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신창표씨시조(新昌表氏) 중국 고대 오계시대에 후주의 이부 상서 표대박(表大㺪)

작성일 : 2017-05-28 16:22 수정일 : 2019-07-17 15:20

신창표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표씨(表氏)는 중국(中國)에서 귀화(歸化)해 온 성씨(姓氏)로서, 현존(現存)하는 관향은 신창(新昌) 단본(單本)이며,「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 37본(本)까지 기록되어 있다.

신창표씨(新昌表氏)는 중국 고대(古代) 오계시대(五季時代 : 오대의 문란해진 시대를 일컫음)에 후주(後周)의 이부 상서(吏部尙書) 표대박(表大㺪)이 서기 960년(고려 광종 11) 장(張)․방(方)․위(韋)․변(邊)․윤(尹)․진(秦)․감(甘)․황보(皇甫) 등 8성(八姓)과 함께 고려(高麗)에 들어와 귀화(歸化)함으로서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어, 후손들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온창 백(溫昌伯)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시조(中始祖 : 일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창(新昌)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땅인 굴직현(屈直縣)을 통일신라 때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 온양)에 딸리게 하였고, 고려 초에 신창현으로 개칭하여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 때 온수현(溫水縣 : 온양)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곧 다시 갈라서 신창현으로 하였고 1914년 아산군(牙山郡)에 들어가 신창면(新昌面)이 되었다.

신창표씨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감찰(監察)을 지낸 계(繼)의 아들 연말(沿沫)을 들 수 있는데,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워 성종(成宗)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장령(掌令) ․시독관(試讀官)․사간(司諫) 등을 지냈으며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이름이 높아 성종(成宗)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헌(憲)과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譯官)․명문장(名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정로(廷老)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宣祖) 때 명(明)나라에서 사신(使臣)이 오게 되자 정로(廷老)는 원접사(遠接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평안도 의주(平安道義州)까지 마중을 나갔다.

명(明)나라 사신(使臣)은 연회석상(宴會席上)에서 은행(銀杏)알을 불에 구워 먹다가 문득 이쪽의 실력을 떠 볼 생각으로 “은행껍질 속에는 푸른 구슬이 감추어져 있구나(銀杏甲中藏碧玉)”라고 시(詩) 한 구(句)을 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로(廷老)는 촌각(寸刻)을 두지 않고 “석류껍질 안에는 주사(朱砂 : 붉은 모래)가 점점이 박혀 있구나(石榴皮과 點朱砂)라고 화답(和答)하니 명나라 사신은 역관(譯官)의 실력이 이렇듯 우수하니 원접사(遠接使)로 온 사람의 실력이야 어떠하겠느냐 하면서 그때부터 공손해졌다고 한다.

그 외 인물(人物)로는 참봉(參奉)을 지낸 근석(根碩)․인(仁)․명서(明瑞)와 의병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받은 광수(光守)가 신창 표씨(新昌表氏) 가문을 더욱 더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창표씨(新昌表氏)는 전국에 28,8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 대 인 물

표덕린(表德麟)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표덕봉(表德鳳) 고려(高麗)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표덕귀(表德龜)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표성익(表聖翼) 고려에서 문사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표운중(表運重) 고려조(高麗朝)에 학사(學士)를 역임하였다.

표인려(表仁呂) 자(字)는 성중(聲重). 고려조(高麗朝)에 합문 지후(閤門祗侯),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으로 온창백(溫昌伯)에 봉해졌다.

표광원(表光遠) 고려(高麗) 때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냈다.

표을충(表乙忠) 자(字)는 군직(君直), 호(號)는 백은(白隱). 고려(高麗)말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상주(尙州)의 백화산(白華山)으로 은퇴하여 세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표하(表 河) 자(字)는 청보(淸甫). 조선(朝鮮)에서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했다.

표별(表 潎) 자(字)는 징보(澄甫).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표계(表 繼) 자(字)는 백종(伯宗), 호(號)는 한훤재(寒暄齋).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표위(表 緯) 자(字)는 이종(李宗). 조선조(朝鮮朝)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표위산(表偉山) 자(字)는 여종(汝宗).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표연원(表沿源) 자(字)는 대유(大游). 호(號)는 구계(龜溪).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표연한(表沿漢) 자(字)는 범유(凡遊), 호(號)는 평암(平巖).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副詞)를 지냈다.

표연말(表沿沫) ?-1488(연산군4) 자(字)는 소유(少游), 호(號)는 남계(藍溪), 계(繼)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71년(성종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484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掌禮院司議)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兵科)로 급제, 장령(掌令), 시독관(侍讀官), 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1495년(연산군 1)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직제학(直提學)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했으며, 그 후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소릉(昭陵)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미화(美化)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銀溪驛)에 이르러 죽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유호인(兪好仁) 등과 성종(成宗)의 총애를 받았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함양(咸陽)의 귀천서원(龜川書院),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표연수(表沿洙) 자(字)는 윤유(胤游), 호(號)는 임천(林泉). 조선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표연허(表沿滸) 자(字)는 사유(士游).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표정명(表貞命) 조선조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표응(表 凝) 자(字)는 균부(均夫).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표준(表 準) 자(字)는 규부(規夫), 호(號)는 회헌(檜軒). 조선조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표빙(表 憑) 자(字)는 행부(行夫), 호(號)는 퇴우정(退憂亭). 조선에서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표충(表 庶) 자(字)는 이부(而夫), 호(號)는 망우정(忘憂亭).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표빈(表 贇) 자(字)는 수연(粹然), 호(號)는 모재(茅齋).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표헌(表 憲) 자(字)는 숙도(叔度), 호(號)는 심안당(審安堂). 선조(先祖)의 어전통사(御前通事)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접연(接宴)할 때 임기응변적 통역과 조치로서 왕의 곤경을 모면케 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에 피란 중인 왕이 명나라에 가려 함을 간(諫)하여 그만두게 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표정로(表廷老) 역관(譯官) 헌(憲)의 아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선조 때 원접사(遠接使)의 역관이 되어 의주(義州)에 가서 명(明)나라 사신을 맞을 때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통사(通事)를 거쳐 1616년(광해군 8)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표정준(表廷俊) 한미(寒微)한 집안에 태어나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 만호(萬戶),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 뒤에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당시 대신(大臣)인 김상헌(金尙憲)과 절친했다.

표근석(表根碩) 자(字)는 대배(大培), 호(號)는 구암(龜巖). 조선조에 참봉(參奉)을 지냈다.

표인(表 仁) 자(字)는 원지(元之).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표명서(表明瑞) 자(字)는 덕우(德佑).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표광수(表光守) 자(字)는 성여(聖汝), 호(號)는 백파당(栢坡堂). 1592년(선조 25)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로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卷)을 받았다.

표흥엽(表興燁) 자(字)는 형만(亨晩). 조선조(朝鮮朝)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