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황주최씨시조(黃州崔氏),최남혁(崔南赫),황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7 15:33 수정일 : 2018-04-11 17:5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황주최씨(黃州崔氏)의 시조(始祖) 최남혁(崔南赫)이다. 그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전주 최씨(全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고 하나 확증(確證)할 근거가 없다.

그는 1424년(세종 6)에 출생하여 성종(成宗)때 문과에 급제하고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임 중 억울함 누명을 쓰고 의주(儀註)로 유배 당했다가 죽은 후에 누명이 벗겨져 죄를 사면함과 동시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재임지였던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황주(黃州)는 황해도(黃海道)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동홀(冬忽) 또는 동어홀(冬於忽)이었으며 통일신라(統一新羅) 헌덕왕(憲德王)때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考慮) 초에 황주(黃州)라 하였다.

983년(성종 2) 목(木)을 두었고 그 후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천덕군(天德郡)이라 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憮使)를 두었다가 또 목으로 고쳐 서해도(西海道)에 속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지고령군(知高寧郡)으로 강등, 후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였고 1290년 서북면에 이관되었으며 공민왕(恭愍王)때 다시 서해도에 이관, 조선(朝鮮) 세조(世祖)때에 진(鎭)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여 오다가 1895년에 황주군(黃州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인물로는 중식(重湜)이 1826년(순조 26)에 지방과(地方科)에 급제하고 충신(忠臣)의 후손이라 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돈령도정(敦寧都正)에 이르렀다.

후손 의산(義山)은 고향인 의주(義州)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동지 규합에 힘썼으며, 석순(碩淳)은 항일투사로 1919년 만주(滿洲)로 건너가 대한 독립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 휘하의 육군참의부(陸軍參議府) 제2중대장․참의장(參議長)을 지내면서 항일 무력항쟁을 벌였으며, 1925년 일본군(日本軍)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 회의(會議) 중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응전 끝에 전사했다.

또한 군인(軍人)이며 외교관(外交官)으로 이름난 덕신(德新)은 1914년 평북 의주(平北義州)에서 출생하여 1946년 육사(陸士) 3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1949년 미국육군종합학교를 마친 후 주월공사․외무부장관․유엔총회 수석 대표․서독대사 등을 역임하고 1967년 천도교 교령을 거쳐 1971년 종교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황주최씨(黃州崔氏)는 전국에 1,2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황주최씨조상인물

최하(崔河) 자(字)는 덕순(德舜). 조선(朝鮮)때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최맹손(崔孟孫) 자(字)는 윤진(胤進). 조선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최징(崔澄) 조선(朝鮮)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원(崔源)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최응서(崔應瑞)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최응운(崔應雲) 조선 때 내금위장(內禁衛將)․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최응식(崔應植) 조선(朝鮮)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최응감(崔應鑑) 조선에서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추증되었다.

최호례(崔好禮) 조선조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최호지(崔好智) 조선(朝鮮)때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최윤덕(崔潤德) 조선(朝鮮)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다.

최윤신(崔潤身) 조선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최윤적(崔潤績)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다.

최율(崔嵂) 조선조에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을 역임하였다.

최준(崔峻) 조선(朝鮮)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최은(崔訔) 자(字)는 군탁(君卓). 조선(朝鮮)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최득우(崔得雨) 자(字)는 시풍(時豊). 조선(朝鮮)에서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최수간(崔守簡) 조선(朝鮮)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최시원(崔始元) 조선조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최시창(崔始昌) 조선(朝鮮)때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최시규(崔始奎) 조선(朝鮮)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일만(崔一幔) 자(字)는 태만(太幔). 조선(朝鮮)에서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역임했다.

최석진(崔碩璡) 조선(朝鮮)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효일(崔孝一) 자(字)는 원양(元讓),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최태보(崔台甫)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최국주(崔國柱) 조선(朝鮮)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내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최흥보(崔興甫) 조선에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최석태(崔碩泰) 조선조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최필보(崔弼甫)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 겸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을 역임했다.

최상엽(崔尙燁) 조선(朝鮮)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최준극(崔俊極)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상흡(崔尙翕)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최명혁(崔命赫) 조선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최태규(崔泰奎)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역임하였다.

최신엽(崔信燁) 자(字)는 사일(思一). 조선 때 우후(虞侯)를 역임하였다.

최신혁(崔信赫) 자(字)는 찬보(贊甫). 조선 때 우후(虞侯)를 역임하였다.

최국령(崔國嶺) 조선조(朝鮮朝)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최치서(崔峙瑞)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신방(崔信邦) 조선(朝鮮)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덕증(崔德曾) 조선(朝鮮)때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역임하였다.

최신권(崔信權) 조선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달증(崔達曾) 자(字)는 덕수(德叟). 조선 때 토포사(討捕使)를 지냈다.

최봉덕(崔鳳德) 자(字)는 미경(美卿). 조선조(朝鮮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창헌(崔昌憲)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최영조(崔永祚) 조선(朝鮮)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최성렬(崔性烈) 조선(朝鮮)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창휴(崔昌休)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응렬(崔膺烈) 조선(朝鮮)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최경엽(崔景燁)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최관중(崔觀重) 자(字)는 광회(光晦). 조선(朝鮮)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최봉조(崔鳳祚) 조선(朝鮮)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최 하(崔 河) 조선에서 판윤(判尹)을 역임하였다.

최학호(崔學灝) 자(字)는 자숙(子叔).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최중식(崔重湜) 1772(영조 48)~? 자(字)는 가심(可心). 효일(孝一)의 후손으로 1826년(순조 26) 지방과(地方科)에 급제, 충신의 후예라고 하여 특별히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최의산(崔義山) 초명은 동간(東旰), 호(號)는 의산(義山). 12세 때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천도교 고등사범과 및 법과를 졸업하고, 천도교 3세 교조(敎祖)인 손병희(孫秉熙)의 총애를 받아 28세 때 고향인의주(義州)에서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감옥에 가서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중국 상해(中國上海)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류동설(柳東說)등과 독립운동에 있어서 천도교 활동 방향을 협의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동지규합에 힘썼다.

그후 30세 때 만주(滿州)로 다시 건너가 여러 갈래로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하는데 실패하고 36세가 될 때 독립단체인 남만주(南滿州)의 정의부(正義府)와 북만주(北滿州)의 신민부(新民府)를 통합하여 새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한 후 선전과 외교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 부의장(義政院副議長) 및 행정부(行政府)의 외교부장․국무위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최석순(崔碩淳) ?~1925 호(號)는 백순(白淳), 평북 삭주(朔州) 출생. 1919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 집안현 지단장(輯安縣支團長)이 되고, 1924년 임시정부 휘하의 육군 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들어가 제 2 중대장․참의장(參議長)을 역임하며 항일무력항쟁(抗日武力抗爭)을 벌였다.

1925년 국내의 일본군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집안현 고마령(輯安縣古馬嶺) 산곡에서 군사회의를 진행 중 초산(楚山) 경찰서원과 초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응전끝에 전사했다.

최덕신(崔德新) 1914~? 초명은 종호(宗昊), 군인․외교관․종교가. 평북 의주(義州) 출생. 1936년 중화민국 육군 중앙 군관교를 마치고, 1946년 육사 제3기 특별반을 졸업하여, 1949년 미국 포오트릴리 육군종합교를 마쳤다.

1950년 주월 공사를 거쳐, 1961년 외무 장관, 16․17차 유엔총회 수석 대표, 1963년 서독 주재대사를 역임하고, 1967년 천도교 교령, 1971년 종교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최호공(崔昊公) 향리에서 1919년 3월 15일과 동년 6월 14일 두차례 만세시위(萬歲示威)를 주도(主道)하다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服役)하였다. 당시 고등법원(高等法院) 상고심공판기록(上告審公判記錄)을 보면 악독한 일제관헌(日帝官憲)의 고문에 조금도 굴함이 없이, 조선민족(朝鮮民族)으로서 자국(自國)의 자주독립(自主獨立 )을 제창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일본관헌(日本官憲)이 시위군중을 무분별하게 난타(亂打)하니 이를 저지하고자 대항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당당하게 답변(答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