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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 성삼문(成三問)

작성일 : 2017-08-29 12:03

1418 (태종 18) 1456 (세조 2)  ()는 근보(謹甫)․눌옹(訥翁), ()는 매죽헌(梅竹軒),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도총관(都摠管) ()의 아들. 1438(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급제, 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에 서 집현전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석정(李石亭)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 항(崔 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강희안(姜希顔)․이 개(李 塏) 등과 함게 한글의 창제(創制)를 앞두고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 찬(黃 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929일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케 했다.

1453(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내리자,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이를 수치로 여겨 혼자 열지 않았다.

1455년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세조가 단종(端宗)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아버지 승()․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 4월에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雲劍)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권 남(權 覽)․정인지(鄭麟趾)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 운검(雲劍)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어 같은 모의에 가담했던 김 질(金 礩)이 밀고, 이 개․하위지․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열)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의 세동생과, 맹첨(孟詹) ․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숙종 2)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 집 옆에 세워진 녹운서원(綠雲書院), 1681년 육신묘(六臣墓)가 있는 노량진(鷺梁津)에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寧越)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義城)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昌寧)의 물계 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5신과 함께 제향(祭享), 1758(영조 34)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