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7-06 11:20
1917 ~ 1979 한국의 전(前) 대통령(재임기간 : 1963~1979), 군인.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신. 어사공파(御史公派) 직강공(直講公) 숙동(叔童)의 후손, 군수(郡守) 성빈(成彬)의 아들. 1937년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를 졸업하고 3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졸업하였다. 한국 국군 창설에 참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포병학교장, 제 5사단장, 제 7 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 6 관구 사령관, 육군 군수기지(郡守基地) 사령과,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作戰參謨副長), 제 2군 부사령관 등 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혁명을 주도하고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임, 1963년 8월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총재에 추대되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67년 7월 제6대,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1972년 12월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를 촉성하고,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고취하여 국민의 정신혁명을 불러 일으키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민족사적 정통성(正統性) 위에 평화통일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하였으며, 제 1,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제4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연평균 10%의 경이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사상 최대의 토목공사인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를 비롯하여 전국의 산업도로망을 우리의 기술과 자본으로 건설하여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비약적인 수출진흥(輸出振興)을 이룩하여 연평균 신장율(伸張率) 42.8%의획기적인 기록을 수립하고 새마울운동을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전개, 농어촌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구축에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는데, 1970년의 8․15선언을 기점으로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그리고 남북조절위(南北調節委)의 구성과 그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4반세기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대화(南北對話)의 실마리를 풀었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 정책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다.
1973년에는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을 통해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모든 국가와의 문호개방정책을 추구하고 상호친선과 국제협력의 폭을 넓힘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었고, 1974년에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남북한 상호불가침협정(不可侵協定)의 체결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방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지도상을 부각시켰는데, 1961년에는 케네디 미국대통령과 이케타(池田)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1964년에는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을 초청하였으며, 1965년 5월과 1968년 4월에는 미국의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1966년 2월에는 말레이시아․태국․중화민국 등을 공식 방문했고, 그해 10월 월남지원국(越南支援國) 마닐라 정상회담에 참석하였으며, 1968년 9월에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공식방문, 1969년 8월에는 미국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한미행정협정의 체결, 오랜 현안이었던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 그리고 월남파병(越南派兵)등 역사적인 결단을 내림으로써 국제 협력체제를 강화하였다. 1979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고 11월 3일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4년북괴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의 흉탄을 맞고 사망한 부인 육영수(陸英修)와의 사이에 1남 2녀가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민족의 저력(底力)」「연설문집(演說文集)」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