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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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6-03 11:24 수정일 : 2018-01-01 20:2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水原市)로 승격되었다.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토홍계(土洪系)의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당성(唐城 : 남양의 옛지명)에 세거(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漿)을 지냈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하게 상고(祥考)할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唐城)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하였으므로 선행(先幸)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남양(南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온 것으로 전()한다.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토홍계(土洪系)는 조선조(朝鮮朝)에서 크게 명성을 날렸는데, 익생(益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목사(牧使)를 거쳐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귀연(貴演)은 대호군(大護軍), ()은 검열(檢閱)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정언(正言)을 지냈다.

특히 언필(彦弼)은 중종(中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아들 섬()은 명종(明宗)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후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세 차례나 중임(重任)했을 뿐아니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부자(父子)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편 선조(宣祖) 때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評定)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 가신(可臣)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광해군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우참찬(右參贊) ()의 아들종록(宗祿)1589(선조 22) 모역(謨逆)한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로 몰려 한때 유배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때 류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암행어사(暗行御史)와 조도사(調度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그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진도(振道)와 한성 좌윤(漢城佐尹)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진문(振文) 형제가 이름났으며, 직제학(直提學) 종록(宗祿)의 아들 헌()은 광해군(光海君)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했다.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남계군(南溪君)에 습봉(襲封)된 숙은 그의 아들 형제와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맏아들 봉조(鳳祚)는 영조(英祖)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치고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둘째 용조(龍祚)는 충주 목사(忠州牧使)와 회양(淮陽)․삼화(三和)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한편 자()는 귀조(龜祚)의 아들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대사헌(大使司憲)을 역임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실학자(實學者)로 유명한 대용(大容)은 군국(軍國)과 경제(經濟)에 관한 학문(學問)을 연구하여 종래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設)을 부정한 기화설(氣火說)을 주장했으며,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했고 신분제도의 타파를 부르짖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의사(義士) 치유(致裕)와 우부승지(右副承旨) 필유(必裕)가 이름났고 항일투사(抗日鬪士) 사구(士九)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시해(弑害)되자 의병(義兵)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가문을 더욱 빛냈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토홍계(土洪系)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9,250가구 20,66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