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절강편씨시조(浙江片氏),편갈송(片碣頌),절강편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8 11:22 수정일 : 2018-03-02 11:35

시 조

편씨(片氏)는 중국(中國) 당(唐)나라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본래 남송(南宋) 때 현유(賢儒)인 이 동(李 侗)의 8 대손 이 지(李 址)가 명조(明祖) 때 한림원 태학사(翰林院太學士)로서 일편단심(一片丹心) 충간(忠諫)의 공(功)으로 편씨(片氏)를 사성(賜姓)받았다.

우리 나라 편씨(片氏)의 연원(淵源)은 편 지(片 址)의 현손(玄孫)인 편갈송(片碣頌)이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군무총병유격장(軍務總兵遊擊將)으로 들어와 평양(平壤)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귀국(歸國)하였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중군도독(中軍都督)으로 다시 조선(朝鮮)에 건너와 직산(稷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선조(宣祖)로부터 노고를 치하하는 친서를 받았으며, 당시 본국(本國)의 어지러운 소식을 듣고 환국을 단념한 뒤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隱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아들, 풍세(豊世)․풍원(豊源)․산보(山甫) 3형제가 금오산으로 와서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갈송(碣頌)의 상(喪)을 당하자 삼년(三年) 간 시묘(侍墓) 한 후 경주(慶州)를 떠나 풍세(豊世)와 풍원(豊源)은 나주(羅州)에, 산보(山甫)는 만경(萬頃)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편갈송(片碣頌)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향(先鄕)인 절강(浙江)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게 되었다.


본관의 유래

절강(浙江)은 중국(中國) 동남부(東南部)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楊子江)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東西)로 나누어져 항주(抗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편씨의 가계(家系)는 나주(羅州)에 뿌리를 내린 풍세(豊世)가 슬하에 아들 성대(成大)와 문수(文秀)를 두었으며, 풍원(豊源)은 응복(應福)․한정(漢鼎)․영표(永標) 3형제를, 만경(萬頃)에 정착한 산보(山甫)는 외아들 순당(郇堂)을 두어 이들의 자손대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역사상 뛰어난 인물로는 고종(高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주 중군(全州中軍)을 지낸 기진(沂珍)과 정평 부사(定平府使) 좌언(佐彦)이 있으며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날린 강렬(康烈)․덕렬(德烈)이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편씨(浙江片氏)는 전국에 9,4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절강편씨조상인물

편풍세(片豐世) 자(字)는 개륜(凱倫), 호(號)는 남헌(남軒). 명나라에서 어양 안찰사(漁陽按察使)와 각노(閣老)를 지내다가 우리 나라에 원군(援軍)으로 나온 아버지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간신(奸臣)의 모함으로 환국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우와 함께 우리나라에 건너와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奉養)하다 상을 당해 3년간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그의 효성(孝誠)을 경탄하면서 ‘절효선생(節孝先生)’이라 일컫었다. 시묘를 마친 후 나주(羅州)에 세거지를 정했다.

편풍원(片豐源) 자(字)는 대창(大昌), 호(號)는 동헌(東軒). 명나라에서 영안 태수(永安太守)․한림 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내다가 아버지 갈송(碣頌)이 조선(朝鮮)에서 귀국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형 풍세(豐世)․아우 산보(山甫)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다가 상(喪)을 당해 3년간 시묘(侍墓)를 하루같이 마쳤다. 3형제가 귀국을 단념하고 유람삼아 남하(南下)하여 형과 나주(羅州)에 세거지를 마련했다. 1861년(철종 12)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편산보(片山甫) 자(字)는 평보(平甫), 호(號)는 운곡(雲谷).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났으나 벼슬을 거부하고 임천(林泉)에 묻혀살다가 아버지가 조선(朝鮮)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두 형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했다. 상(喪)을 당해 형들과 함께 시묘한 후 두 형들과 함께 주유(周遊)하다 만경(萬頃)에서 잠시 머무른 후 영광(靈光)에 세거지를 마련했다.

편성대(片成大) 자(字)는 형복(亨福), 호(號)는 은림(隱林).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근왕 7조문을 반포하여 국기를 숙정하고 정예 훈련을 시킨 의병을 모집한다는 격문을 받고 조수성(曺守誠)을 찾아 거의(擧義)할 뜻을 말하자, 조수성이 그에게 훈련대장(訓練大將) 겸 독전군관(督戰軍官)을 임명하여 5만여 의병을 훈련하게 했다.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다 청주(淸州) 서평원(西平源)에서 호병 9 급 (級)을 참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인조(仁祖)가 삼천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편영표(片永標) 자(字)는 형지(亨之), 호(號)는 소은(素隱).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호병(胡兵)이 침입해 오자 나주읍내(羅州邑內)에서 근왕병을 모집한다는 격문을 포고하여 2백여 의병을 규합(糾合)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로부터 군량을 보조받고 자기집 곡식을 털어내어 군대를 먹이면서 훈련을 쌓아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상(主上)께서 되놈에게 무릎을 꿇은 곤욕을 당했는데 신민(臣民)된 자 살아서 무엇하랴?” 하고 할복 자결했 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편순당(片郇堂) 자(字)는 긍재(肯載), 호(號)는 백경옹(白耕翁)․운송당(雲松堂). 아버지 산보(山甫)의 유훈을 지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청백(淸白)을 신조로 삼고, 와우산(臥牛山) 아래 운송당(雲松堂)을 짓고 글만 읽으면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백경옹서문(白耕翁序文)」 과 「운송당기(雲松堂記)」 및 백발탄가(白髮嘆歌) 한 편이 전한다.

편두지(片斗智) 자(字)는 영칙(盈則). 하늘이 낸 효자로서 영광군민(靈光郡民)이 <편효자비(片孝子碑)>를 세우고, 그가 살던 곳을 효자동(孝子洞)이라 일컫었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송인수(宋麟壽)의 장계(狀啓)로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편석수(片錫壽) 자(字)는 종원(鍾元), 호(號)는 청헌(淸軒). 사시는 정절(貞節). 조선(朝鮮) 때 학문이 해박(該博)하고 언행이 충직했으며 행의가 고결하여 추앙을 받았다. 젊었을 때 상배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유람길을 떠나 서산(瑞山)의 안면도(安眠島)에 이르러 산 수가 좋을 뿐 아니라 인심이 후하므로 그곳에 터를 잡아 정착했다.

은일(隱逸)로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편두생(片斗生) 자(字)는 수인(秀仁), 호(號)는 돈은(遯隱). 1707년(숙종 33)행평릉찰방(行平陵察訪)에 제수되어 치적(治績)을 쌓아 학교를 세우고 풍속 순화와 교화에 힘쓰며 민원 일소를 선무로 삼았다. 주민들이 그의 선치와 공적을 치하하고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편운태(片雲泰) 자(字)는 영숙(永淑), 호(號)는 경산(經山).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의 문인. 학행이 뛰어나 동문의 모범이 되었다. 정조조(正祖朝)에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영달에 뜻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편몽득(片夢得) 자(字)는 인숙(仁淑). 조선조(朝鮮朝)의 지극한 효자로 부모상(父母喪)을 당해 여막(廬幕)에서 3 년 시묘할 때 호랑이가 와서 여막을 지켜 주고 식수가 없는 산골짜기에 샘이 솟아났다 한다. 효행(孝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첩(職牒)이 내렸다.

편장우(片章宇) 조선 때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편광휘(片匡輝) 자(字)는 윤지(允之). 조선 때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편순대(片順大) 자(字)는 지순(志順).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편홍기(片弘基) 자(字)는 사유(士裕), 호(號)는 면재(勉齋). 1861년(철종 12) 시조(始祖) 갈송(碣頌)의 사손(嗣孫)으로 잠정 입시하였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어 「삼세충효집(三世忠孝集)」을 받았다.

편기석(片基碩) 자(字)는 사옥(士玉), 호(號)는 연옹(連翁). 조선(朝鮮)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편웅주(片雄柱) 자(字)는 치홍(致弘).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편만직(片萬直) 초명(初名)은 성환(城煥), 자(字)는 이벽(而璧). 1885년(고종 2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황단수직관(皇壇守直官)을 지내고, 1890년 풍기군수(酆基郡守)를 거쳐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이르렀다.

편기진(片沂珍) 자(字)는 점수(點叟). 1885년(고종 2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겸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전라도중군(全羅道中軍)을 지냈다. 1873년(고종 10) 그의 주관 아래 편씨족보(片氏族譜)를 처음 편간했다.

편홍석(片弘錫) 자(字)는 문약(文若), 호(號)는 관수당(觀水堂). 시조(始祖) 갈송(碣頌)이 임진(壬辰)․정유란(丁酉亂)에 전공을 세우고 귀화했으나 국가의 은전이 없음을 한탄하여「자치통감(資治通鑑)」․「정원일지(政院日誌)」․「임진록(壬辰錄)」과 각 가문에 소장된 문헌에서 발췌, 갈송(碣頌)이 내원(來援)한 업적을 집대성한 「동원기략(東援記略)」2권을 엮어 예조(禮曹)에 바치자 철종(哲宗)이 탄복하여 대보단 수직관(大報壇守直官)에 제수하였다. 이후로부터 황단(皇壇)에 참배하게 되었고 문․무 급제자(文武及第者)가 많이 배출되었다.

편좌언(片佐彦) 자(字)는 윤서(윤서).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편호익(片鎬翊) 일명(一名) 응구(應九), 자(字)는 기준(箕俊), 호(號)는 모명재(慕明齋). 중국에 들어가 편씨(片氏)의 세계(世系)를 자세히 알아서 전하라는 유훈(遺訓)을 받들어, 아들 병열(炳烈)을 시켜 2년 동안 단자를 수합하여 「갑진대동보(甲辰大同譜)」를 편간했다. 경술(庚戌) 합방을 통분히 여겨 음독 자결했다.

편채언(片采彦) 자(字)는 용서(龍瑞). 1875년(고종 12) 일본 군함 운양호(雲楊號)가 강화도(江華島) 수병초지진(水兵草芝鎭) 앞바다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이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편영기(片永基) 자(字)는 윤명(允明), 호(號)는 명사(明史). 한말(韓末)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편용기(片容基) 자(字)는 응규(應奎). 한말(韓末)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편강렬(片康烈) 1892(고종 29)~1929

호(號)는 애사(愛史), 상훈(相薰)의 아들. 황해도 연백(延白) 출신.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1905 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 년 영남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전국의 의병이 양주(楊洲)에 집결, 서울로 진격할 때 선두에서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910 년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5 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계속하여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 주비대(九月山籌備隊)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그후 만주에 망명, 봉천성 회덕현(奉天省懷德縣)에서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고 장춘(長春)에 있는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 이어 봉천의 시가전 등을 선두 지휘하고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州)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심한 고문으로 발병(發病), 병보석되었으나 병사했다. 1962 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服裝)이 수여되었다.

편덕렬(片德烈) 호(號)는 국사(菊史). 3․1운동 때 형 강렬(康烈)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주(滿州)로 망명하여 연통제(聯通制) 국경 주재 연락의 지령으로 동현(東縣)에 있는 영국 상사 이륭양행(怡隆洋行)에서 각 기관과의 연락을 취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정원(上海臨時 政府議政院) 연백군(延白郡) 대표로 참여했다.

그후 안창호(安昌浩)의 지령으로 애국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귀로에 평양(平壤)에서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뤘다. 1977년 대통령(大統領) 표창이 내렸다.

편무경(片茂景) 일명(一名) 수채(受彩), 자(字)는 운기(雲起), 호(號)는 덕포(德圃). 1919 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하여 호남유생봉도기(湖南儒生奉悼旗)아래서 통곡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3 일만에 방면되었다.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영정을 봉안하고 돌아와 매 휘일(諱日)에 단을 베풀고 망배하며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