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號)는 문산(文山)이고 고려조(高麗朝) 말(末) 지신사(知申事)에 재임(在任) 중(中) 조민수(曺敏秀)와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여흥왕(驪興王: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선생은 주자의 성리학에 정명(精明)하여 정포은(鄭圃隱)과 도의(道義)로 친분(親分)이 돈독(敦篤)하였다.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이 이르기를 설형(薛兄)의 학로(學路)는 바르고, 분석(分析)함이 밝아서 두려워하고 감탄(感歎)했다고 하였다. 방직범(方直範) 범세동(范世東) 등과 함께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원천석(元天錫)의 집에 모여 치악산 정상(頂上)에 다 제단(祭壇)을 만들어 열성을 비롯 수의부강(守義扶綱)하다가 피화(被禍)한 충현(忠賢)들에게 제사(祭祀)를 올리고 변고(變故)를 고하고 통곡(痛哭)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7일을 이곳에 머물면서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에 대한 참다운 이치를 논하고 그 망복(罔僕)의 뜻을 면려(勉勵)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운월제(雲月齊) 신문정(申文貞) 선생의 학설과 고사를 인용하여 설명하며 “인(仁)한 자는 성쇄로서 절을 고치지 않고 의로운 자는 존망으로써 마음을 버꾸지 아니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