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고종 28)~1965 호(號)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政經科)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그후 다시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지휘하고 이어 대한청년 외교단을 조직,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잡혀 3년간 복역했다. 1923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여 이사(理事)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 겸 주필로 10년간 재직, 또한 물산장려회(物産獎勵會) 이사로 국산품 장려운동을 창도(唱導)했다. 1925년 신간회(新幹會) 총무가 되었으나 일본 관헌에게 피체, 8개월간 복역,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內通)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服役)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1년간 수감되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45년 9월에 탈퇴,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했다. 이어 한독당(韓獨黨) 중앙위원을 지내고 1946년 한성일보사 사장․비상국민회의 위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위원․남조선 과도(過渡) 입법위원을 역임하고, 이해 미군정청(美軍政廳) 민정장관이 되었다. 대한민국 수립으로 퇴임, 다시 한성일보사 사장을 지낸 후 1950년 평택에서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사변 중 납북되어 평양에서 죽었다. 한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정교를 거쳐 대형(大兄)이 되고 원로원 참의(元老院參議)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