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광해군 9)~1680(숙종 6). 초명은 정(禎), 자(字)는 희중(希仲), 호(號)는 백호(白湖)․하헌(夏軒), 대사헌(大司憲) 효전(孝全)의 아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자의(諮議)․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공조 좌랑(工曹佐郞), 1658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 이듬해 지평(持平), 1674년(현종 15)에 예빈시(禮賓寺) 정(正)․장령(掌令) 등(等)에 여러 번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專念)했다. 앞서 1660년(현종 1)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南人)으로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設 : 만 1년)에 대하여 3년설(만 2년)을 주장, 송시열(宋時烈)과 논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禮訟)으로 서인이 몰려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에 기용, 동부승지(同副承旨)․이조(吏曹) 참의(參義)․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등을 거쳐 대사헌으로 제주(祭酒)를 겸임, 우참찬(右參贊)․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내고, 1676년(숙종 2) 도총관(都摠管)․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이듬해 특진관(特進官)으로 우참찬을 겸했다. 이어 공조 판서가 되고 1679년 우찬성(右贊成)에 승진, 다시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열되자 청남(淸南)으로 송시열의 엄벌을 주장했다가 뒤에 탁남(濁南)에 속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甲山)에 유배, 이어 허 견(許 堅)의 옥사(獄事)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事)되었다. 그의 학문의 태도는 종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신봉된 주자(朱子)의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중용(中庸)」․「대학(大學)」․「효경(孝經)」등 경전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 황(李 滉)․이 이(李 珥)의 이기설(理氣設)에도 비판을 가하고 두 학설을 절충하여「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정설(定說)이 없었던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해석을 꾀했다. 정계에 등장한 이후 1584년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지패법(紙牌法) 등을 실시케 하여 세법(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시행이 중지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고 북벌(北伐)에 대비토록 했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1689년(숙종 15) 아들 하제(夏濟)의 상소로 신원(伸寃)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