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경주황씨시조(慶州黃氏),황사청(黃士淸)

작성일 : 2017-06-03 13:49 수정일 : 2018-04-14 16:16

경주황씨의 연원(慶州黃氏의 淵源)

경주황씨(慶州黃氏)의 관향(貫鄕)은 이조(李朝) 선조(宣祖)때에 휘(諱) 사청(士淸)이신 선조(先祖)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분은 심성(心性)이 단정(端正)하고 언행(言行)이 충직(忠直)하였으며 학문(學文)에 전심(專心)하신 학자(學者)였다.

그는 고향(故鄕)인 경주(慶州)에서 어릴 때 임진병란(壬辰兵亂)을 피해 함경도 지방으로 가던 중 가족(家族) 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군 산내면(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금동리)에 정착(定着)하시었다.

이분의 선대(先代)는 계첩(系牒)도 전해지지 않을 뿐 더러 자손(子孫)이 육대(六代)나 독자(獨子)로 미약(微弱)하게 벽촌(僻村)에 살고 있었기에 후손(後孫)들이 그 선대(先代)의 계통(系統)을 밝힐 길이 없어 휘(諱) 사청(士淸)을 시조(始祖)로 하고 고향(故鄕)인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손(後孫)인 7세(世) 황치홍(黃致弘)은 1890년(고종 27년 光緖16년)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通正大夫 折衝將軍 行龍頭衛 副護軍)을 역임(歷任)하였고 8세(世) 황기석(黃基錫)은 1907년 통훈대부 중추원의관 궁내부주사(通訓大夫 中樞i院議官 宮內府主事) 등을 지내시고 서당(書堂)을 세워 후학(後學)을 위하여 면학(勉 學)에 전념(專念)하였으나 정미의병(丁未殺兵)으로 인해 서당(書堂)은 소실(燒失)되었다.

그 후 9세손(世孫) 황해철(黃海哲)씨가 선계(先系)와 관향(貫鄕)을 찾기 위해 다년간 각지로 다니면서 옛날의 전언(傳言)과 유적(遺蹟)을 탐구(探究)하던 중 1982년 경북 울진 월송정(月松亭)에 모신 학사공(學士公) 휘(諱) 락(洛) 자(字)조(祖)의 시제(時祭)에 참석하여 족장들의 협조로 경남 양산에 거주하는 대구 동원각 도유사 황우찬(黃宇贊) 족장이 소장한 병진보(丙辰譜 1976년 발행)에서 휘(諱) 사청(士淸)이 평해황씨(平海黃氏) 시조(始祖) 휘(諱) 은인(溫仁 金吾公)의 9세손(世孫) 휘(諱) 란(露 正郞公)의 5세손(世孫) 휘(諱) 진운(進運 御梅將軍 行忠左衛 副司直)의 2자(二子)임이 밝혀졌고 영덕군 창수면 황장구 족장의 족보(族譜)에도 똑같이 실려있어 선계(先系)가 평해황씨(平海黃氏)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근 4백여년간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하여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하였으므로 관향(貫鄕)을 평해(平海)로 복원(復原)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분적종(分籍宗)으로 하여 휘(諱) 사청(士淸)을 시조(始祖)로 하고 세계(世系)를 잇기로 하였다.

시조(始祖) 휘(諱) 사청(士淸)의 묘소(墓所)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금동리에 있고, 후손(後孫)들이 매년 음력(陰曆) 10월15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황씨는 전국에 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