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평해황씨,평해황씨시조,황낙,평해황씨유래, 평해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6-07 17:32 수정일 : 2018-09-04 15:49

평해황씨시조 및 평해황씨유래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始祖)는 중국(中國)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으로 서기 28(신라 유리왕 5, 한나라 광무제 4)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사신(使臣)으로 교지국(交趾國)에 가던 길에 풍랑(風浪)을 만나 안아진(安我鎭)에 표착(漂着)하여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황낙(黃洛)이다.

()의 후손에서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3형제가 있어 그 중 갑고(甲古)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溫仁)이 고려조(高麗朝)에서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냈고 평해(平海)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온인(溫仁)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면서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평해(平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진군(蔚珍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인데, 고려(高麗) 초에 평해(平海)로 고쳤고, 현종조(顯宗朝)에 예주(禮州:영해)에 속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때 평해군(平海郡)으로 삼았으며 1913년 울진군에 병합하여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平海面)으로 남아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온인(溫仁)8세손 희석(希碩)1388(고려 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으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어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졌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추증되었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정(有定)의 아들 현()은 세종(世宗)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조선 초기(朝鮮初期)의 대표적인 유학자(儒學者)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던 여일(汝一)은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후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명문인 평해 황씨(平海黃氏) 가문을 빛냈으며, 영조(英祖) 때 실학자(實學者) 윤석(胤錫)은 김원행(金元行)에게 글을 배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찬(翊贊)에 이르렀고, 그가 저술한 문집「이재유고(頣齋遺稿)」와「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國語硏究)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전국에 168,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평해황씨조상인물

황온인(黃溫仁)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 검교(太子檢校)를 지냈다.

황우정(黃佑精) 고려 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다.

황유중(黃裕中)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황진(黃 璡) 고려에서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

황서(黃 瑞) 고려(高麗) 때 평리(評理)를 지냈다.

황용(黃 墉)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고려(高麗) 때 숭록대부(崇祿大夫)․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황용기(黃龍起) 고려(高麗) 때 예빈정(禮賓正)을 지냈다.

황운기(黃雲起) 고려 때 내자소윤(內資少尹)을 지냈다.

황종양(黃宗亮) 고려에서 호부 전서(戶部典書)를 지냈다.

황태백(黃太白) 충경공(忠敬公) (#)의 아들. 고려조에 자헌대부로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지냈다.

황원로(黃元老)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다.

황문신(黃文信) 고려 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황길보(黃吉甫) 고려(高麗)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황계보(黃季甫)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황우(黃 祐) 고려조(高麗朝)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황관(黃 瓘) 고려 때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황근(黃 瑾) 고려 때 사예(司藝)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황현(黃 琄) 고려조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황득재(黃得載) 병사(兵使) 길보(吉甫)의 아들. 고려(高麗)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황득중(黃得重) 고려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황천록(黃天祿) 고려말(高麗末)에 판서(判書)를 지냈다.

황천상(黃天祥)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황천복(黃天福)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府事)를 지냈다.

황천계(黃天繼) 고려(高麗)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황유정(黃有定) 초명(初名)은 지정(知定).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황희석(黃希碩) ?1394(태조 3) 시호(諡號)는 양무(襄武). 1388(우왕 14) 요동 정벌(遼東征伐) 때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했고,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으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어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졌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추증(追贈)되었다.

황옥견(黃玉堅) 조선 때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황옥숭(黃玉崇) 조선조에서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황을석(黃乙碩) 조선 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황전(黃 銓) 전서(典書) 유정(有定)의 아들. 조선(朝鮮) 때 판서(判 書)를 지냈다.

황현(黃 鉉) 1372(공민왕 21)? 전서(典書) 유정(有定)의 아들. 1393(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 1407(태종 7) 직강(直講)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직예문관(直藝文館) 등을 역임한 뒤 세종(世宗) 초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1482(성종 13) 인수 부윤(仁壽府尹)을 겸했다. 학행(學行)이 뛰어난 당시의 대표적 유학자(儒學者)였다.

황상(黃 象)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찬성(贊成)을 지냈다.

황인(黃 麟) 평해군(平海君) 희석(希碩)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서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황곡(黃 鵠) 희석(希碩)의 아들.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황말손(黃末孫) 조선조(朝鮮朝)에서 사온서 주부(司溫署主簿)를 지냈다.

황진무(黃振武) 조선 때 충무위 호군(忠武衛護軍)을 지냈다.

황성옥(黃聲玉)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황준량(黃俊良) 1517(중종 12)1563(명종 18) ()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37(중종 32) 생원(生員)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앞서 부탁을 거절당했던 자가 언관(言官)이 되어 모함하자 외직(外職)을 자청, 신녕 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갔다가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지내고 1560(명종 15)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풍기 (豊基)의 우곡서원(愚谷書院), 신녕(新寧)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황응청(黃應淸) ()는 청지(淸之), ()는 대해(大海), 목사(牧使)()의 아들. 1552(명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천거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다시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장원서 별좌(掌苑署別座) 등에 임명되었을 때 4가지 시폐(時弊)를 개진(開陳)하여 왕에게 받아들여지자 진보 현감(眞寶縣監)에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했다.

얼마 후 벼슬을 내놓고 귀향, 조 목(趙 穆)․박 성(朴 惺)․이산해(李山海) 등과 교유하며 독서와 후진 양성으로 낙을 삼았다. 평해(平海)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황여일(黃汝一) 1556(명종 11)? ()는 회원(會元), ()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응경(應徑)의 아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1576(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 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98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서장(書狀)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1(광해군 3)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1617년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후 참판(參判)에 이르렀고, 평해(平海)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황도상(黃道尙) ()는 담포(澹圃), 평해군(平海君) 희석(希碩)11세손. 효성(孝誠)이 자극하여 친상을 당하자 조석으로 시묘(侍墓)하였고 두터운 신의(信義)로 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경북 청송(慶北靑松)에 담포정(澹圃亭)을 세웠다.

황선신(黃善身) 1570(선조 3)1637(인조 15) ()는 사수(士修). 1597(선조 30)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역임하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될 때 강화부 중군(江華府中軍)으로서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황윤석(黃胤錫) 1729(영조 5)1791(정조 15) ()는 영수(永叟), ()는 이재(頣齋), 김원행(金元行)의 문인.1759(영조 3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66년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벼슬이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순조(純祖) 때 도내(道內)의 사림(士林)에서 그의 사당을 세웠다. 그의 문집 「이재유고(頣齋遺稿)」의 권 25 및 잡저(雜著)에 들어 있는「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와 권 26에 들어 있는 「자모변(子母辯)」은 오늘날 국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황종흡(黃鍾翕) 1854(철종 5)1903(광무 7) ()는 원여(元汝), ()는 운파(雲坡), 동규(東奎)의 아들. 외전경사(外傳經史)를 읽어 대의(大義)에 정통했다. 고금 명가(名家)의 묵적(墨跡)을 보며 힘써 연마하여 글씨에도 대성, 특히 초서(草書)가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