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산홍씨(豊山洪氏),풍산홍씨시조,홍지경(洪之慶),풍산홍씨유래,풍산홍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6-03 11:43 수정일 : 2018-02-03 11:31

풍산홍씨(豊山洪氏)시조 및 풍산홍씨유래(본관)

풍산홍씨시조(始祖) 홍지경(洪之慶)1242(고려 고종 29)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후 풍산(豊山) 에 정착 세거(定着 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豊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말에서 조선(朝鮮) 헌종대(憲宗代)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풍산(豊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영안(永安)으로 고쳐서 예천군(醴泉郡)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때 풍산(豊山)으로 개명하였다. 1018(현종 9) 안동(安東)에 속() 하였고 1172(명종 2) 다시 설치 하였으며, ()에 안동(安東)에 속하여 지금은 안동군(安東郡) 풍산읍(豊山邑)으로 남아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수()의 아들 이상(履祥)이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학문을 연마한 후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였으며, 아들 여섯 명과 손자 열한명을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그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영()은 공조 참판(工曹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계원(桂元)을 포함한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풍산 홍씨(豊山洪氏)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숙종(肅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예조 참의(禮曹參議) 주국(柱國)의 아들 만선(萬選)은 현종(顯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으며, 행실이 근엄하고 인격(人格)이 고매하여 당쟁(黨爭)에도 가담치 않아 세인(世人)들은 그를「완인(完人)」이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영조(英祖)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른 만조(萬朝)는 일찌기 대사간(大司諫)․좌빈객(左賓客)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숙종(肅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만용(萬容)은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로 판서(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영의정(領議政) 봉한(鳳漢)은 영조(英祖)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이며, 그의 딸이 세자빈(世子嬪)으로 뽑혔고, 영조(英祖)의 정책에 순응(順應)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후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문화(文化) 부흥(復興)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동생 인한(麟漢)도 현조(刑曹)를 제외한 5(五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상한(象漢)의 아들 낙성(樂性)은 정조(正祖)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797(정조 21) 80세로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명분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그외 정조(正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국영(國英)과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현주(顯周)가 뛰어났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 석주(奭周)는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장(文章)에 있어서 「십대가(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1795(정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순조실록(純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범식(範植)과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충희(忠熹)가 뛰어났고, ()은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의 운영 간부로 활약하여 명망높은 풍산 홍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홍씨(豊山洪氏)는 전국에 44,5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풍산홍씨조상인물

홍간(洪 侃) ?1304(충렬왕 30) ()는 평보(平甫)․운부(雲夫), ()는 홍애(洪厓),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 있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 재직 중에 죽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시풍(詩風)이 청려(淸麗)했다. 그의 시는「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수록되어 있다.

홍구(洪 龜) 고려(高麗)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홍이(洪 伊) 고려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홍이상(洪履祥) 1594(명종 4)1615(광해군 7) 초명(初名)은 인상(麟祥), ()는 원례(元禮)․군서(君瑞)․호號)는 모당(慕堂),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의 아들, 민순(閔純)의 문인(文人), 1573(선조 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예조(禮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과 정언(正言)․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한 후 사가독서(賜家讀書) 했다.

후에 교리(校理)․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 참의(禮曹參議)로서 왕을 평양에 호종(扈從),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전임했다.

1594(선조 27)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그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가 비변사(備邊司)와 서로 연락, 일본 장군 고니시(小酉行長)와 가또오(加藤淸正)간의 이간책(離諫策)을강구 추진했다.

그 후 대사성(大士成)에 전임, 영남(嶺南)의 유생(儒生) 문경호(文景虎) 등의 성혼(成渾) 배척 상소를 극구 반박하고 성혼(成渾)을 변호하다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1609(광해군 1)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12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고, 영의정(領議政) 추증되었다.

홍립(洪 雴)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홍천경(洪千璟) 1553(명종 8)? ()는 군옥(郡玉), ()는 반항당(盤恒堂), 응복(應福)의 아들, 이 이(李 珥)․고경명(高敬命)․기대승(奇大升)의 문인, 1592(선조25) 임진왜란 때에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군량(軍糧) 조달(調達)과 수송을 담당,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 慄)의 휘하에서 의병 모집의 격문(檄文)을 초했다.

1609(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나주 교수(羅州敎授) 겸 제독관(提督官)이 되었고, 이어 남원 교수(南原敎授)로 전임했다.

162370세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월정서원에 제향되었다.

홍봉상(洪鳳祥) 1556(명종 11)1592(선조 25) ()는 문서(文瑞), ()의 아들, 1579(선조 1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가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강(臨津江)에서 싸우던 중 화살을 맞자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홍영(洪 霙) 1584(선조 17)1645(인조 23) ()는 택방(澤芳), ()는 추만(楸巒), 시호(諡號)는 경헌(景憲), 대사헌(大司憲) 이상(履祥)의 아들, 1605(선조 3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輔)로 사산 감역(四山監役)․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1621(광해군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홍보() 1585(선조 18)1643(인조 21) ()는 여시(汝試), ()는 월봉(月峰), 형조 좌랑(刑曹佐郞) 난상(鸞祥)의 아들, 권필(權韠)의 문인. 1609(광해군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坐)․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지낸 후, 1615년 부친상으로 사직했다가 그 후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단념, 면천(沔川)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해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장령(掌令)을 역임, 1627(인조 5)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었다.

이해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원주에서 체포, 난을 진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 1등으로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으며, 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1638년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홍만종(洪萬宗) ()는 우해(宇海), ()는 현묵자(玄黙子)․장주(長洲), 학문에 밝고 저술이 많다. 평론집 「순오지(旬五志)」에서 정철(鄭澈)의 시가(詩歌) 등을 평했다.

홍주일(洪柱一) 1604(선조 37)? ()는 일지(一之), ()는 현당(玄塘), 대사헌 방( )의 아들, 1603(인조 8)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직강(直講) 등을 거쳐1660(현종 1)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홍주원(洪柱元) 1606(선조 39)1672(현종 13) ()는 건중(建中), ()는 무하옹(無何翁), 시호(諡號)는 문의(文懿), 이상(履祥)의 손자. 1623(인조 1)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결혼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1647(인조 25)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러에 가서 시헌력(時憲歷)을 구입해 귀국, 신식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1649(효종 즉위) 고부(告訃)․청시 청승습사(請諡請承襲使), 1653년 사은사(謝恩使), 1661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각각 나라에 다녀왔다. 당대의 풍류객으로서 시를 즐겼다.

홍주세(洪柱世) 1612(광해군 4)1661(현종 2) ()는 숙진(叔鎭), ()는 정허당(靜虛堂)․수암(守菴), 참찬(參贊) ( )의 아들. 1633(인조 11) 생원(生員)이 되고,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랑(正郞)․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신 최(申 最)와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고, 그의 시는 천연 매란(天然梅蘭)에 비유되었다.

홍주삼(洪柱三) ()는 정경(鼎卿), ()는 월탄(月灘), ()의 아들. 1653(효종 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수찬(修撰)․교리(校理)등을 거쳐 1664(현종 5) 서원 현감(西原縣監)이 되었다.

응교(應敎)를 거쳐 1670년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한때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후 1675(숙종 1)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홍주국(洪柱國) 1623(인조 1)1680(숙종 6) ()는 국경(國卿), ()는 범옹(泛翁)․죽리(竹里), 예조 참판(禮曹參判) ()의 아들. 정기옹(鄭畸翁)의 문인. 1648(인조 26) 진사(進士)가 되고,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지평(持平) 등을 거쳐 1671(현종 12)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을 지냈다.

그 후 장령(掌令)을 거쳐 1674(숙종 즉위)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으나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이러나자 대공제(大功制 : 9개월)를 주장하다가 남인(南人)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1679(숙종 5) 경신대축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안악 현감(安岳縣監)에 기용되었다.

홍만용(洪萬容) 1631(인조 9)1692(숙종 18) ()는 백함(伯涵), ()는 금화(金華),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 1662(현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지평(持平)․이조 좌랑(吏曹佐郞)․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고, 16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장원, 1675(숙종 1) 대사간(大司揀)이 되었다.

1680(숙종 6)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168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예조․이조 등의 판서(判書)를 역임, 우참찬(右參贊)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했다.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직, 고양(高陽)에 내려갔다.

홍만종(洪萬鍾) 1637(인조 15)? ()는 여수(汝受). 1666(현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1675(숙종 1) 사간(司諫), 이듬해 평안도 암해어사(平安道暗行御史)가 되었고, 부교리(副校理)․부수찬(副修撰)․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어, 1682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다음해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1688년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홍만회(洪萬恢) 1643(인조 21)1709(숙종 35) ()는 여확(汝廓),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 1669(현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75(숙종 1) 장악원 직장(掌樂院直長)이 되고, 풍덕 부사(豊德府사事)를 거쳐 1709년 판결사(判決 事)에 이르렀다.

홍만선(洪萬選) 1643(인조 21)1715(숙종 41) ()는 사중(士中), ()는 유암(流巖), 예조 참의(禮曹參議) 주국(柱國)의 아들. 1666(현종 7) 진사시(進士試)에 하격,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

행실이 근엄하고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서 당시의 완인(完人)이라 일컬어졌다. 류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農藝)․의약(醫藥)․구황(救荒)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 사상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류중림(柳重臨)․서유구(徐有榘)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홍중해(洪重楷) ?1701(숙종 27) ()는 사무(士武), 교리(校理) 만형(萬衡)의 아들. 민정중(閔鼎重)․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유배되자 동문(同門)들과 상소하여 이를 통박하고, 그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재직중 부고(府庫)의 물자모실(物資耗失)을 엄밀히 검사했다가 참리(參吏)에게 독살 당했다.

홍만조(洪萬朝) 1645(인조 23)1725(영조 1) ()는 종지(宗之), ()는 만퇴(晩退), 시호(諡號)는 정익(貞翼), 주천(柱天)의 아들. 1669(현종 10)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678(숙종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지냈다.

1693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고, 169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간(大司諫)․좌빈객(左賓客)을 역임, 1718(숙종 44) 우참찬(右參贊)․형조 판서(形曹判書)를 지낸 후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2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左參贊)을 역임, 1725(영조 1)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홍대유(洪大猷) 1654(효종 5)1725(영조 1) ()는 자시(子時), ()는 행정(杏亭), 이하(以夏)의 아들. 1696(숙종 22) 진사(進士)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 제,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이르렀다.

홍중하(洪重夏) 1658(효종 9)? ()는 천서(天叙), ()는 두담(杜潭), 참판(參判) 만종(萬鍾)의 아들. 1685(숙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지평(持平)을 지낸 뒤 1694(숙종 20) 교리 (校理)로 접위관(接尉官)이 되어 일본 사신이 자기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죽도(竹島)가 우리 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임을 밝혀 왜인(倭人)의 울릉도 왕래의 엄금을 상소했다.

그 후 보덕(輔德)․사간(司諫)․승지(承旨)에 이어 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17 11년 형조 참의(形曹參議)가 되었다.

홍중현(洪重鉉) 1660(현종 1)1726(영조 2) ()는 대옥(大玉), ()는 천일재(天一齋),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만최(萬最)의 아들. 1684(숙종 1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說書)․정언(正言)․사서(司書) ․지평(持平)을 거쳐 1694년 부교리(副校理)로 재직중 갑술옥사(甲戌獄事)로 경주(慶州)에 유배(流配), 이듬해 풀려나왔다.

1721(경종 1) 다시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소론(少論)으로부터 앞서 갑술옥사 때의 일로 탄핵을 받아 다시 면직되었다. 1725(영조 1)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시正)․판교(判校)․강릉 부사(江陵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홍중성(洪重聖) 1668(현종 9)1735(영조 11) ()는 군칙(君則). ()는 운와(芸窩). 판결사(判決事) 만회(萬恢)의 아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 1696(숙종 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원릉 참봉(原陵參奉)이 되고,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거쳐 1719년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이르렀다. 역사(歷史)에 정통했고 시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홍석보(洪錫輔) 1672(현종 13)1729(영조 5) ()는 양신(良臣), ()는 수은(睡隱),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중기(重箕)의 아들. 1696(숙종 22) 사마시를 거쳐, 169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과옥(科獄)으로 응시자가모두 삭방(削榜)되고 한때 도배(徒配)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권고로 다시 응시, 170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전적(典籍)․교리(校理)․홍양 현감(洪陽縣監)을 역임하고, 1718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균전사(均田使)로 양전(量田)을 실시, 이어 예조와 호조의 참의(參議)․판결사(判決事)․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1721(경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노론(老論) 4대신과 함께 세제 책봉(世弟冊封)을 주청했고,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을 겸했으나 이듬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암(靈巖)에 유배, 다시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었다.

1725(영조 1) 은진(恩津)에 양이(量移)되었다가 이해 풀려나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이즙(李 楫)과 함께「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찬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홍현보(洪鉉輔) 1680(숙종 6)1740(영조 16) ()는 군거(君擧), ()는 수재(守齋), 시호(諡號)는 정헌(貞獻), 중기(重箕)의 아들. 1718(숙종 4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1725(영조 1) 수찬(修撰)으로 탕평책(蕩平策)을 상소하여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교리(校理)에 승진했다.

1729년 형조 참판(形曹添判),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731년 대사헌(大司憲)․호조 참판(戶曹參判), 1733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대사성(大司成)․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역임, 1738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740(영조16)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홍중인(洪重寅) ?1752(영조 28) ()는 양경(亮卿), ()는 화은(花隱), 만조(萬朝)의 아들. 1714(숙종 40)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고, 선릉 참보(宣陵參奉)에 이어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렸다. 한산 군수(韓山郡守)를 지낸 뒤 사직했다가 아들의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돈령부도정( 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홍성보(洪聖輔) 1685(숙종 11)1742(영조 18) ()는 유량(幼亮), 생원(生員) 중화(重華)의 아들. 1710(숙종 3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21(경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병조 정랑(兵曹正郞)․문학(文學)․정언(正言)․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727(영조 3) 수찬(修撰)으로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임, 이어 광주 부윤(광州府尹)이 되었으나 이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노론(老論)이 화를 입을 때 파면당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로 안무사(北路按撫使) 윤헌주(尹憲柱)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지제교(知製校)․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동래 부사(東萊府使)․수찬(修撰)․교리(校理)․강계 부사(江界府使), 공조와 형조의 참의(參議), 대사간(大司諫)․판결사(判決事)․무주 부사(茂朱府史) 등을 역임하고 1741년 영월 부사(寧越府使)로나가 앞서 단종이 죽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녀(侍女)의 충절을 기념, 민충사(愍忠祠)를 세워 제사케 했다.

홍경보(洪景輔) 1692(숙종 18)1745(영조 21) ()는 대이(大而), ()는 창애(蒼厓).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중하(重夏)의 아들. 1723(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27(영조 3) 정언(正言)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1729년 탕평(蕩平)의 폐단을 소진(疏陳) 했다가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좌천되었다.

뒤에 1732년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뒤 1734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승지 (都承旨)․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737(영조 13)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조신(朝臣)들의 부패와 간관(諫官)의 무능을 비난함으로써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켜 파직되었다.

이듬해 공조․병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지의금부사(知議禁府事) 등을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홍중징(洪重徵) 1693(숙종 19)1772(영조 48) 초명(初名)은 중흠(重欽), ()는 석여(錫餘), ()는 오천(梧泉), 시호(諡號)는 양효(良孝), 판서(判書) 만조(萬朝)의 아들. 1711(숙종 37) 진사(進士)가 되고, 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장령(掌令)․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1747(영조 23) 승지(承旨)가 되었다.

그 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5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에 능했고, 만년에는「주역(周易)」을 연구, 많은 저서를 남겼다.

홍창한(洪昌漢) 1698(숙종 24)? ()는 대기(大紀), 영의정(領議政) 국영(國榮)의 조부. 이 재(李縡)의 문인. 1728(영조 4)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조 좌랑(吏曹佐郞)․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737년 수찬(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탄핵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해서 암행어사(海西暗行御史)로 나갔다.

봉산 군수(鳳山郡守)를 지내고 헌납(獻納)을 거쳐 1739년 위패(違稗)의 죄로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응교(應敎)․집의(執義)를 지낸 뒤 사은 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사간(司諫)․검상(檢祥)․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를 거쳐 1745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시문(時文)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다.

홍상한(洪象漢) 1701(숙종 27)1769(영조 45) ()는 운장(雲章), 시호(諡號)는 정혜(靖惠), 이조 참판(吏曹參判) 석보(錫輔)의 아들. 어유봉(魚有鳳)의 문인. 1728(영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34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이듬해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지냈다. 이어지평(持平)․응교(應敎)․사간(司諫)을 역임, 1742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뒤 1747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법에 어긋난 장형(杖刑)의 남용을 엄금케 했으며, 한때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754년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조 헌(趙 憲)의 문집으간행하는 한편 창절(彰節)․민민(愍民)의 두 서원(書院)을 중수(重修)하고, 상소하여 황보인(皇甫仁) 등을 신원(伸寃)하고, 시호를 내리게했다.

그 뒤 병조 판서(兵曹判書)․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1759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세손 사부(世孫師부)를 겸임, 1769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홍응보(洪應輔) 1702(숙종 28)1770(영조 46) ()는 동보(同甫), ()는 문주(雯洲),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윤(重潤)의 아들. 1735(영조 1) 진사(進士)가 되고, 1742년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을거쳐 헌납(獻納)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을 따르기 싫어하여 벼슬을 곧 사직, 경서(經書)에 전심했다.

홍중효(洪重孝) 1708(숙종 34)1772(영조 48) ()는 성원(聖源), ()는 백서헌(栢西軒)․소와(疎窩), 시호(諡號)는 효민(孝敏), 승지(承旨) 만기(萬紀)의 아들. 1740(영조 16) 진사(進士)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장령(掌令)․교리(校理)․필선(弼善) 등을 지내고 1757(영조 33)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공조참의(工曹參議)․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 176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66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府佐尹)․형조․예조판서(刑曹․禮曹判書)를 지냈다. 경전(經傳)에 조예가 깊었고 시집(時集) 10여권이 전한다.

홍봉한(洪鳳漢) 1713(숙종 39)1778(정조 2) ()는 익여(翼汝), ()는 익익재(翼翼齋), 시호(諡號)는 익정(翼靖),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 현보(鉉輔)의 아들. 1735(영조11)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陰補)로 참봉(參奉)․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등을 지내고, 1743년 딸이 세자빈(世子嬪:혜경궁 홍씨)으로 뽑힌 뒤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1745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특진,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케 되면서 누진(累進)하여 다음해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오르고이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연접도감 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후, 1752(영조 28)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고, 이듬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으로「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撰進)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1759년 세손사부(世孫師傅)가 되고, 1761년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에 인책한 이천보(李天 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右議政)에 발탁되고, 다시좌의정(左議政)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763년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그후 영조(英祖)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특히 당쟁(黨爭)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 시무(時務) 6()로 당면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환곡(還穀)의 작폐(作弊)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再調査) 등을 단행하게 하여 국고의 충실과 백성부담의 절감(節減)을 기했다.

1771년 벽파(碧派)의 책동으로 사도세자의 두 아들의 관작을 삭탈하고 세손(世孫 : 정조)까지 해하려 할 때 이를 막다가 삭직(削職)되고 청주(淸州)에 부처(府處)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시파(時派)가 승리하게 되어 풀려나온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조(英祖)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홍낙성(洪樂性) 1718(숙종 44)1798(정조22) ()는 자안(子安), ()는 항재(恒齋), 시호(諡號)는 효안(孝安), 예조 판서 상한(象漢)의 아들. 어유봉(魚有鳳)의 문인. 1744(영조 2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사서 (司書)․지평(持平)․사간(司諫)․승지(承旨)를 지내고, 1757(영조 33)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 후 이조 참의(吏曹參議)․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768(영조 44)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형조와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1782(정조 6)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1784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793(정조 17)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79780세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치사(致仕)를 청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 기로소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났다.

홍양한(洪亮漢) 1719(숙종 45)1763(영조 39) ()는 용경(龍卿), ()는 미남(嵋南)․오서(烏西), 국보(國輔)의 아들. 1744(영조 20) 진사(進士)가 되고, 175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54년 사서(司書)․정언(正言)․수찬(修撰)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지평(持平)․부교리(副校理)․수찬(修撰)을지냈다. 1763년 전라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태인(泰仁)에서 죽었다.

홍인한(洪麟漢) 1722(경종 2)1776(정조 즉위) ()는 정여(定汝), 판서(判書) 현보(鉉輔)의 아들. 1753(영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주서(假注書)․정언(正言)을 지내고, 이듬해 교리(校理)로 조영순(趙榮順)을 신구(伸救)하려다 파직되었다.

1755년 헌납(獻納)을 거쳐 1757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승진, 그후 승지(承旨)․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762(영조 38)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가 되어 유민(流民)을 위무하여 정착케 했다.

호조․예조․이조․형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도승지(都承旨)․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내고 공조․이조․병조․호조․예조의 판서(判書)에 이어 1774(영조 50)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세손(世孫 : 정조)과 사이가 나빠 다른 풍산 홍씨들이 시파(時派)에 가담하여 세손을 보호했으나 그는 벽파(僻派)에 가담하여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1776년 정조(正朝)가 즉위하자 여산(礪山)에 유배, 곧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홍낙명(洪樂命) 1722(졍종 2)1784(정조 8) ()는 자순(子順), ()는 신재(新齋),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예조판서(禮曹判書) 상한(象漢)의 아들. 어유봉(魚有鳳)의 문인. 1741(영조 1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5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사서(司書)․강동 현령(江東縣令)․보덕(輔德)․응교(應敎)를 역임하고, 1764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승진, 그후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지냈다.

정조(正祖) 초에는 세도가(世道家) 홍국영(洪國榮)의 친척으로서 더욱 높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 병을 핑계로 물러나 일절 출입을 하지 않았다.

1780(정조 4)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 겸 대제학(大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지냈다. 경사(經史)에 밝고 특히 「소학(小學)」을 애독, 만년에는 이 황(李 滉)과 중국의 한 유(韓 愈)를 사숙(私叔)했다.

홍낙순(洪樂純) 1723(경종 3)? ()는 백효(伯孝), ()는 대릉(大陵),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관찰사(觀察使) 창한(昌漢)의 아들. 1757(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說書)․사서(司書)․의주 부윤(義州府尹)․이조 참의(吏曹參議)․승지(承旨) 등을 지내고, 홍국영(洪國榮)이 정권을 쥐고 세도정치(世道政治)를 하자 그의 백부(伯父)로서대제학(大提學)․공조판서(工曹判書)․강화 유수(江華留守) 등을 거쳐 1779(정조 3)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나 이듬해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파직되었다. 1858(철종 9) 그의 손자 홍우선(洪祐善)이소청으로 복관(復官)되었다.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 (순조 2) 초명(初名)은 양한(良漢), ()는 한사(漢師), ()는 이계(耳谿),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진보(鎭輔)의 아들. 1747(영조 23) 진사(進士)가 되고,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 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777(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世道政治)가 시작되어 그 횡포가 심해지자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나갔다가 홍국영의 실각후 1781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 1794년 동지 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고 1799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임, 1801(순조 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도 겸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기효람(紀曉嵐)등학자와 교유(交遊), 귀국 후 고증학(考證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地方官)으로 나가면 치산(治山)․식수(植樹)에 주력했고, 특히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의뢰, 1764(영조 40) 일본의 벚나무 묘목을 가져와 우이동(牛耳洞)에 심어 뒷날 경승지(景勝地)를 이루게 했다.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 진체(晋體)․당체(唐體)에 뛰어났다.

홍명호(洪明浩) 1736(영조 12)1819(순조 19) 초명(初名)은 명한(鳴漢), ()는 공서(公舒),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진보(鎭輔)의 아들. 1763(영조 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참봉(參奉)을 지낸 후, 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지평(持平)․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1779(정조 3)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를 역임, 1791년아들 낙유(樂游)가 사관(史官)으로서 처벌당하게 되자 이에 연좌,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기용, 1800년 정조(正祖)가 죽자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가 공사(工事)를 지연시킨 죄로 파직되었다. 그 후 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홍유한(洪有漢) 1736(영조 12)? 예산(禮山) 출신. 이 익(李 瀷)의 문인. 1770(영조 46) 경부터 천주교 관계의 서적을 읽고 그 교리를 신봉했다.

후에 백산(白山)에 은거하여 독서와 수도생활을 하다가 교향에 돌아가 죽었다. 이승훈(李承薰)의 입교에 앞서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홍낙인(洪樂仁) 1740(영조 16)1777(정조 4) ()는 대유(大囿), ()는 안와(安窩), 영의정 봉한(鳳漢)의 아들. 1761(영조 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교리(校理)를 거쳐 1763년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보덕(輔德)․예조 참의(禮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대사성(大司成)․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773년 도승지(都承旨), 이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1775년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1777(정조 1) 역적 홍상길(洪相吉)의 진술에 그의 이름이 나타나 투옥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홍낙임(洪樂任) 1741(영조 17)1801(순조 1) ()는 숙도(叔道), 영의정(領議政) (鳳漢)의 아들. 1769(영조4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으며, 정언(正言)․문학(文學) ․사서(司書)를 거쳐 승지에 올랐다.

윤행임(尹行恁)의 권고로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제주도(濟州道)에 안치(安置), 곧 사사(賜死)되었다.

홍의모(洪義謨) 1743(영조 19)1811(순조 11) 초명(初名)은 의영(義榮), ()는 이중(而中), ()는 하우당(何愚堂)․금시헌(今是軒), 시호(諡號)는 효헌(孝獻), 영의정 낙성(樂性)의 아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

1763(영조 39) 생원시(生員試)에 합겨,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775(영조 51) 비로소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06(순조 6)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강원도관찰(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홍국영(洪國榮) 1748(영조 24)1781(정조 5) ()는 덕로(德老),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낙춘(樂春)의 아들. 1771(영조 4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이어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올라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僻派)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켰고, 벽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776년 정조(正祖)를 즉위시키는데 많은 힘을 썼다.

이해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을 적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한 후 정예병을 별도로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숙위 대장(宿衛大將)을 겸직하며 신변이 위험한 정조(正祖)의 보호에 힘쓰고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상주(上奏)와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도정권(世道政權)이 이룩되었고, 도승지로 이조참의(吏曹參議)․대제학(大提學) ․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다.

홍낙민(洪樂敏) 1751(영조 27)1801(순조 1) 교명(敎名)은 누가, ()는 성눌(聖訥), 양한(亮漢)의 아들. 충남예산(禮山) 출신.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상경(上京)하여 이승훈(李承薰) 등과 교유하고, 1784년 경에 천주교에 입교했다.

1789(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수찬(修贊)․전적(典籍) 등을 지내고,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배교(背敎)를 했으나 신공(神功)과 대소재(大小齋)는 지켰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시부로 부터 보례(補禮)를 받고 고해(告解)를 준비하던 중 한영익(韓英益)의 밀고로 교도임일 탄로되자 다시 왕명으로 배교를 선언했으나, 여전히 교칙(敎則)을 지켜서, 1799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았다.

1801(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승훈․정약종(丁若鍾)과 함께 서소문(西小門) 밖 형장(刑場)에서 순절했다.

홍낙안(洪樂安) 1752(영조 28)? ()는 인백(仁伯), 복호(復浩)의 아들. 1790(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이듬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공서파(攻西派)의 선봉으로 제사할 때 신주(神主)를 폐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의 죄상을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고발하여 참형(參刑)당하게 했다.

홍인호(洪仁浩) 1753(영조 29)1799(정조 23) ()는 원서(元瑞), 봉조하(奉朝賀) 수보(秀輔)의 아들. 1774(영조 50) 진사(進士)가 되고, 1777(정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승지(承旨) 등을 지낸 뒤 1791(정조15)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98(정조 22)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러 병사했다. 앞서1784(정조 8) 왕명으로 각 도의 형옥 결안(刑獄決案)을 편집, 1799(정조 23)에 완성, 순조 때 동생 의호(義浩)가 증수(增修),「심리록(審理錄)」이라 하여 간행했다.

홍인모(洪仁謨) 1755(영조 31)1812(순조 12) 초명(初名)은 대영(大榮), ()는 이수(而壽), ()는 족수거사(足睡居士), 영의정(領議政) 낙성(樂性)의 아들. 1783(정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호조 참의(戶曹參議)․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경사(經史)․음양(陰陽)․의약(醫藥)․복서(卜筮)와 손․오(孫吳)의 병서(兵書) 및 도교(道敎)와 불교의 경전에 통달했고 고문(古文) 수편과 고근체시(古近體詩) 2천여 편을 남겼다.

홍의호(洪義浩) 1758(영조 34)1826(순조 26) ()는 양중(養仲), ()는 담녕(澹寧), 시호(諡號)는 정헌(正憲), 판돈령 부사(判敦寧府事) 수보(秀輔)의 아들. 1784(정조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고 지평(持平)․집의(執義)․응교(應敎)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호조․예조․공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802(순조 2)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이듬해 사음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거 대사간(大司諫)․동지경연사(同至經筵事)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주 부윤(義州府尹)․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우참찬(右參贊), 예조와 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814(순조 14)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

181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복진, 1823년 동지사(冬至事)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1825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천주교(天主敎)를 탄압했다.

홍희근(洪羲瑾) 1767(영조 43)? ()는 경수(敬叟), 이호(彝浩)의 아들.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809(순조 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 (甲科)로 급제, 1817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28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29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으며, 1831(순조31)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 1836(헌종 2)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홍명주(洪命周) 1770(영조 46)? ()는 자천(自天), 시호(諡號)는 정간(靖簡), 부사(府使) 희영(喜榮)의 아들. 1794(정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798년 설서(說書)․지평(持平)을 거쳐 1805(순조 5) 정언(正言)이 되어 이서구(李書九)․김달순(金達淳)을 탄핵하다가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 나와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1835(헌종 1)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홍석주(洪奭周) 1774(영조 50)1842(헌종 8) ()는 성백(成伯), ()는 연천(淵泉),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 1795(정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직장(直長)으 거쳐 주서(注書)로검열(檢閱)을 겸하고, 1802(순조 2)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應敎)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교리(校理)․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검상(檢祥)․도승지(都承旨)․부제학(副提學)을 역임, 1815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이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고, 1830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승진,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832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고, 1834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해 순조(純祖)가 죽자 총호사(摠護使)를 겸임, 이러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순조실록(純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외척으로서 헌종 초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세도(勢道)를 다투어 조씨 집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1836(헌종 2) 남응중(南膺中)의 모반(謨叛)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 이듬해 대사헌(大司憲) 김 노(金 鏴)의 탄핵으로 삭출(削黜)되었다가 1839년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 : 신정왕후)의 특지(特旨)로 복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특히 문장에 있어서 10대가(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홍길주(洪吉周) 1786(정조 10)1841(헌종 7) ()는 헌중(憲仲), ()는 항해(沆瀣),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 1807(순조 7)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한 뒤 학문에 전심했고, 만년에 군읍(郡邑)을 다스려 선정(善政)했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 사퇴하였다. 문장에 뛰어났다.

홍현주(洪顯周) ()는 세숙(世叔), ()는 해거재(海居齋)․약헌(約軒). 시호(諡號)는 효간(孝簡), 인모(仁謨)의 아들. 정조(正祖)의 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결혼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지고 1815(순조 15)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다.

홍우길(洪祐吉) 1809(순조 9)1890(고종 27) ()는 성여(成汝), ()는 애사(靄士)․춘산(春山)․연탄(硏灘),시호(諡號)는 효문(孝文),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정주(定周)의아들. 1850(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사간(司諫 )을 거쳐 1856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예방승지(禮房承旨)를 역임, 1859년 경상동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조 참판(吏曹參判)․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이조․예조․형조의 판서(吏曹․禮曹․刑曹判書)에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대호군(大護軍)을 역임, 1862년 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을 거쳐 다시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가 1871(고종 8)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1875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재임되었다. 서화(書畵)에 뛰어났다.

홍철주(洪澈周) 1834(순조 34)? ()는 백영(伯泳), 시호(諡號)는 효헌(孝獻), 일모(一謨)의 아들. 1859(철종 10) 진사(進士)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67(고종 4) 공충도 암행어사(公忠道暗行御史)가 되고, 1875년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울산(蔚山)에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안해사(按覈使)로서 나가 난도(亂徒)들을 처벌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 후 사대당(事大黨) 내각이 수립될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고 1887년 전보국 총판(電報局總辦)으로 전선 가설(電線架設)에 공을 세웠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융희 4) ()는 성방(聖訪), ()는 일완(一阮),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 충북 괴산(槐山) 출신. 1888(고종 2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902(광무 6) 내부 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융희 1) 태인 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융희 3)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전직되었으나 이듬해 한일합방이 되자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진(洪 震) 1878(고종 15)1946 본명(本名)은 면희(冕熹), ()는 만오(晩晤). 서울 출신. 한말에 한성평리원 검사(漢城平理院檢事)․충청검찰청 검사(忠淸檢察廳檢事)를 역임하고, 31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법무 총장(法務總長)․내부 총장(內務總長)․의정원의장(議政院議長)․국무령(國務領)을 역임했다.

한편 1928년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 최고간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38년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이 결정되자 운영간부에 선임되었다.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과 귀국, 비상국민회의 의장에피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홍충희(洪忠熹) 1878(고종 15)1945 ()는 우봉(禹峰). 1903(광무 7) 구한국 무관학교(舊韓國武官學校) 보병과를 졸업, 육군 부위(陸軍副尉)를 지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1920년 김규식(金奎植)․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했다.

청산리(靑山里) 싸움 때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휘하에서 대대장서리 겸 제2중 대장으로 참전, 크게 전공을 세우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목릉현(穆稜縣) 산중에 주둔하고 있다가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교포 청년의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35년 대종교(大倧敎)에 의한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하르빈에 대종교 선도회(大倧敎宣道會)를 조직했다가 해방으로 귀국하여 7일 만에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