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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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27 20:57 수정일 : 2019-11-01 10:3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추씨(秋氏)는 중국(中國)에서 들어 온 성씨(姓氏)이다. 중국 송()나라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예부상서 등에 오른 명신 부라(符羅)공 추 엽(秋 饁)이 고려 인종(仁宗) 때 가솔을 이끌고 함흥(咸興)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 의하면 시조(始祖)를 추적(秋適)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추엽(秋適)은 추엽(秋饁)의 손자로 한국 추씨의 3세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본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이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중 다수파는 전주(全州)와 추계(秋溪) 두 본()이다.

추계(秋溪)는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양지읍(陽智邑)를 말하며 증보 문헌비고에 추씨의 시조는 추적(秋 適)이며 추계인(秋溪人) 이다란 기록을 근거로 하여 관향을 추계(秋溪)로 삼은 것이고, 전주(全州)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의 추수경(한국 추씨 10세손) 장군의 후손들이 전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이다.


추씨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 의하면 추 엽()의 아들 추 황()1209(고려 희종 5) 성균시험(成均試驗)에 장원하고, 1213(강종 3) 문과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禮部尙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추 황의 아들 추 적()은 문장에 뛰어났고,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등을 역임한 후 시랑(侍郞) 겸 국학교수(國學敎授)에 이르러명심보감(明心寶鑑)을 저술하였다. 그의 손자 추유()는 중국(中國) 금산사에서 주 원장을 만나 의형제를 맺고 명나라 건국에 동참하였으며 이후에 부모국인 조선에 외교사절로 왔었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중국(中國)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추적()의 후손인 추익한(益漢)은 세종(世宗)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후 향리(鄕里)로 돌아가 시서(詩書)로 소일하다가 어린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유배되어 오자 머루다래 등을 따다 바치며 충성(忠誠)을 다 하였다. 1457(세조 3) 단종(端宗)이 살해되자 그도 따라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시 단종(端宗)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秋忠臣)이요 죽어서는 엄충신(嚴忠臣)>이라고 일컬었으며, 지금도 영월(寧越)에 있는 영모전(永慕殿)에는 그의 충성을 기려 백마를 탄 단종(端宗)의 혼백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 명나라의 이부시랑(吏部侍郞) 추천일(天日)의 아들 추수경(水鏡)은 명나라에서 무강자사(武康刺史)로 재임 중 조선(朝鮮)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병(援兵)으로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이 되어 아들 노()() 형제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곽산(郭山)동래(東萊) 등지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국().().() 세 아들이 새로 참전하여 육 부자(六 父子)가 전주(全州)싸움에 임하였다. 그 때 추 수경 장군이 전사(戰死)하자 조선의 선조왕은 그를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하였다.

한말(韓末)에 와서는칠의사(七義士)의 한 사람이었던 추 치경(致鏡)이 충주(忠州) 장현(長峴) 전투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충절의 가풍을 이었으며, 용만(鏞滿)과 용소(鏞召) 형제는 합천(陜川)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日本)수비대를 공격하다 순국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외에 전북 익산(全北 益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윤현보와 함께 영암(靈岩)동해(東海) 등지에서 활약한 추기엽(琪燁)과 군자금 마련을 하다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추교철(敎哲) 등이 있었고, 추규영(圭映)은 독립 애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어 동지규합에 노력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 모금에 공헌하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추계추씨(秋氏)는 전국에 45,7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추씨조상인물

추엽(秋饁) : 송나라 고종 소흥 11년 문과 급제 후 임금을 잘 부필한 공직으로 여러 청 요직을 역임하고 예부상서에 오른 명신 자라라공이 함흥연화도에 고려 인종때 정착하였다.

추황(秋篁) 1198(고려 신종 1)1259(고려 고종 46) 초명(初名)은 영수(永壽), 호(號)는 회암(悔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1209년(고려 희종 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213년(고려 강종 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시랑(侍郞)으로 재임 중 몽고군의 침입으로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게 되었고, 이때 임금을 잘 보필한 공적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으며, 이어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예부상서(禮部尙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다. 저서(著書)로는조의혼상제례(朝儀婚喪祭禮)가 있었으나 지금은 책명(冊名)만이 전한다.

 

추적(秋適) 1246(고려 고종 33)1317(고려 충숙왕 4) ()는 관중(慣中), ()는 노당(露堂), 시호(諡號)는 문헌(文 憲), ()의 아들로 1260(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안동서기(安東書記)에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뒤에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일찍이명심보감(明心寶鑑)을 저술했고, 교수(敎授)로서 학도(學徒)들을 가르쳤다.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능했다.

 

 

추진(秋震) 1296(고려충렬왕 22)1368(고려 공민왕 17) ()는 진성(振聲), ()는 경제(敬齋),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1314(충숙왕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거쳐 원주판관(原州判官)을 지냈다.

그 후 천장시(天場試)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문무(文武)를 겸하여 중산대부(中山大夫)로 병부시랑 (兵部侍郞)에 올라 무반(武班)의 전선(顚選)을 관장하였다. 이어서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했다.

추뢰(秋雷) 1298(고려 충렬왕 24)1361(고려 공민왕 10) ()는 위성(威聲), ()는 익제(益齋), ()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였다.

추영(秋瀅) 1315(고려 충숙왕 2)1400(조선 정종 2) ()는 성삼(聖參), ()는 낭산(浪山)명와(明窩).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철성부 판관(鐵城府判官)을 지냈다. 지신사(知申事)로 있을 때 소인배들의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서용(敍用)되기 시작하였고, () 세력의 제거에 앞장서 그 공()을 인정받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그후 공민왕(恭愍王)이 타살(他殺)되는 등 정국(政局)이 혼란하므 로 벼슬을 그만두고 현령(縣令)으로 근무하였던 강원도(江原道) 평창(平昌)으로 이거(移居)하여 시서(詩書)에 몰두 하였다. 이방원이 낭산을 찾아 새왕조에의 출사를 간절히 청하였으나 친원파(親元派) 숙청(淑淸)에 주역을 한 대쪽 같은 성품이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자 고령을 핑계로 벼슬을 고사하였다.

추익한(秋益漢) 1383(고려 우왕 9)1457(조선 세조 2) ()는 우삼(友三), ()는 우천(愚川), ()5세손. 어려서 부터 지혜롭고, 행동이 공순(恭順)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411(조선 태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등으로 승진하였으나 나이가 많아서 직분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강원도 평창(平昌)으로 옮겨서 시서(詩書)를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유배되어 오자 머루다래 등을 따다 바치며 충성(忠誠)을 다 하였다.

지금도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는 영모전(永慕殿)에 그의 충성을 기려 백마를 탄 단종(端宗)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추홍하(秋弘夏) 1456(세조병자)1508(중종무진) 자(字)는 우서(禹敘), 호(號)는 학포(學圃), 우천(愚川)의 3세손. 어려서 부터 지혜롭고, 학문이 효경 성리학 등을 통달하였고 행동이 공순(恭順)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추 유(秋 濡) 1343(고려 충혜왕 4)1404(조선 태종 4) ()는 윤지(潤之), ()는 운심재(雲心齋)덕암(德庵). 1362년 공민왕(恭愍王 11)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 하였으나 정국(政局)이 혼란 하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대명태조를 금산사에서 만나 명나라 건국에 동참하여 많은 전투에서 훈공을 세워 명나라의 두 번째 건국공신(建國功臣)이 되어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1393년 명나라 위유사(慰諭使)로 개경을 방문 조선의 태조와 당당하게 대좌하여 명.조간의 주종관계를 다졌다. 십충칠제중 두 번째 이드라 이 때 할아버지가 지으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중국(中國)에 전파하였다

추귤(秋橘) 1370(홍무 경술)생 자()는 석포(石浦). 명나라의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추섭(秋燮) 1416(영락병신)생 자()는 명여(明汝). 명나라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추서(秋墅) 1444(성화을유)()는 기서(祈瑞). 명나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추천일(秋天日) 1488(홍이무신)생 호()는 연월(煙月),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명나라의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추수경(秋水鏡) 1530(가정경인)1600(조선 선조경자) ()는 청하(淸河), ()는 세심당(洗心堂), 천일(天 日)의 아들. 1591(선조 24)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되고, 1592 (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이 되어 아들 아들 노()()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곽산(郭山)동래(東萊) 등지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국().().() 아들이 합세하여 육() 부자(父子)가 전주(全州)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戰死)하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추노(秋蘆) 1566(정 병인)1624(천계갑자) 자(字)는 화근(華根), 호(號)는 돈암(遯庵). 중국(中國)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안찰사(按察使)를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원병(援兵)으로 조선(朝鮮)에 환국(還國)하는 부친(수경)을 따라와 왜군(倭軍)과 싸워 대첩(大捷)의 공(功)을 세워 선조(宣祖)로부터 특별히 검상(檢詳)․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추인도(秋仁道) 1492(성종임자)1534(중종갑오) ()는 도일(道一).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추언묵(秋彦黙) 1494(성종갑인)생 자()는 대선(代善).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추언공(秋彦恭) 1506(중종병인)생 자()는 윤신(允信), 호는 광제(光齊).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추희손(秋希孫) 1508(중종무진)1574(선조갑술) ()는 희중(希仲).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추서욱(秋瑞郁) 1598(선조무술)1646(인조병술) ()는 청숙(淸淑), ()는 청계(淸溪).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추여욱(秋汝郁) 1600(선조경자)1659(현종기해) 자(字)는 상보(相甫), 호(號)는 한포(寒浦).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추보영(秋普瀅) 1550(명종경술)1611(만력신해) ()는 문서(文瑞).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추백복(秋栢福) 1494(성종갑인)1554(명종갑인) ()는 원세(元世). 조선에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추순수(秋順岫) 1522(중종임오)생 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추원보(秋元甫) 1525(성종을유)생 자()는 보현(甫賢). 조선(朝鮮)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