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순태씨시조(永順太氏),태금취(太金就)

작성일 : 2017-05-28 10:44 수정일 : 2019-02-13 14:1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영순태씨(永順太氏)는 태씨(太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중상(太仲象)의 18세손으로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병마원수(病馬元帥)로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진 태웅성(太雄成)의 아들 태금취(太金就 : 일명금룡)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의하면 금취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교(金郊)에서 몽고군(蒙古軍)을 격퇴하는데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永順 : 경북 상주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져, 상주군(尙州郡)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협계 태씨(陜溪太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영순(永順)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영순(永順)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상주(尙州)의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상주(尙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高麗) 때 영순(永順)으로 고쳐 현(縣)으로 승격하고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다. 지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군(聞慶郡) 영순면(永順面)이다.


대표적인 인물

영순태씨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효정(孝貞)의 아들 두남(斗南)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김진양(金震陽)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배워 1513년(중종 8)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으며, 1536년(중종 31) 종부시정(宗簿시正)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했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서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나 저서(著書)로 「쇄언(瑣言)」을 남겼으며,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이 외 언룡(偃龍)과 순민(舜民)이 진사(進士)를 지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순태씨(永順太氏)는 전국에 4,6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영순태씨조상인물

태광현(太光顯)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태윤취(太允就) 고려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태윤좌(太允佐) 고려(高麗) 때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하였다.

태영길(太英吉) 고려(高麗)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태두남(太斗南) 1486(성종17)~1536(중종31) 자(字)는 망이(望而), 호(號)는 서암(西菴). 김진양(金震陽)의 문인. 1513년(중종 8)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같은 해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을과(乙科)로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집의(執義)를 지내고, 1536년(중종 31)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했다.

이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진양의 장례를 성의껏 보살폈다가 김안로에 의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어 재직 중 죽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태언룡(太偃龍)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태순민(太舜民) 조선에서 진사(進士)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