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상주황씨시조(尙州黃氏),황석주(黃石柱),상주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6-03 14:42 수정일 : 2018-03-04 20:15

황씨의 득성연원

황씨(黃氏)의 득성 연원(得姓 淵源)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 확실(確實)하게 고증(考證)이 된것은 없고 황씨(黃氏)의 발생지(發生地)인 중국(中國)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삼황(三皇), 오제(五帝)중 의 한사람인 황제 헌원씨(皇帝 軒轅氏)의 후예(後裔)라고 하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물론 일설(一說)에는 헌원씨(軒轅氏)는 이름이고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는 말도 있고 또 타설(他說)에는 동 황제(皇帝)의 성(姓)이 모두가 14성(姓)인데 그 중에 황씨 성(黃氏姓)도 포함되어 있다고도 한다.

세계(世界)의 삼대 문명의 발상지(發祥地)의 하나라고 하는 중국의 황하유역(黃河流域)을 중심으로 아득한 옛날에 원시씨족(부족)사회(原始氏族(部族)社會)를 국가(國家)로 통합(統合)하여 통치(統治)하여온 셋 황제인 삼황(三皇)(太昊伏義氏. 女媧氏. 炎帝神農氏 또는 天皇. 地皇. 人皇)과 다섯 제왕(帝王)인 오제(五帝)(皇帝軒轅氏. 顓頊(전욱)高楊氏. 帝嚳(곡)高辛氏. 帝堯陶唐氏. 帝舜有虞氏.)는 모두 성군(聖君)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며 특히 황씨(黃氏)의 원시조(元始祖)라고 알려진 헌원씨(軒轅氏)는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데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으로 창(槍)과 방패(防牌)를 만들어 신농씨(神農氏)를 패(敗)하고 중원(中原)의 여러 제후(諸侯)와 씨 부족국가(氏 部族國家)를 정벌(征伐)하여 거대(巨大)한 국가를 형성하여 재위(在位)110년에 이르렀다고 하며 재위기간 중 많은 문물(文物)을 일으켜 백성(百姓)을 잘 다스렸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황제의 능(陵)은 합서성 황능현 교산(陜西省 皇陵縣 橋山)에 있고 사당(祠堂)인 헌원묘(軒轅廟)는 하남성 신정시 신점진(河南省 新鄭市 辛店鎭) 근처 구자산 산정(具茨山 山頂)에 있으며 문명(文明)의 개조(開祖)로 추앙(推仰)되고 있다.

여하튼 황제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려 오고 있었으며, 그 후손 백익(伯益. 一說 黃氏의 元祖)의 증손자(曾孫子)인 육종씨(陸終氏)가 상조 말기(商朝 末期) 또는 주조 초기(周朝 初期)에 황국(黃國. 黃子國)(현 中國 河南省 潢川縣)땅에 왕후(王侯)로 봉작(封爵)이 되어 비로소 그 지명(地名)에 따라 후손들이 황씨(黃氏)라는 성(姓)을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전하여 지고 있다.

황국(黃國)은 그 후 초(楚)에 의하여 멸망(滅亡)되었는데, 그 유적(遺跡)으로 중국 하남성 황천현에서 서쪽으로 6Km 떨어진 회하(淮河)의 남쪽 강변과 소황하(小黃河)의 서쪽 강변에 위치한 황국 고성(黃國 古城)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황국(黃國)이 멸망(滅亡)한 후 유민(遺民)들은 남북(南北)으로 흩어저 호북(湖北) 강서(江西) 사천지방(泗川地方)으로 도망을 가서 살았고 또 현재의 호남성지역(湖南省地域)으로 강제이주(强制移住)하여 살았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강하현(江夏縣. 현 湖南省 武昌縣. 漢曰 汝南) 일대(一帶)에서 황씨(黃氏)가 발전(發展)하고 번성(繁盛)하였다고 하며 현재 매년(每年) 각국(各國)을 순회(巡廻)하면서 개최(開催)되고 있는 세계황씨종친회(世界黃氏宗親會)에 참여(參與)하고 있는 세계각국(世界各國)의 모든 중국계황씨(中國系黃氏)는 강하황씨(江夏黃氏)로 본관(本貫)이 통일(統一)되어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都始祖)이신 휘 락(諱 洛. 兄弟로 諱 海. 諱 湖가 있었다고 함)조(祖)도 그 후손(後孫)임이 틀림이 없음으로 엄격(嚴格)히 그 부계혈통(父系血統)을 따진다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황씨(黃氏)도 모두가 중국의 강하황씨(江夏黃氏)의 후예(後裔)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황씨연원(黃氏淵源)

우리나라(大韓民國)에 현존(現存)하는 황씨성(黃氏姓)을 가진 사람은 약 70만명이 된다고 하며, 다수설(多數說)에 의하면 후한 광무제건무(後漢 光武帝建武)4년 서기28년 신라 유리왕(儒理王)8년(戊子年)에 한(漢)나라 유신(儒臣)(一說 學士) 휘 락(諱 洛)공은 중국 보송(補松)이라는곳에서 무관(武官)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구대림(丘大林)등과 벌주(筏舟. 뗏목)을 타고 교지국(交趾國. 현 월남)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풍랑(風浪)을 만나 표류(漂流)하다가 예국(濊國) 기성(箕城. 新羅 安北府 安戒律. 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월송포 월송봉(月松浦 月松峰) 남쪽 기슭에 있는 굴산북원(掘山北原) 동변 사안(沙岸)에 상육하여 그 후손(後孫)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각처에 세거(世居)하였으니, 휘 락(諱 洛)공이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원조(元祖) 할아버지인 도시조(都始祖)이시다.

도시조(都始祖)의 휘자(諱字)가 락(洛)자(字)인 점(点)에 대하여는 각 파벌(派閥)간에 다툼이 없으나, 그 관작(官爵)과 우리나라에 도래(到來)한 이유(理由)및 시기(時期)등에 대하여는 소수이설(少數異說)도 있으며, 그 중 우리 상주황씨(尙州黃氏) 초간족보(初刊族譜)에는, 휘 락(諱 洛)공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천보년간(天寶年間)(서기742 - 755. 신라 景德王 1-14年사이)에 승상(丞相)직으로 있다가 중국 절강지방(浙江地方)에서 우리나라에 도래(到來)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추측(推測)해 보면 우리나라에 도래한 이유는 당(唐)나라 6세왕(世王)인 현종14년11월에 중신(重臣) 안록산(安祿山)이 반란(叛亂)을 이르켜 현종은 사천(泗川)으로 몽진(蒙塵)을 하였고 왕비(王妃)인 양귀비(楊貴妃)는 주살(誅殺)되었으며 조정(朝廷)은 산재각처(散在各處)가 되어 고관(高官)들은 각지로 피신하였거나 외국(外國)으로 피난을 간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도시조인 휘 낙(諱 洛)공도 승상(丞相)으로서 반란군을 피하여 신라(新羅)땅으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진주정씨(晋州鄭氏)의 시조공(始祖公)도 이와 같은 경로를 밟아 본방(本邦)에 내도한 기록(記錄)이 있기에, 우리 족보의 내용도 신빙성(信憑性)이 있는 사실(史實)이라 할수 있다고 1991년2월 족보서문(族譜序文)을 쓴 문학, 교육학 박사 한갑수(韓甲洙) 서울대학교 교수가 논술(論述)하고 있다.


상주황씨 득관유래(尙州黃氏 得貫由來)

우리나라에 거주(居住)하는 모든 황씨(黃氏)는 엄격(嚴格)히 그 혈통(血統)을 따진다면 중국(中國) 강하황씨(江夏黃氏)의 후예(後裔)이기 때문에 모두가 강하황씨(江夏黃氏)가 되어야 하는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境遇)라도 우리의 도시조(都始祖)와 그 자손(子孫)들이 평해(平海)에 세거(世居)하였다면 세거지(世居地)인 평해(平海)가 본관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나, 문헌(文獻)에 의하면 도시조의 자손(子孫)이 오랜기간동안 관향(貫鄕)이 없이 대(代)를 이어오다가 고려중엽(高麗中葉)경?에 분파(分派)를 해서 본관(本貫)을 창시(創始)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것이므로 우리 일족(一族)도 고려말엽(高麗末葉)경에 세거지(世居地)인 상주(尙州)를 본관(本貫)으로 정(定)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일족(一族)이 본관(本貫)을 상주(尙州)로 득관(得貫)한 유래(由來)에 대하여 알아 보면 초간족보(初刊族譜) 발간(發刊)때 보다 57년이나 앞선 숙종(肅宗)46년(1720년)에 외손(外孫)인 수록대부 해창위 오태주 시 문효공(綏祿大夫 海昌衛 吳泰周 諡 文孝公. 書藝家. 顯宗의 딸 明安公主의 男便)의 유필(遺筆)로 그 아우 금성현령(金城縣令)오진주(吳晉周)공이 세운 휘 우한(諱 佑漢) 대사헌(大司憲)공의 묘표(墓表)에 소윤 증호조참판 을구 시거 상주 수위상주인(少尹 贈戶曹參判 乙具 始居 尙州 遂爲 尙州人)이라고 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요지(要旨)의 글이 초간족보(初刊族譜)에 기록이 된것으로 보아 상주황씨(尙州黃氏) 4세조(世祖)이신 소윤(少尹) 휘 을구(諱 乙具. 族譜상 乙耈)공이 상주(尙州)에 거주(居住)하기 시작(始作)하여 이어 살았기 때문에 그 자손(子孫)들이 관향(貫鄕)을 상주(尙州)라고 정(定)하게 된것이라고 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4세조(世祖)이신 소윤(少尹)공이 시관조(始貫祖)이시며 7세조(世祖)이신 휘 효원(諱 孝源) 시 양평(諡 襄平)공에게 세조(世祖)께서 양평공 부조(襄平公 父祖)이상 선조의 세거지(世居地)인 상산(商山. 尙州 舊號)을 따서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封君)을 한 것을 보더라도 우리 일족은 상주(尙州)가 관향(貫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시점(現時點)에서 파악(把握)이 되고 있는 상주황씨종인(尙州黃氏宗人)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단 平海黃氏 一派인 尙州黃氏 除外) 양평공(襄平公)의 직계후손(直系後孫)이며, 현재의 문경군 농암면 궁기리(聞慶郡 籠岩面 宮基里(古毛里)) 일대지역(一帶地域)이 옛날에는 상주속현(尙州屬縣)으로서 관향 발상지역(貫鄕 發祥地域)으로 확실시(確實視)되므로 그 지역(地域)의 무주고분(無主古墳)을 답사(踏査)한후 상주황씨 관향발상지(貫鄕發祥地)로 지정(指定)을 하여 설단(設壇)을 하는등 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진행을 위하여 매년 그곳 고분을 둘러보고 모색(摸索)을 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 평해황씨(平海黃氏) 일파(一派)인 상주황씨(尙州黃氏)의 내력(來歷)

평해황씨 시조(始祖)이신 휘 온인(諱 溫仁) 금오장군(金吾將軍)의 후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휘 세명(諱 世明)공께서 상주(尙州)에 거주하다가 제주도(濟州道)에 들어온 것을 길이 기억하고자 그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상주(尙州)로 정하였다고 하며 수백명에 불과 하다고 하지마는 우리 일족(一族)과 엄연히 구별(區別)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시조(始祖)의 사적(事蹟)

엄격(嚴格)히 말해서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시조(始祖)는 도시조(都始祖)이신 휘 락(諱 洛) 승상공(丞相公)이지마는 도시조(都始祖)께서 평해(平海)에 오신 신라조(新羅朝)때부터 고려조 중엽(高麗朝 中葉)까지의 천기백년간(千幾百年間)에 그 자손(子孫)들의 계대(繼代)나 행적(行蹟)이 문헌(文獻)에 뚜렷이 남아 있지 않고 있어 지금(只今)으로서는 그 공백 기간(空白 期間)에 우리 황씨가문(黃氏家門)의 내막(內幕)을 고증(考證)할 길이 없으나, 고려조(高麗朝)에서 황주량(黃周亮)공과 같은 명재상(名宰相)외에 역사(歷史)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학자(學者)분등 몇 분이 계시는데, 모두가 관향(貫鄕)이 없는 황씨이기 때문에 어느 관향에 속하는 선조(先祖)인지 알 수가 없고 보면, 혹시(或是) 그 할아버지들께서 우리 상주황씨가문(尙州黃氏家門)의 상계조(上系祖)일수도 있다는 것 이고, 그 개연성(蓋然性)을 뒷 바침 하는 것으로는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尙州黃氏初刊族譜)에 “우리 선조(先祖)께서 고려조정(高麗朝廷)에서 대대(代代)로 현관 요직(顯官 要職)을 열역(閱歷)하셔서 명망(名望)이 일세(一世)에 자자(藉藉)하였으나 보책(譜冊)과 기록(記錄)이 전하여진 것이 없어서 알길이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初刊族譜)에 따르면 일세조(一世祖)이신 “휘 석주(諱 石柱)공은 고려조(高麗朝)에 입사(入仕)하여 시중(侍中)벼슬을 역임(歷任)하시고 직계(職階)가 상주국(上柱國. 正2品)에 이르신 분이기는 하나 그 이상(以上) 세대(世代)의 명휘(名諱)를 알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종중(宗中)이 상의(相議)한 결정(決定)에 따라 묘표(墓表)에 쓰여저 있는 비문(碑文)을 쫓아 석주(石柱)공을 시조(始祖)로 쓰지 않고 일세(一世)라고 등재(登載)하였는데 이는 신중(愼重)을 기(期)한다는 의미(意味)에서 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을 뿐이므로 일세조(一世祖)의 구체적(具體的)인 사적(事蹟)에 대하여 현재(現在)로서는 알길이 없다.


중시조의 사적(中始祖의 事蹟)

우리 상주황씨 가문(家門)의 시조(始祖)라고 할수 있는 일세조(一世祖) 휘 석주(諱 石柱) 상주국(上柱國)공에 대한 사적(事蹟)은 관직(官職)만 전하여 질뿐, 그 사적(事蹟)이 기록된것이 없으므로 중시조(中始祖)이신 휘 효원(諱 孝源) 시 양평(諡 襄平)공의 사적(事蹟)을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중시조의 최종직함(最終職銜)은 추충좌익공신 순성좌리공싱 청백리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좌빈객 봉조하 상산군 증시 양평(推忠佐翼功臣 純誠佐理功臣 淸白吏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子左賓客 奉朝賀 商山君 贈諡 襄平)공이시다.

공(公)께서는 1414년인 태종(太宗)14년(甲午年) 탄생(誕生)하셨으며 자(字)는 사행(士行)이고 호(號)는 소원(少原. 沙原)이며 증순충 적덕보조공신(贈純忠 積德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 휘 사간(諱 士幹)공이 부친(父親)이시고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오씨(海州吳氏)가 모친(母親)이시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내신 휘 하신(諱 河信)공이 조부(祖父)이시다. 공께서 탄생(誕生)하시던 해에 부공(父公)께서는 천인상감지도(天人相感之道)라는 과제(科題)에서 영상(領相)을 지낸 정인지(鄭麟趾)공등과 함께 약관(若冠)19세의 나이로 대과(大科. 文科)에 급제(及第)하신 천재(天才) 이셨다.

공께서는 용모(姿貌)가 단중(端重)하시고 풍의(風儀)가 수랑(秀朗)하시며 처신(處身)과 행사(行事)하심이 범인(凡人)과 크게 다른지라 당시(當時)의 주위사람들이 다같이 경대(敬待)하였다.

3세때 부친(父親)이신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께서 21세의 젊은 나이에 홍문관(弘文館) 정자직(正字職)으로 재임 중에 두환(痘患. 天然痘)로 아깝게 하세(遐世)하시니 공께서는 친상(親喪)을 당하여 시종범절(始終凡節)과 법도(法度)에 맞게 3년상(3年喪)을 치루고 어머님을 섬기시며 화기(和氣)있고 즐거운 빛으로 그 뜻을 받들어 가사범백(家事凡百)에 어머님의 뜻에 순종(順從)하는 한편 학문(學文)을 닦으실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때의 대유학자(大儒學者)인 동중서(董仲舒)와 당(唐)중엽의 대문호(大文豪)인 한창여(韓昌黎)등의 업적(業績)과 가르침등을 일심(一心)으로 각고정려(刻苦精勵)하시니 필경은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를 이루시고 예림(藝林)에 그 명성을 떨치셨다.

공께서는 이와같이 절차탁마(切磋琢磨)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쌓아 1444년(세종26년 갑자년)에 임인 풍속 형벌 호구 역민(任人 風俗 刑罰 戶口 役民)이라는 과제(科題)에서 대과(大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시어 그 명성(名聲)을 세상(世上)에 널리 알렸는데 그때 춘추(春秋)가 31세이셨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은영연(恩榮宴)을 베푸심에 공께서는 문과(文科) 33명 무과(武科)28명의 합격자(合格者)를 대표하여 충성(忠誠)을 맹서(盟誓)하는 명 전문(名 箋文)을 지어 바치셨다.

그리하여 초임(初任)으로 종6품 참상(參上)인 예빈시 주부(禮賓寺 主簿(현재의 儀典官)을 제수(除授)받고 곧 이어 사정기관(司正機關)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좌헌납(左獻納)에 승직이 되었으며 문종(文宗)때에 예조정랑(禮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치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이 되셨고 단종(端宗)때에 의정부 검상(議政府 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승직이 되고 단종(端宗)3년에 정3품(正3品)인 사복시윤(司僕寺尹) 겸 보문각 판교(寶文閣 判敎)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수충위사동덕(輸忠衛社同德) 좌익3등공신(佐翼3等功臣)의 록훈(錄勳)과 함께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겸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고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처 세조(世祖)3년에 종2품(從2品)인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직(陞職)이 되어 그해 8월25일 성절사 및 천추사(聖節使 및 千秋使)로 명(明)나라에 가셨다가 돌아 오셔서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체직(遞職)이 되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셨다.

공은 세조4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직을 제수받았으며 곧이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겸 보문관제학(寶文館提學)으로 체직(遞職)이 되고 그후 다시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를 거처 예조참판(禮曹參判), 경기도 도관찰사(京畿道 都觀察使), 다시 한성부윤(漢城府尹), 인순부윤(仁順府尹),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 都觀察使)를 지나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직이 되면서 원각사 제조(圓覺寺 提調)직과 겸직으로 보신각 주조제거감(普信閣 鑄造提擧監)을 제수 받았으며 보물2호(寶物2號)인 보신각종(普信閣鐘)에 공의 관직성명(官職姓名)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공은 그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등을 겸직하셨으며 예종(睿宗)때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을 제수받았고 성종(成宗)때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의정부우참찬(行議政府右參贊)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봉조하(奉朝賀)로 계실때에 순성명량경제홍화(純誠明亮經濟弘化)좌리공신4등(佐理功臣4等)으로 록훈이 되셨는데 1481년(成宗12년)9월19일 하세(遐世)하시니 춘추(春秋)가 68세이셨고 조정(朝廷)에서는 철조조제(轍朝弔祭)의 예(禮)로서 장사(葬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라 내리셨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서거정(徐巨正)이 왕명(王命)에 따라 인각(麟閣, 忠勳府)에 걸어둘 양평공 화상(襄平公 畵像)의 찬(贊)을 지어 바치었다.

공의 묘소(墓所)는 광교산(光敎山) 남록(南麓)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84번지 안산고속도로변(安山高速道路邊)에 있으며 불조전(不祧典) 불천위(不遷位)이시니 사당(祠堂)은 양평묘(襄平廟)라,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매봉재 서남록에 세워저 있었으나 협소(狹小)하고 주위가 소란(騷亂)하여 종의(宗議)에 따라 1999년 경치가 수려(秀麗)한 종산(宗山)자락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56-3번지 소재 종토(宗土)상으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앞뜰에 재실(齋室)인 상산재각(商山齋閣)도 2001년에 신축(新築)하였고 신도비(神道碑)도 묘소(墓所)에서 그곳으로 이수(移竪)하였다.

襄平公 畵像 贊文

公質端正公性亮直 首登龍榜而名動縉紳 再圖麟閣而功存社稷 年垂七耋白髮爲榮 官躋一品素心彌篤 盖斯文之山斗 益永思者年德

大提學 徐 巨 正 敎撰


상주황씨조상인물

신라시대 인물

황창랑(黃倡郞) 신라(新羅)의 무동(舞童). 무용(舞踊)에 뛰어나 나이 15,6세로 왕에게 백제왕(百濟王)을 죽이 겠다고 약속, 백제(百濟)에 들어가 궁중(宮中)에서 검무(劍舞)를 추다가 왕을 죽인후 붙잡혀 죽었다. 이 소식(消息)을 듣고 그 의 모친(母親)이 눈이 멀었으나 사람들이 검무를 추면서 창랑(倡郞)이 돌아 왔다고 말하여 멀었던 눈을 뜨게 하였다. 이로 부터 황창무(黃倡舞)가 향악(鄕樂)에 실려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

우리 황씨는 고려조(高麗朝) 중기(中期)경 이전까지에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지낸 명재상(名宰相)이라 하드라도 관향(貫鄕)없이 그냥 황씨성(黃氏姓)과 휘자(諱字)만이 전하여저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다른 거족(巨族)과는 달리 씨족이 번창(繁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되며,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初刊族譜)에도 일세인 휘 석주(諱 石柱)공의 상계조(上系祖)가 고려조에서 역대(歷代)로 고관대작을 열력(閱歷)하였다고 기록(記錄)이 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그 명휘(名諱)가 전(傳)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안타 까운 일이며 역사상(歷史上)에 남을 위대(偉大)하신 선조(先祖)님들을 자기 관향(自己 貫鄕)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만으로 한국씨족총감(韓國氏族總鑑)에서 등재누락(登載漏落)시키는 일은 숭조사상(崇祖思想)에 배치(背馳)될뿐만 아니라 선조(先祖)에 대하여 큰 실례(失禮)가 된다고 사료(思料)되며, 또한 상주황씨(尙州黃氏)의 상계조(上系祖)일 개연성(蓋然性)도 다분(多分)히 있으므로 황씨중앙종친회(黃氏中央宗親會)에서 1973년도에 발간한 황씨명헌록(黃氏名賢錄)에 등재된 관향(貫鄕)이 기재되지 아니하면서 일세(一世) 휘 서주(諱 石柱)공보다 상계조(上系祖)에 해당(該當)된다고 사료되는 몇분의 할아버지를 여기에 기록 하고자 한다.

황주량(黃周亮)(?-1043) 고려 정치가(政治家). 1004년 4월(穆宗7년)의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사관수국사(史館修國史)가 되어 태조(太祖)로 부터 목종(穆宗)에 이르기 까지 7대 왕조(王朝)의 사적(史蹟)36권을 편수(編修)하였으며 예법(禮法)과 국사편찬(國史編纂)에 많은 공을 세운 분으로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으로 녹훈(錄勳)이 되고 호부상서(戶部尙書) 이부상서(吏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正二品)등을 거쳐 1043년에 최고품계(最高品階)인 수태보 겸 문하시중(守太保 兼 門下侍中)(이조때의 영의정 격)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주국(上柱國)에 올랐고 시호(諡號)는 경문)景文이며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에 추증(追贈)이 되고 정종(靖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이 되셨다.

황영(黃塋) 고려 학자(學者). 1095년(玄宗 원년)에 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가 되고 이어 參知政事겸 知貢擧少傅를 거처 1099년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정이품)에 이르렀다. 사학(私學)을 세워 후진(後進)을 가르쳤으며 이들을 정경공도(貞敬公徒)라 불렀는데 학도(學徒)를 가르치는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였으며 시호(諡號)는 정경(貞敬)이시다.

황유현(黃兪顯) 고려 무신(武臣). 1095년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고 그이듬해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1106년에 흥위위상장군(興威衛上將軍)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셨다.

황종각(黃宗慤) (?--1096) 고려 문신(文臣). 1093년에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1095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시호는 개숙(凱肅)이시다.

황석주(黃石柱) 상주황씨 일세(尙州黃氏 一世) 시중 상주국(侍中 上柱國)

황진경(黃進慶) 문하시중(門下侍中)

황자신(黃自新) 삼중대광(三重大匡)

황을구(黃乙耈, 具) 문과급제(文科及第). 소윤(少尹).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제안군(齊安君)공께서 상주(尙州. 현재의 문경군 농암면 궁기리(고모리))에 거주(居住)하기 시작(始作)하였기 때문에 관향(貫鄕)이 상주(尙州)로 되었다고 전하여 짐.

황하신(黃河信) 문과급제(文科及第). 봉선대부(奉善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고 공의 여식(女息)이 이조(李朝)태종17년 명(明)나라 제3대 영락황제(永樂皇帝)의 후궁(後宮)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左議政 韓確의 女동생)와 같이 선발(選拔)되어 명황실(明皇室)에 입궁(入宮)하였음.

조선시대 인물

황사간(黃士幹) (1396-1416) 16세시 소과(小科) 생원시(生員試) 합격(合格). 19세시(1414) 천인상감지도(天人相感之道)라는 과제(科題)에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정인지(鄭麟趾)공과 같이 참방(參榜)하신 천재(天才).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직에 종사(從事)하다가 21세의 약관(若冠)에 두환(痘患)으로 서거함. 증 순충적덕보조공신(贈純忠積德輔祚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었으며 묘소(墓所)는 경기도 광교산 남록의 안산고속도로 변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84번지에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오씨(海州吳氏)와 싸분(雙墳). 매년4월5일 묘사(墓祀)를 대종회 주관(主管)으로 봉행(奉行)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