 수 있게 공문을 보내주세요”라 했다

구운용(具雲龍) 구성윤(具聖倫): 1797년 (丁巳年)에 창원에 사는 운용과 양산에 사는 성윤은 예조정서(禮曹呈書)을 올렸는데.“백성의 족보는 국사책과 같으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글을 올렸으며, 1798(정조 22년)에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 등재(登載)함으로 확고한 문적(文蹟)을 남겼다.

구억(具檍): 달성 세천(世川) 문중인(門中人)이다. 1797년 정조 21년 창원구씨 정사보(丁巳譜)에 서문을 쓰셨는데, 그 내용 중에 “우리 창원구씨(昌原具氏)가 어찌 옛 구씨(仇氏)를 잊을까 보냐”라는 글을 남겼다.

구창석(具昌晳): 배(配) 경주최씨(慶州崔氏) 열행정여(烈行旌閭) 고종 41년 제조(提調) 김태제(金台濟) 정여기(旌閭記)에 의하면 남편이 병을 얻어 위독할 때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쳤으나 운명했다. 최씨는 기절을 하였다가 소생하였으나, 한달이 지나고 남편이 운명한 같은 날 같은 시에 목욕하고 옷 갈아 입고는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구옥연(具玉淵): 1822~1900 고종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약장군(宣略將軍), 가배양만호(加背梁萬戶)를 지냈고, 1884년 고종 21년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난민구제에 진력하여, 고을 백성들의 칭송(稱頌)을 받았고, 우곡사(牛谷寺)를 중수하여 영정이 봉안되고 있다.

주용규(具龍圭): 호(號)는 묵암(黙菴) 1805~1885 일성록(日省錄)에 오위장군으로 기록이 있다.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절충장군(五衛折衝將軍), 부호군첨지(副護軍僉知), 중추부사(中樞府使) 겸 오위장군을 역임하고, 돈영도정(敦寧都正)을 증직(贈職) 받으셨다. 순창문중(淳昌門中) 출신

구익환(具翼煥): 호(號)는 화봉(華峯) 1838~1904 자헌예문관사,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

구해용(具海龍): 자(字)는 선약(善若) 1839~1909 헌종조 조봉대부(朝奉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