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6-13 15:46
1641 (인조 19) ~ 1721 (경종 1)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齎),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집의(執義) 격(格)의 아들. 1660년(현종 1)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다.
앞서 1659년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추죄(追罪)를 받게 된 송시열이 1675년(숙종 1) 덕원부(德源府)에 유배되고 남인(南人)들이 득세하게 되자, 청풍(淸風)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 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정주(程朱)의 서적을 교정 했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어 사사(賜死)당하게 되자,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遺品)으로 받았고,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청주(淸州)에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향하고 숙종(肅宗)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좌․우의정(左․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모두 사양했다. 이 이(李 理)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宋時烈)에게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로서 이 이의 기발이승일도서(氣發理乘一途設)을 지지했으며, 그이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 간(李 柬)이 인물성 편재문재(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을 하자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동일하다는 이 간의 학설(學說 : 낙론)에 대해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學說: 호론)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淸風)의 황강서원(黃岡 書院), 정읍(井邑)의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報恩)의 산앙사(山仰柌), 예산(禮山)의 집성사(集成柌) 송화(松禾)의 영당(影堂) 등에 제향(帝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