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5(충목왕 1)~1393(태조 2). 자(字)는 헌숙(憲叔), 호(號)는 동정(桐亭),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손자. 이 색(李 穡)의 문인. 1365년(공민왕 14) 문과(文科)에 장원,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정언(正言) 때에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禑王) 초에 전교시(典校示)의 승(丞)․부령(副令) 등을 지내고. 1381년(우왕 7) 모친상으로 금주(金州 : 금산)에서 복상을 마치는 동안 많은 지방 학자들을 가르쳤고, 1386년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기용되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 동문(東門) 밖에 나가 영접하고 군전(軍前)에서「곽광전(霍光傳)」을 바쳤는데 그 까닭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王)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창왕(昌王) 때 전교령(典校令)․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고, 공양왕(恭讓王) 즉위 초에 대사헌 조 준(趙 浚)의 천거로 좌상시(左常侍)․경연강독관(經莚講讀官)이 되었고, 이숭인(李崇仁)의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여 그를 무고해서 중지시켰다. 그후 남을 헐뜯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金州)에 유배되었으나 용서받고, 다시 정몽주(鄭夢周) 일파인 간관(諫官)에게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으나 1392년(태조 1) 정몽주가 살해되자 귀양에서 풀렸다. 1392(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병조 전서(兵曹典書)로서 고려사(高麗史)의 수찬(修撰)에 참여, 이듬해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올랐으며, 수문전(修文殿) 학사(學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