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천황보씨시조(永川皇甫), 황보능장(皇甫能長),영천황보씨조상인물,황보항(皇甫抗)

작성일 : 2017-11-09 18:18 수정일 : 2019-02-14 14:35

시 조

황보씨(皇甫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신라(新羅) 말에 당(唐)나라로부터 귀화(歸化)한 황보 경(皇甫 鏡)이 우리나라 황보씨(皇甫氏)의 시원(始原)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영천황보씨세보(永川皇甫氏世譜)」에 의하면 황보경(皇甫鏡)의 증손(曾孫) 능장(能長)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금강성(金剛城) 장군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워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영천(永川)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관의 유래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대(古代)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것을 신라 초기에 영천군 일원은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新寧)지방은 사정화군(史丁火郡)이라고 하였다. 경덕왕 이후에는 임고군(臨皐郡)․고울부(高鬱府)․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면백현(#白縣)․이지현(梨旨縣)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초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성종(成宗) 때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현종(顯宗) 때에는 신녕현이 경주(慶州)로 편입되고 명종(明宗) 때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그 뒤 지주사(知州使) 소재지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고 1497년(연산군 3) 신녕현이 폐현(廢縣)되면서 영천군(永川郡)에 귀속되었다. 그 후 1937년 영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영천읍(永川邑)이 시(市)로 분리 승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는 특히 고려조(高麗朝)와 조선 초기(朝鮮初期)에 걸쳐 많은 명신(名臣)을 배출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地位)를 굳혔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명종(明宗) 때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항(抗)과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탁(倬)이 유명했으며, 정종(靖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潁)과 고종(高宗) 때 좌복야(左僕射)․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 기(琦) 등이 뛰어난 인물이다.

한편 유의(兪義)는 고려 현종(顯宗)이 즉위하는데 공헌했으며, 1031년(현종 22)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덕종(德宗) 때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토평하고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오른 임(琳)은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가담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오르고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가 되었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임(琳)의 아들 인(仁)은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세종(世宗) 때 장령(掌令)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평안․함길도 체찰사(平安․咸吉道體察使)가 되어 10년 동안 김종서(金宗瑞) 장군과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그는 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 3대에 걸쳐 도승지(道承旨)를 비롯하여 관찰사(觀察使)․좌찬성(左贊成)․우좌의정(右左議政)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조정의 중신이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어린 단종(端宗)을 보필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정 분(鄭 笨)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참판(參判)을 지낸 석(錫)․직장(直長)을 지낸 흠(欽)과 손자(孫子) 원(源)․문(汶) 등 다섯 사람이 화(禍)를 당하니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후로 나머지 일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거나 붙잡혀 섬이나 먼 변방의 관리(官吏)나 천민(賤民)이 되기도 하였으며, 성(姓)을 바꾸며 숨어 살기도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는 전국에 10,0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영천황보씨조상인물

황보제공(皇甫悌恭)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황보유의(皇甫兪義) ?~1042(정종 8) 훈신(勳臣) 집에 태어나 1009년(목종 12)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한 김치양(金致陽)이 그 사생아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막고자 할 때 선휘 판관(宣徽判官)으로서 채충순(蔡忠順)․최 항(崔 沆)의 천거를 받아 낭장(郎將) 문연(文 演) 등과 함께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가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현종)을 맞아들여 즉위케했다.

전중시 어사(殿中侍御史)․이부 낭중(吏部郎中)․내사사인(內史舍人)을 역임, 1014년(현종 5) 중추원 일직원(中樞院日直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함께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거두어 관리들의 봉급에 충당했다가 상장군(上將軍) 김 훈(金 訓) 등에 의해 유배되었다.

1016년 김훈 등이 사형되자 급사중(給事中)에 등용, 1026년(현종 17)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 왕가도(王可道)와 함께 개경(開京)의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1031년 중추사(中樞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 1034년(덕종 3) 내사시랑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1036년(정종 2) 문하시랑동내사 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가 된 후에 치사(致仕)했다.

황보영(皇甫潁) ?~1047(문종 1) 1023년(현종 14)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1031년(현종 22) 어사잡단(御史雜端)․어사중승(御史中丞), 이듬해 상서우승(尙書右丞)․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1034년 중추부사(中樞府使)가 되었다.

1035년(정종 1) 중추사(中樞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듬해 병부 상서(兵部尙書), 1041년 호경 유수사(鎬京留守使)․참지정사(參知政事), 1043년 내사시랑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후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황보항(皇甫抗) 명종(明宗) 때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 椿)․함 순(咸 淳)․이담지(李湛之)․조 통(趙 通) 등과 함께 시와 술로써 서로 즐겼다. 당시 이들은 중국의 강좌칠현(江左七賢)에 비해졌다.

황보탁(皇甫倬) 1154년(의종 8) 문과(文科)에 장원, 1178년(명종 8) 기거주(起居注)로서 춘주도 찰방사(春州道察訪使)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1186년(명종 16) 두차례에 걸쳐 전선(銓選)을 맡아보았다.

황보기(皇甫琦) ?~1285(충렬왕 11) 1245년(고종 32)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사신이 되어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따라 몽고에 다녀왔으며, 1252년 판대부사(判大府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57년(고종 44) 좌복야(左僕射), 이듬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고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황보안(皇甫安) 고려조(高麗朝)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냈다.

황보임(皇甫琳) 1333(충숙왕 복위 2)~1394(태조 3) 진주 목사(晋州牧使) 안(安)의 아들, 평장사(平章事) 안 우(安 祐)의 사위. 안 우의 휘하에서 여러번 전공을 세워 별장(別將)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부 시랑(工部侍郞)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종부령(宗簿令)을 지내고, 1363년(공민왕 12) 앞서 흥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다.

1374년(공민왕 23)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 최 영(崔 塋)의 휘하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난 제주(濟州)를 정벌, 1380년(우왕 6) 예의 판서(禮義判書)로서 전라도 병마사(全羅道兵馬使)가 되었다. 1382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영해군(寧海郡)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한 후 전주 부원수(全州副元帥)․안동 원수(安東元帥) 등으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의 우군(右軍)에 속하여 종군,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가담하여 1등공신에 오르고, 양광․경상․전라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남원(南原)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와 서북면 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평양윤(平壤尹)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밀직사(密直使)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 절제사(全羅道節制使)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황보인(皇甫仁) ?~1453(단종 1) 자(字)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號)는 지봉(芝峰), 시호(諡號)는 충정(忠定),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세종(世宗) 때 장령(掌令)․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1436년(세종 18) 병조 판서(兵曹判書) 가 되었으며, 1440년 평안․함길도 체찰사(平安咸吉道體察使)가 된 후 약 10년간에 걸쳐 절제사(節制使)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6진(鎭)을 개척했다.

그 후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1447년(세종 29)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으며, 1452년(문종 2)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문종(文宗)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단종(端宗)을 보좌하다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살해되고 두 아들 및 손자도 이때 같이 화를 입었다. 숙종(肅宗) 때 복관(復官),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종성(鍾城)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황보공(皇甫恭) 조선(朝鮮)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황보양(皇甫良) 조선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황보석(皇甫錫)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황보흠(皇甫欽)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황보은(皇甫銀)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황보단(皇甫湍) 조선에서 학자(學者)로 명성(名聲)을 떨쳤다.

황보순(皇甫淳)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많은 공(功)을 세웠다.

황보헌(皇甫憲) 조선 때 학자(學者)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황보민(皇甫旻)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다.

황보경(皇甫璟)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