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연주현씨(延州玄氏),연주현씨시조,현담윤(玄覃胤),연주현씨유래,연주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6-02 15:27 수정일 : 2018-01-30 10:43

연주현씨시조 및 연주현씨유래(본관)

현씨(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平安道)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의 의종조(毅宗祖)에 장군(將軍)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현담윤(玄覃胤)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연주(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현씨(玄氏)의 본관(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성주(星州)창원(昌原)순천(順天) 등 무려 106()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侍郞公) 현담윤(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영조 23)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 할 때 연주 현씨(延州玄氏)로 단일화(單一化)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 때도 문중(門中)의 합의(合議)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統一)하였다.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고호(高號)이며, 영변군은 영주(迎州)와 무주(撫州)의 합명(合名)이다. 영주는 본래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670(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995(성종 14) 방어사(防籞使)를 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연산부로 승격되고 1413(조선 태종 13)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무주는 원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인데 995년 무주방어사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태주(泰州)로 이속되었고, 1391(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둔 후 태종(太宗) 때 무산현(撫山縣)이 되었다. 1419(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으로 개칭하고 세조(世祖) 때 연주(延州)를 나누어 운산군(雲山郡)에 속하게 하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 영변군으로 개칭되었다.


연주현씨를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담윤(覃胤)3 형제 중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내시지후(內侍祗候)와 안남 부사(安南府使)를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桉廉使)를 역임한 후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팔거군(八莒君)에 봉해졌다가 수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어 그의 후손들이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둘째 이후(利厚)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1186(명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창원 현씨(昌原玄氏)로 분관(分貫)하였으며, 성산부원군 덕수(德秀)의 둘째 아들 원미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 현씨(順天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고려조에서 무훈(武勳)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9세손 규()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내고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득원(得元)은 어릴 때부터 기절(氣節)이 탁월하고 효우(孝友) 도한 돈독하였는데,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永川) 묵방동(黙坊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토록 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한편 빈()의 아들 익수(翼洙)는 가세(家勢)가 빈궁했으나 청백(淸白)하여 처사(處士)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노부모(老父母)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인 석규(錫圭)가 한양(漢陽)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世祖)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서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고 의관(衣冠)이 해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婚姻)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하니, 세조(世祖)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孝寧大君)가문(家門)이 적합치 않을 것 같습니다하니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嶺南)에서 문명(文名)을 덜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밖에도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손곱힌 상벽(尙壁)이「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학자(學者) 약호(若昊),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재덕(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유명한 병근(炳瑾)과 익철(益哲)이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주현씨는 전국에 56,0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연주현씨조상인물

<연주계(延州系)>

현이후(玄利厚)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선지 별감(宣旨別監)을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하여 졌다.

현원도(玄原燾) 고려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현문홍(玄文弘) 고려조에서 검교군기사감(檢校軍器寺監)을 역임하였다.

현장(玄 章) 고려 때 연주 낭장(延州郎將)을 지냈다.

현두규(玄斗奎) ()는 천교(天橋).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현봉점(玄鳳漸) 조선(朝鮮) 때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현봉태(玄鳳泰)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현광우(玄光宇) 조선조(朝鮮祖)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현익수(玄翼洙) 1766(영조 42)1827(순조 27) ()는 파향(派鄕), ()는 회당(晦堂), ()의 아들, 가세가 빈궁하였으나 청백하여 처사(處士)로 이름났다.

김이양(金履陽)의 천거로 지릉 참봉(智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를 위해 나가지 않았고 다시 상신(相臣) 김이교(金履喬)에 의해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사마 천(司馬遷)․반 고(班 固)․한 유(韓 愈)․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애독, 뒤에는 주자학(朱子學)에 전심했다.

현석문(玄錫文) 1700(정조 23)1846(헌종 12) 교명(敎名)은 칼로로, 역관(譯官) 계흠(啓欽)의 아들, 1836(헌종 2) 의주(義州)에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고, 그후 샤스땅 신부를 도와 전도에 힘써 천주교 한양회장(漢陽會長)에 임명되었다.

1839(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아내와 누이가 순교, 앵베르 주교의 요청을 받아「조선천주교순교자열전(朝鮮天主敎殉敎者列傳)」의 집필에 착수했고, 이해 8월 앵베르․샤스땅․모방 등 세 신부마 저 잡혀 죽자 박해를 피해 다니며 낙망한 신자들을 위로,「순교자열전」의 편찬을 위하여 때로는 중국 상해(上海)까지 가서 자료를 정리, 3년만에「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이름으로 열전을 완성했다.

1845(헌종 11) 김대건(金大建)과 함께 상해로 가서 조선 교구 제 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를 안내하고 입국, 다음해 9월 서울에서 피체, 김대건 등과 함께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했다. 1925년 교황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현일(玄 鎰) 1807(순조 7)1876(고종 13) ()는 만여(萬汝), ()는 교정(皎亭),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재명(在明)의 아들, 음보(蔭補)로 연천 군수(連川郡守)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현병근(玄炳瑾) 일명(一名) 정경(正卿), ()는 하죽(河竹),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주도하였다.

현익철(玄益哲)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


<성주계(星州系)>

현덕수(玄德秀) ?1215(고종 2) 담윤(覃胤)의 아들, 어려서 연주 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에게 발탁되어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고 누차 문과(文科)에 실패 한 뒤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1174(명종 4) 조위총(趙位寵) 이 난을 일으키자 절령(岊嶺 : 서흥군) 이북 40여 성()이 다 이에 응했으나 도령(都嶺)인 아버지 담윤과 함께 성을 고수(固守), 주인(州人)들에 의해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에 추대되어 조위총이 회유 차 보낸 사절을 잡아 죽였다.

그 후 권감창사(權監倉使)가 되어 서경의 군사 1만에게 성이 포위 되자 이를 쳐 궤멸(潰滅)시켰고, 다시 서울에 진격했다가 패퇴한서 경군사가 여러 겹으로 포위해 왔으나 이를 대파했다.

이듬해 금나라 세종(世宗)이 그들의 고군분투상을 전해 듣고 원병을 보내왔으나 이를 사양하여 돌려보내고, 또 다시 성이 포위 공격 당했으나 이를 격퇴했다. 그 공으로 아버지 담윤은 장군(將軍)이 되고, 그는 내시 지후(內侍祗候)에 이어 안만도호부 부사(安南都護府副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도관 낭중(都官郎中)을 거쳐 이부 낭중(吏部郎中)에 임명되자 변방 민으로 과분하다는 간관(諫官)의 반대로 병부 낭중(兵部郎中)에 전직 되었으며, 사재소윤(司宰少尹)을 거쳐 신종(神宗) 때 전중감(殿中監) 이 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현원렬(玄元烈) 고려(高麗) 충렬완(忠烈王)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현경여(玄敬與) 고려조(高麗朝)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다.

현우규(玄禹圭) 고려에서 사재주부(司宰主簿)를 지냈다.

현치룡(玄致龍) 고려조에서 도첨의시사(都僉議寺事)를 지냈다.

현서룡(玄瑞龍) 고려(高麗) 때 좌승선(左承宣)을 역임하였다.

현권(玄 權) 고려에서 조승선(左承宣)을 지냈다.

현응화(玄應和) 고려조(高麗朝)에서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현옥량(玄玉亮) ()는 채상(采相), ()는 초월(抄月), 조선 태조 때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올라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를 지냈다.

현호명(玄浩明) 조선에서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올랐다.

현호연(玄浩然) 고려에서 생원(生員)을 지냈다.

현승평(玄昇平) 고려조에서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현용무(玄用武) 고려(高麗) 때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지냈다.

현용휴(玄用休) 조선(朝鮮)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냈다.

현환(玄 環) 조선에서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현수(玄 琇) 조선조에서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추종되었다.

현우인(玄佑仁)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현규(玄 珪)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현경조(玄景祚) 조선조(朝鮮朝)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현인형(玄仁亨)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군자감주부(軍資監 主簿)를 지냈다.

현수(玄 守) 조선에서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지냈다.

현우인(玄佑仁)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현규(玄 珪)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현경조(玄景祚) 조선조(朝鮮朝)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현인형(玄仁亨)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다.

현수(玄 守) 조선에서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현사경(玄思敬) 조선조에서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현득원(玄得元) ()는 정숙(貞淑), ()는 묵은(黙隱), 조선(朝鮮) 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현득리(玄得利) 조선조(朝鮮朝)에 음보(蔭補)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전주 판관(全州判官)을 지냈다.

현우(玄 佑) 조선 때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현수(玄 壽) ()는 영령(永齡),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에 올라 훈련첨정(訓鍊僉正)을 지냈다.

현홍점(玄鴻漸) 조선조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현맹인(玄孟仁) 조선(朝鮮)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현분(玄 賁)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송화 현감(松禾懸監)을 역임하였다.

현응벽(玄應碧) 조선에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현희황(玄希晃) ()는 중명(仲明), 조선조(朝鮮朝)에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봉사(奉事)를 지냈다.

현귀남(玄貴南) 조선 때 생원(生員)을 역임하였다.

현근례(玄謹禮) ()는 덕여(德汝), ()는 담제(潭齊), 조선(朝鮮)에서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현윤문(玄允文) 조선조에 습독관(習讀官)을 지냈다.

현윤명(玄允明) 조선 대 사직(司直)을 지냈다.

현예택(玄禮澤) ()는 이숙(履叔),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현탁(玄 倬) 조선(朝鮮)에서 현감(顯監)을 역임하였다.

현간(玄 侃) ()는 간여(侃汝).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현구(玄 球) ()는 명서(鳴叙). 조선 때 현감(顯監)을 지냈다.

현징(玄 徵) ()는 사휴(士休).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현응신(玄應臣) 조선(朝鮮) 때 현감(顯監)을 역임하였다.

현응원(玄應元) 조선 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현익후(玄翼後) 조선조(朝鮮朝)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현재흥(玄裁興) 조선(朝鮮) 때 사복사정(寺僕寺正)을 역임하였다.

현연(玄 璉) ()는 언성(彦盛). 조선 때 인의(引儀)를 지냈다.

현덕순(玄德純)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현기(玄 琦) ()는 언윤(彦潤). 조선 때 습독관(習讀官)을 역임하였다.

현덕량(玄德良) 1544(중종 39)1610(광해군 2) ()는 영숙(永叔), 선무랑(宣務郞) ()의 아들. 1569(선조 2) 무과(武科)에 급제,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여러 지방관을 지내고, 1604년 인동 현감(仁同顯監)이 되었다.

무력이 출중하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어 존경을 받았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었다.

현덕옹(玄德顒) ()는 대원(大元).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현덕룡(玄德龍)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현덕린(玄德鄰)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현덕승(顯德升) 1564(명종 19)? ()는 문원(聞遠), ()는 희암(希菴), ()의 아들. 천안(天安)출신. 1588(선조 21)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직강(直講)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벼슬을 버리고 학문을 닦았다.

현상벽(玄尙璧) ()는 언명(彦明), ()는 관봉(冠峰),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영조(英朝) 때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장릉 참봉(長陵 參奉),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다.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 (洛論)에 속해 인()과 물()의 성()이 같다고 주장했다. 조선 후 기의 석학으로서 예론(禮論)에도 정통했다.

현홍준(玄弘俊) ()는 석보(碩甫). 조선 때 효자(孝子)로 향민(鄕民) 의 칭찬을 받았다.

현약호(玄若昊) ?1709(숙종 35) ()는 음보(飮甫), ()는 삼벽당(三碧堂), 참봉(參奉) ()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1689(숙종150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주도(濟州道)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위해 그 당액(堂額)을 썼다. 학행(學行)으로 알려졌다.

현응준(玄凝俊) ()는 성보(成甫). 조선 때 효자(孝子)였다.

현상구(玄尙龜) ()는 성서(聖瑞). 조선 때 생원(生員)을 지냈다.

현정구(玄鼎龜) ()는 휴징(休徵), 조선에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 制使)를 역임하였다.

<창원계(昌原系)>

현덕유(玄德裕) 시호(諡號)는 정헌(正獻), 고려(高麗)에서 이부(吏部)․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현승(玄 昇)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현경(玄 璟) 고려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장(玄 璋) 고려에서 추밀원사(樞 密 院使)를 역임하였다.

현간(玄 簡) 고려 때 상의 사도(尙衣司徒)를 지냈다.

현문혁(玄文爀) 고려에서 도원수(都元帥)에 이르렀다.

현상혁(玄象爀) 고려 때 삼사사(三司事)를 역임하였다.

현태로(玄台老)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현우(玄 佑) 고려(高麗) 때 영전사(營典事)를 역임하였다.

현적(玄 覿) 고려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현원의(玄元義) 고려조에서 예조전서(禮曹典書)를 지냈다.

현유의(玄惟義)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현지준(玄之俊) 조선(朝鮮)에서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현일관(玄一寬) 조선조(朝鮮朝)에서 문하평리 판위위사(門下評理判衛尉事)를 지냈다.

현효생(玄孝生) 조선 때 군기 소윤(軍器少尹)을 지냈다.

현맹담(玄孟淡) 조선(朝鮮) 때 지후(祗候)를 역임하였다.

현인귀(玄仁貴) 조선조(朝鮮朝)에 수사(水使)를 지냈다.

현석규(玄碩圭) 1430(세종 12)1480(성종 11) ()는 덕장(德璋), ()는 청단(淸湍), 시호(諡號)는 이안(夷安),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 1453(단종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집경전직(集慶殿直)․내섬시 직장(內贍侍直長)을 지내고 1460(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감찰(監察)를 역임했다.

1474(성종 5)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형옥(刑獄)을 신속 명석하게 처리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후 대사헌․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1478(성종 9)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 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청원으로 임기가 지난 뒤 1년간 더 재직하고 어의(御衣)를 하사(下賜) 받았다. 1479년 유진장(留鎭將)이 되어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우고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현사원(玄士元)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현계손(玄季孫) 조선조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를 역임하였다.

현준(玄 俊)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현건(玄 健)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현명의(玄明義) 조선(朝鮮)에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다.

현사숙(玄思肅) 조선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현사우(玄思佑) 조선조에서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현석린(玄石璘)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현오존(玄吾存) 조선 때 교위(校尉)를 지냈다.

현근(玄 瑾) 조선조(朝鮮朝)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현정(玄 珽)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현민(玄 珉) 조선(朝鮮) 때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역임하였다.

현규(玄 奎) ()는 문백(文伯). 조선조에서 좌랑(佐郞)을 지냈다.

현기문(玄起文)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현수간(玄守諫) ()는 은재(隱齋). 조선 대 부사(府使)를 지냈다.

현이석(玄貽錫) ()는 대지(大之). 조선(朝鮮) 때 사재 직장(司宰直長)을 지냈다.

현명운(玄明運) ()는 덕경(德卿).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현상건(玄尙健) ()는 성로(聖魯). 조선(朝鮮)시대에서 시종(侍從)을 지냈다.

현성운(玄星運) ()는 경서(景瑞), ()는 남재(南齋).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현동건(玄東健) ()는 영숙(永叔). 조선(朝鮮) 때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역임하였다.

현승운(玄昇運) 조선 때 수사(水使)를 지냈다.

현호민(玄好敏) ()는 경눌(敬訥). 한말(韓末)에서 내부 협판(內部協辦)을 역임하였다.

현학두(玄學斗) ()는 진화(鎭華). 한말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을 역임하였다.

현백운(玄百運) ()는 경도(景陶). 한말에 찬시(贊侍)를 역임하였다.

현학표(玄學杓) ()는 두화(斗華). 한말에 감리(監理)를 지냈다.

현영운(玄暎運) ()는 태시(泰始), ()는 개정(改汀). 조선 때 원수부총장(元官帥總長)을 지냈다.

현석운(玄錫運) ()는 재승(載昇), ()는 산해(山海). 조선 때 장 례원 사향관(掌禮院祀享官)을 지냈다.

<순천계(順天系)>

현보(玄 甫) 고려(高麗) 때 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현병성(玄秉性)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현충수(玄忠守) ()는 수일(守一). 고려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현성(玄 成) 고려(高麗)에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현광수(玄光壽)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현지우(玄之佑) 고려에서 전객시사(典客侍事)를 지냈다.

현인량(玄仁亮) 조선(朝鮮) 때 수군 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다.

현자강(玄自强) 조선 때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현치후(玄致厚) 조선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현윤(玄 玧) 조선조(朝鮮朝)에서 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현적복(玄積福) ()는 성중(誠仲), ()는 남촌(南村). 조선 때 효자(孝子)로 칭찬을 받았다.

현극(玄 極) ()는 여용(汝用). 조선(朝鮮) 때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하였다.

현태시(玄太始) ()는 이순(而淳).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현두찬(玄斗燦) ()는 회보(晦甫)․청금당(聽琴堂). 조선 때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다.

현두현(玄斗賢) ()는 이의(而義).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현즙(玄 楫) ()는 여제(汝濟). 조선(朝鮮)에서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였다.

현태초(玄太初) ()는 이혼(而混). 조선조(朝鮮朝)에 방어사(防禦使) 를 역임하였다.

현태허(玄太虛) ()는 성칠(星七).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현지후(玄之厚) 조선 때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현벽(玄 壁)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현말승(玄末丞)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현석로(玄碩老)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현옥(玄 玉)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현광우(玄光宇) ()는 여대(汝大), ()는 실암(實菴).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현영조(玄永祚) ()는 효이(孝而). 조선(朝鮮)에서 효자(孝子)로 칭찬을 받았다.

현중조(玄重祚) ()는 후이(厚而). 조선 때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현서익(玄瑞翼) ()는 휘중(輝仲). ()는 옥천(玉泉). 조선 때 학 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다.

현계우(玄啓宇)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현명호(玄明昊)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현범렬(玄範烈) ()는 사열(士烈). 조선(朝鮮) 때 효자(孝子)로 칭찬을 받았다.

현을신(玄乙信)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현수익(玄壽翼) ()는 기중(耆仲). 조선에서 진사(進士)를 지냈다.

현한성(玄漢聲) ()는 치문(穉聞).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현지명(玄之溟) ()는 유명(由明). 조선조에 별제(別提)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