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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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6-07 15:43 수정일 : 2019-12-05 14:00

장수황씨(長水黃氏)

1.장수황씨시조 및 장수황씨유래

① 시조(始祖)

장수황씨의 시조는 황경(黃瓊)이다. 1723년(景宗 癸卯)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 시조는 경(瓊)이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부(溥)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후일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당대 석학(碩學) 조인영(趙寅永)도 1831년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의 비문에 ‘신라(新羅) 상주(尙主 = 駙馬) 경(瓊)이 비로소 득성(得姓)하였다’ 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라는 문헌에 의하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무신(武臣) 구대림(丘大林)과 문신(文臣) 황락(黃洛)이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류하였는바 황락이 그곳에 거주하여 황씨(黃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라 되어있고, 그 차자(次子) 을고(乙古)가 장수황씨의 조상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文獻)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이 극에 달했던 조선 후기(後期)의 저술로 추정할 뿐 작자와 연대가 모두 미상하고 내용이 황당하여 장수황씨는 이를 하나의 전설로 생각할 뿐이다.

② 본관(本貫)

‘여지승람 전라도 장수현 성씨조(輿地勝覽 全羅道 長水縣 姓氏條)에 본현 황씨(本縣黃氏)라 되어있으며, 경(瓊)의 9세손(世孫) 공유(公有)가 고려 명종(明宗)때 무신(武臣)의 변(變을) 피하여 고향(故鄕) 장수(長水)로 돌아왔고, 다시 지방 관헌을 피하여 남원(南原)으로 옮겼다. 이어 후손이 이곳에 살았으니 광한루(廣寒樓)가 그 구기(舊基)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장수(長水)는 본래 백제의 우평(雨坪)이었는데, 신라때 고택(高澤)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남원부(南原府)에 속하게 하였다‘ 라고 같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명종(明宗) 이전의 고려시대부터 장수(長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방촌(厖村)이전의 세계(世系)

시조 경(瓊)으로부터 8세손까지의 기록은 없다.

9세손 공유(公有); 고려 명종때 전중감(殿中監)이었으나 무신의 변란을 피하여 장수로 귀향했고, 지방관헌(地方官憲)의 물색이 심하여져 다시 남원(南原)에 옮겨 이후 이곳에 거주하였다.

15세손 감평(監平); 태학생(太學生)으로 호는 일재(逸齋)이며 학덕이 높아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실려 있다.

18세손(中始祖, 1世); 석부(石富); 이조참의(吏曹參議).

이후 세계가 이어져 중시조(中始祖)로 하며 보첩(譜牒)상 1世로 한다.

2세 균비(均庇);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3세 군서(君瑞):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4세 중수(中粹);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7세손 이후 무후(無後)

희 (喜) ; 영의정(領議政)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4세에 비로소 형제가 되었으나 판중추부사 중수는 7세손 이후 무후(無後)되어 현재 장수황씨는 모두 황 희(黃喜)의 후손이다.

그는 아들 4형제를 두었는바 장(長)은 호안공(胡安公) 치신(致身)이요, 중(仲)은 증 한성소윤(贈漢城少尹) 보신(保身)이요, 숙(叔)는 열성공(烈成公) 수신(守身)이요 계(季)는 사직(司直) 직신(直身)으로 모두 벼슬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지파(支派)의 파조(派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에 살고 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는 170,98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3. 역대인물(歷代人物)-장수황씨조상인물

황희(黃 喜) : 1363년(공민왕 12) 2월 10일 송경 가조리(松京=開城 可助里)에서 판강릉부사(判江陵府使) 군서(君瑞)와 용궁 김씨(龍宮 金氏)의 차자(次子)로 태어나 90 향수(享壽)하고, 1452년(문종 2) 졸(卒)하였다.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號)는 방촌(厖村)이며 시호(諡號)는 익성(翼成)이다.

1376년(禑王 2) 음보(蔭補)로 복안궁 녹사(福安宮 錄事)가 되었고 138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恭讓王 元年)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高麗)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太祖)의 간청으로 1392년(太祖 元年)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우습유(右拾遺). 경원교수(慶源敎授). 경기도 도사(京畿道 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승정원 지신사(承政院 知申事)에 올랐으며 이후 태종(太宗)의 극진한 예우(禮遇)를 받았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 왕의 처족(妻族)이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거했고,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호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416년(태종 16)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세자(世子: 양녕대군)의 폐출(廢黜)을 반대하다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전임되었다.

14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으나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世宗) 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어 교하(交河)로 유배, 이어 남원(南原)에 이배(移配) 되었다.

1422년(세종 4) 풀려 나와서 좌참찬(左參贊)에 기용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의정(右議政)을 역임, 1427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했으나,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減刑)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

이듬해 복직,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이후 1449년 치사(致仕)할 때까지 18년간을 영의정(領議政)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禮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 받는 재상으로서 왕을 보좌했다.

시조(時調) 몇 수가 전하며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名臣)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고, 저서로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세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파주(城州)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황치신(黃致身) : 1397년(태조 6)~1484(성종 15). 영의정 희(喜)의 장남(長男).

초명은 동(董)으로 태종(太宗)께서 사명(賜名)하셨다가 후에 치신(致身)으로 개사(改賜), 자는 맹충(孟忠), 시호(諡號)는 호안(胡安).

음보(蔭補)로 공안부 부승(恭安府副丞)이 되고, 사재직장(司宰直長) 사첨주부(司瞻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호조좌랑(戶曹佐郞) 사해서령(司醢署令) 등을 역임. 1426년(세종 8)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이 되어 세도가(勢道家)들이 서민(庶民)을 노비(奴婢)로 삼은데 대한 송사가 50여년 누적된 것을 즉시 처결하여 모두 본래의 양적(良籍)으로 환원시켜 주었다.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등을 거쳐, 1433년(세종 15)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435년 예조참의(禮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고 1438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하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납세(納稅)하는 곡물(穀物)을 생산량(生産量)에 따라 내도록 세제(稅制)를 개혁(改革)하여 백성들의 불평(不平)을 해소하였다. 경창부윤(慶昌府尹),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44년(세종 26)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했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경질되었다.

1454년(단종 2)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비부(秘府)의 송사(宋史) 1질(帙을) 얻어 와 나라에 헌상하였다. 1457년(세조 2)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명장(名將)의 위풍을 떨쳤으며, 1461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아들 9형제를 두었는바 그 중 사장(事長) 사형(事兄) 사공(事恭) 사경(事敬)은 무과, 사효(事孝)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 領經筵監春秋館事)에 증직(贈職)되고, 호안으로 증시(贈諡) 되었다.

황보신(黃保身) : 1401년(태조 1)~1456(세조 1) 자(字)는 중전(仲全) 영의정 희(喜)의 차남(次男)

음사(蔭仕)로 사헌부 감찰(監察) 호조정랑(戶曹正郞) 호군(護軍)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

1441년(세종 23년) 상주 모동면 수봉리(尙州 牟東面 壽峰里)에 은거(隱居), 수신제가(修身齊家)와 후진의 교육(敎育)에 힘썼다.

1457년(세조 2)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한성소윤(漢城少尹)에 추증(追贈)되고, 중종조(中宗朝)에 증손 맹헌(孟憲)이 정국훈(靖國勳)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어 삼대추영(三代追榮)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황수신(黃守身) : 1407( 태종 7)~1467(세조 12) 자(字)는 계효(季孝), 호(號)는 췌부(惴夫), 시호(諡號)는 열성(烈成), 영의정 희(喜)의 3남.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에서 시관(試官)에게 모욕을 당한 뒤 과거를 외면하고 분발하여 학문에만 힘썼다. 음보(蔭補)로 종묘서부승(宗廟署副丞)이 된 뒤 1431년(세종 13) 사헌부 감찰 (司憲府監察) 1432년 지평(持平) 겸 호조정랑(戶曹正郞) 1433년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다.

1437년 전라도 경차관(敬差官), 이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상호군(上護軍)등을 역임하고 1443년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47년 도승지(都承旨)가 된 후 파당을 만들어 싸움을 조장한다는 무고를 받아 한때 삭직(削職) 당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성부윤(漢城府尹) 병조참판(兵曹參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거쳐 1455년(세조 1)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좌참찬(左參贊)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승진, 1457년 판예조사를 겸임했다. 1459년 충청도 도순문사(忠淸道都巡問使)가 되어 규휼에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 남원부원군(輔國崇祿大夫 南原府院君)이 되었다.

1464년 명나라 황제 헌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가게 될 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에 임명되어 다녀왔고, 1466년 좌의정(左議政), 이듬해 영의정 (領議政)에 올랐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황사장(黃事長) : 호안공 치신(致身)의 제2자(第二子) 무과(武科)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안동대도호부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兼 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황사효(黃事孝) : 호안공 치신(致身)의 제6자(第六子). 시호 : 양정(良靖)

1477년(성종8 丁酉) 식년 병과(式年 丙科) 급제. 사인(舍人) 직제학(直提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황평양도선위사(黃平兩道宣慰使) 예조판서(禮曹判書)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역임. 아들 탄(坦)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翼運靖國功臣) 장산군(長山君)에 봉해지면서 장원군(長原君)에 추봉(追封)되고 증시(贈諡)되었다.

황사경(黃事敬) : 1452년(문종 2)~ 1531년(중종 26) 호안공 치신(致身)의 제9자(第九子)

1489년(성종 20) 기유 무과(己酉 武科) 급제 1499년(연산 5) 출사(出仕), 부장(部將) 주부(主簿) 감찰(監察) 역임. 1507년(중종 2)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이과(李顆)의 난 평정에 공이 있어 추성보사정난 원종공신(推誠保社靖難 原從功臣)에 책록, 1등급 가자(加資)되어 현신교위(顯信校尉) 창평현령 (昌平縣令)이 되었으며 1531년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사후에 전공(前功)으로 통정대부 (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증직(贈職)되었다.

황관(黃 瓘) : 한성소윤 보신(保身)의 손자. 호; 송암(松岩). 1465(世祖 乙酉) 진사(進士). 진보군수(眞寶郡守) 함안군수(咸安郡守)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장원군(長原君)

황단(黃 慱) : 경상병사 사장(事長)의 증손. 자(字)는 중약(仲約). 1532년(중종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동래부사(東萊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등을 지냈다.

황염(黃 恬) : 병사 사장(事長)의 증손. 자(字)는 태숙(泰叔). 1520년(중종 1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등을 역임, 1529년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 暗行御史)를 지내고 1544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황맹헌(黃孟獻) : 1472(성종 3)~1535년(중종 30). 부사(府使) 관(瓘)의 아들. 자(字)는 노경(魯卿). 호(號)는 월헌(月軒), 시호(諡號)는 소양(昭襄).

1498년(연산 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 이듬해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지내고, 1511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뒤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15년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 울산군수(蔚山郡守)를 지냈다. 문장 글씨로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

황여헌(黃汝獻) : 1486년(성종 17)~1566년(명21). 부사(府使) 관(瓘)의 아들.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유촌(柳村). 1509년(중종 4)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문장(文章)과 글씨에 능했다.

황효헌(黃孝獻) : 1491성종 22)~1532(중종 27). 부사(府使) 관(瓘)의 아들.

자(字)는 숙공(叔貢), 호는 축옹(蓄翁)․ 현옹(玄翁 )․ 愼齋(신재), 1514년 (중종 9) 진사(進士) 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515년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후 제학 (提學)을 지냈다.

1530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이행(李荇)등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을 편찬했고,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황열(黃 悅) : 1501년(연신 7)~1575년(선조6). 병사 사장(事長)의 증손

자(字)는 중흡(仲洽) 호(號)는 정관(靜觀). 1536년(중종 3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황정욱(黃廷彧) : 1532(중종 27)~1607(선조 40). 오위장 열(悅)의 아들. 자(字)는 경문(景文), 호(號)는 지천(芝川),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 (史官)이 되고, 정언(正言) 응교(應敎) 문학(文學) 집의(執義)등을 역임,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 (晋州牧使)를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辦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 사명을 완수하고 개정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 을 확인한 후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임되고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弘文館 藝文館 大提學)에 겸임제수(兼任除授)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玒)를 배종(陪從)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義兵)을 소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會寧)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잡혀 안변(安邊) 토굴(土窟)에 감금되었다.

포로로 있을 때 왜장(倭將) 가또오(加藤淸正)로부터 선조(宣祖)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쓰라고 강요를 받고 이를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赫)이 대신하여 썼다.

이에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항복 권유문 만을 보내고 다른 한 장은 묵살함으로써 이듬해 부산(釜山)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앞서의 항복 권유문 때문에 반대파인 동인(東人) 들의 탄핵을 받고,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

1597년 석방되었으나 복관(復官) 되지 못한 채 죽었다. 문장(文章) 시(詩) 서예(書藝)에 능했다. 뒤에 신원(伸寃)이 되었다.

황윤길(黃允吉) : 1536(중종 31)~1592년(선조 25) 현령 사경(事敬)의 손자

자(字)는 길재(吉哉), 호(號)는 우송당(又松堂).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1563년 정언(正言)을 거쳐 1567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5년(선조 18)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1590년(선조 23)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도요또미(豊信秀吉)의 내심(內心)을 살피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반드시 일본의 내침(來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그렇지 않다는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당시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했으므로 서인(西人)인 그의 의견보다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그의 말을 쫓지 않았음을 크게 후회했다 한다.

황진(黃 進) : 1550년(명종 5)~1593년(선조 26). 양정공 사효(事孝)의 증손.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아술당(蛾述堂), 시호(諡號)는 무민(武愍).

1576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1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그들의 침공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 1592년 동복현감(同福縣藍)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찰사를 따라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北上) 용인(龍仁)에서 왜병과 접전 했다.

이어 진안(鎭安)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先鋒將)을 사살하고 적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 하였으며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어 이치(梨峙) 싸움에서 적을 격퇴, 그 공으로 익산 군수 (益山郡守) 겸 충청도 조방장(忠淸道助防將)에 오르고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 에서 싸웠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승진, 적병을 쫓아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했으며, 적의 대군이 진주(晋州)를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가 고수(固守) 9일간이나 역전하다가 전사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중(追贈) 되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南原)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황혁(黃 赫) : 1551(명종 6)~1612(광해군 4). 문정공 정욱(廷彧)의 아들

자(字)는 회지(晦之), 호(號)는 독석(獨石), 기대승(奇大升)의 문인. 1570년(선조 3) 진사(進士)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그 뒤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 다가 1591년(선조 24) 정 철(鄭 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될 때 그 일당으로서 삭직(削職) 되었다 .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에 등용되어 아버지 정욱(廷彧)과 함께 사위인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玒)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회령(會寧)에 이르렀으나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왜군에 인계되어 안변(安邊)의 토굴(土窟)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장(慶將) 가또오(加購淸正)로부터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 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몰래 별도로 아버지 정욱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글을 보냈는데, 1593년 부산(釜山)에서 두 왕자와 함께 송환된 후 항복 권유문을 트집잡은 동인(東人)들의 탄핵으로 이산 (理山)에 유배 뒤에 신천(信川)에 이배(移配) 되었다.

앞서 이이첨(李爾瞻)을 풍자시(諷刺詩)로 공격한 일로 그의 미움을 받아 1612년(광해군 4)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 晋陵君) 태경(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어 옥사(獄死)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관(復官)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장천군(長 川君)에 추봉(追封) 되었다.

황즙(黃 葺) : 1560(명종 15)~1613(광해 5) 현령. 사경(事敬)의 증손. 자(字)는 문보(文輔) 호는 송재(松齋) 또는 칠우당(七友堂).

1590년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종사관(從事官)으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을 수행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충청도 비인(忠淸道 庇仁)으로 이거하여 구빈(救貧) 구휼(救恤)과 교화사업(敎化事業)을 펼쳤다. 정유재란(丁酉再亂) 기간중인 1597~1600년간에는 군수물자(軍需物資)의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순천(順天)에 주둔한 명병(明兵)이 조선 정부에 군량(軍糧) 보급을 요청하였다. 총관사(摠管使) 한효순(韓孝純)이 공(公)에게 조달을 청하여 관민(官民)의 원성(怨聲) 없이 백미 600석(石)을 마련하여 순천에 직송하였다. 한효순이 이 사실을 상주(上奏)하니 왕이 그 공(功)을 찬양하고 1599년 3월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을 제수하였다. 이어 충청순찰사(忠淸巡察使) 장만(張晩)이 충청도에 배당된 정철(正鐵)의 조달에 고심하므로 공이 4000근(斤)을 수집(蒐集)하여 바쳤다. 이 사실도 상주되었으나 포상(褒賞)되기 전에 졸(卒)하였다. 전후의 이런 공로(功勞)가 다시 논의되어 1616년(광해군 8) 4월 30일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유고(遺稿)를 남겼다.

황위(黃 暐) : 1605(선조 38)~1654(효종 5). 무민공 진(進의) 손자

자(字)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정홍명(鄭弘溟)의 문인. 1633년(인조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困子胡亂) 때 남원(南原)에서 의병 수천명을 모집 과천(果川)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63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고,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김상헌 (金尙憲)이 친청파의 배격을 받자 이를 논구(論救) 하려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함경도사( 咸鏡都事)로 기용, 평양서윤(平讓庶尹)에 이르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 남원에 정문(雄門) 이 세워졌으며, 남원의 풍계사(楓溪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황신구(黃信龜) : 1633년(인조 11)~1685(숙종 11) 정언(正言) 위(暐)의 아들.

자(字)는 석여(錫汝), 호는 운계(雲溪), 경전(經傳) 연구에 힘써 내성록 (內省錄)을 저술했으며 벼슬은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조지서 별제(造紙暑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남인(南人)들이 제2차 복상 문제로 장기(長鬐)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예율(禮律)로써 종묘(宗廟)에 보고하려 할 때, 호남(湖南) 유생들의 위촉으로 송시열의 도덕의 본말을 역진(力陳)하고 남인들의 잘못을 공격하는 소문(疏文)을 작성했다. 남원(南原)의 고암서원(高嚴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황엽(黃 曄) : 1666( 현종 7)~? 자(字)는 회중(晦中) 주부(主簿) 효겸(孝謙)의 증손.

어려서 육예(六藝)를 배우고 특히 예서(禮書) 악서(樂書)에 정통했고, 의학(醫 學)에도 밝아 맥(脈)을 짚어보고 생사를 판단했다. 우리나라 지리에도 극히 정통하여 여지도(與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했다..

황익재(黃翼再) : 1682년(숙종 8)~1747년(영조 23). 소윤 보신(保身)의 9세손. 자(字)는 재수(再叟), 호는 백화재(白華齋).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23년(경종 3) 장령(掌令)이 되고, 영조(英祖) 초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낸 뒤, 한때 사직하였다 .

1728년(영조 4)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이인좌(李麟佐)의 반란 소식을 듣고 지평(砥平)에 이르러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 박사수(朴師洙)를 만나 함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때 영남에서 또 적변(賊變)이 있어 체포된 적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와 구성(龜城)에 유배되고, 7년간 배소(配所)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1736년 풀려나와 주계(朱溪)에 은거했다. 상주(尙州)의 봉산사(鳳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황선(黃 璿) : 1682(숙종 8)~1728(영조 4). 문정공 정욱(廷彧) 7세손. 자(字)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시호는 충렬(忠烈), 1710년(숙종 36) 진사( 進土 )가 되고, 같은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待講院說書)를 지낸 뒤 1719년 (숙종 45)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정사(正使)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가자(加資)되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무장(茂長)에 유배, 이어 양덕(陽德)에 이배(移配) 되었다가 다시 1725 년(영조 1) 평산(平山)에 이배된 후 석방,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서 분전(舊戰), 이를 진압하고 그날 밤에 죽었다.

황정(黃 晸) : 1689(숙종 15)~1752(영조 28). 병사 사장(事長)의 9세손. 자(字)는 양보(陽甫)

1717년(숙종 43) 진사(進土)가 되고, 1719 년(숙종 4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 ․ 지평(持平)을 지냈다.

1723년(경종 3)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가 변방의 방비를 굳게 했으며 우부승지(右副承旨)․ 병조 참지(兵曹參知)․ 예조 참의(禮費參議)를 지냈다. 그후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시켰고, 1749년(영조 25)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라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전임하여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했다.

1751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를 겸하여 경상도의 곡식을 실어다 빈민을 구제하고 농경(農耕)을 장려하며 유민(流民)올 막고 이도(吏道)를 쇄신했다.

황경원(黃景源) : 1709(숙종 35)~1787(정조 11). 문정공 정욱(廷彧) 8세손. 자(字)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江漢), 시호는 문경(文景), 이 재(李 縡)의 문인. 1727년(영조 3) 생원(生員)이 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 174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그 뒤 검열(檢閱)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지내고 1749년(영조 25)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명나 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영조에게 건의, 이를 실시케 했고,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대사헌 (大司憲) 겸 대제학을 지냈다 .

1761년(영조 37)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고서(姑壻) 이 정(李 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이듬해 합천(陜川)에 이배(移配) 되었다.

유현(儒賢)으로서 특히 왕명으로 고향에 방환(放還) 후 복관(復官)되어 1763년 풍천부사(豊川府使)가 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대제학(大提學), 이어 형조 예조 공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1776년 정조 즉위 초 이조판서에 이어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삼례(三禮: 예기․주례 의례)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 밝았으며, 일찍이 장정옥(張廷玉)의 명사(明史)를 읽고 홍광제(弘光帝)이하 3제(三帝)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했으며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절의를 지킨 사람을 들어 명조배신고(明朝陪臣考)를 지었다. 글씨를 잘 썼다.

황승원(黃昇源) : 1732년(영조 8)~1807(순조 7). 문정공 정욱(廷彧)의 8세손

자(字)는 윤지(允之), 시호는 문헌(文獻), 형조좌랑(刑曹佐郞) 환(瓛)의 아들. 종형 경원(景源)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765년(영조 41) 생원(生員)이 되고, 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3년 정언(正言)으로 양사(兩司) 합계(合啓)로 조영순(趙榮順)의 처벌을 상소하는 대론(臺論)에 참여하지 않아 흑산도(黑山島)에 장류(杖流)되었다.

1781년(정조 5)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大司成)․ 이조참판(吏曹參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내고 순조 (純祖) 초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로서 강화 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이던 은언군(恩彦君) 인(#)의 탈출사건이 일어나 파직 당했다.

1806년(순조 6)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 이듬해 상호군(上護軍)으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앞서 1798년(정조 22) 한남루기 (漢南樓 記)를 지었다.

황경여(黃敬汝) :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황현(黃 玹) : 1855년(철종 6)~1910. 정언 위(暐)의 8세손. 자(字)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1885년(고종 22)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했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향리에 은퇴했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 때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이듬해 매천집(梅泉集)이 영남 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출간되었고, 한말의 역사를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황의돈(黃義敦) : 1887(고종 24)~1964. 승지 즙(葺)의 9세손. 호(號)는 해원(海圓). 한학(漢學)과 사학(史學)을 연구하고 1908년(융희 2) 만주 간도(間島)의 명동서 숙(明東書塾)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 교원이 되어 국사를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

그 후 휘문의숙(徵文義塾) 보성학교(普成學校) 중동학교(中東學校) 등의 교원을 지내고 1938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에 입사 언론계에 종사했다. 1945년 문교부 편수관이 되고, 단국대학(檀國大學)․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사(韓國史)에 관한 많은 논문을 남겼으며, 1962년 동국대학교대학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文化勳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