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화순최씨(和順崔氏),화순최씨시조,최세기(崔世基),화순최씨조상인물,화순최씨유래

작성일 : 2017-05-27 15:29 수정일 : 2019-11-01 15:51

화순최씨시조 및 화순최씨유래(본관)

화순최씨(和順崔氏)는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오산(烏山 : 화순별호) 군(君)에 봉해진 최세기(崔世基)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화순(和順)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손 최계(崔系)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화순(和順)은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백제(百濟) 잉리아현(仍利阿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여미(汝湄)로 고치고 능성군(綾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화순(和順)으로 고쳐 나주(羅州)에 속(屬)했다가 후에 능성(綾城)에 편입시켰고 공양왕 때 다시 설치하였다. 1394년(태조 3)에 2현으로 나누어서 동복(同福)을 설치하여 겸임시켰고, 1405년(태종 5) 2현을 합하였으며 1407년(태종 7) 복순(福順)이라 고쳐서 칭하였다.

1416년(태종16) 다시 동복(同福)을 설치하고 화순현을 능성(綾城)에 편입시켰으며, 순성(順城)이라 칭하다가 1418년(태종 18)에 각각 복구하였다. 1594년(선조 27) 능성에 편입시켰고 1611년(광해군 3) 다시 화순현을 설치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능주․동복의 양군을 합하였고 1963년 화순면이 화순읍으로 승격하였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언(堰)의 아들 계신(繼臣)이 고려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를 지냈으며 계신의 두아들 중 영호(永浩)가 충렬왕(忠烈王) 때 보승산원(保勝散員)을 지냈고, 영유(永濡 : 충절공)는 1361년(공민왕 10) 해주 목사(海州牧使)로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포위된 수양성(首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적의 공격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혈서(血書)를 남기고 귀중한 관인(官印)을 안고 깊은 못에 투신 자결했다. 그 후 못 가에 충절비(忠節碑)가 세워지고 못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했다.

영유의 아들 원지(元之)는 조선이 개국되자 금산(金山)의 절에 은거(隱居)했는데, 뒤에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기니 하노라(賀老里)라 불렀다.

원지의 큰 아들 자해(自海)는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고, 자해의 아들 선복(善復)은 경주 부윤(慶州府尹)를 역임했다.

이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선문(善門)이 유명한데, 그는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금릉(金陵)에서 학문에 전심하여 김종직(金宗直)등의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때 정권을 장악하자 좌찬성(左贊成)으로 기용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중홍(重洪)은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삭직 당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 를 지낸 후, 판결사․병조 참의․전주 부윤(全州府尹)등을 거쳐 1524년(중종 19)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학자(學子) 흥림(흥림)은 당시 학문의 대가(大家)인 성제원(成悌元)․조 식(曺 植)등과 교유하며 보은(報恩)의 금적산(金積山)에 은거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화순 최씨(和順崔氏) 가문의 대표적 인물(人物)로 명망이 높았던 영경(永慶)은, 일찍이 조 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여러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가 1584년(선조 17) 교정청 낭관(校正廳郎官)이 되어「경서훈해(經書訓解)」교정(校正)에 참여한 후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그 배후자로 무고를 받아 투옥되어 국문(鞠問)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전정경의(專精敬義)를 학문의 태도로 삼았고, 학문이란 구설(口舌)과 문장(文章)에서 떠나 실생활에 적응시켜 실천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기절(氣節)을 숭상했다.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낸 일(逸)은 음보(陰補)로 벼슬에 올라 교리(校理)를 거쳐 1653년(효종 4) 홍천 현감(洪川縣監)에 올랐고, 1660년(현종 1) 헌납(獻納)으로「효종실록(孝宗實錄)」편찬에 참여 했으며 장성 부사(長城府使)․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뒤에 병조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현감을 지낸 후(垕), 주하(柱夏)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순최씨(和順崔氏)는 전국에 38,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화순최씨조상인물

최계신(崔繼臣) 고려조(高麗朝)에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최영호(崔永浩)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다.

최영유(崔永濡) ?~1361(공민왕 10)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장령(掌令)․사성(司成)․예부 상서(禮部尙書)등을 역임한 후 1361년(공민왕 10) 해주 목사(海州牧使)로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포위된 수양성(首陽城)을 지키다가 적의 화공(火攻)으로성이 함락되자 탈출하여 휴암(鵂岩)에 이르러 관인(官印)을 바위밑 깊은 못에 던지고 투신 자결했다. 그후 못가에 충절비(忠節碑)가 세워지고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했다.

최서지(崔湑之) 고려에서 지영주사(知永州事) 겸 권농 방어사(勸農防禦使)를 역임했다.

최원지(崔元之) 고려조(高麗朝)에 안렴사(按廉使)를 지내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금산(金山)의 절에 은거하였는데 뒤에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기니 하노리(賀老里)라 불렀다.

최준(崔 濬) 초명(初名)은 순(淳), 호(號)는 송은(松隱). 고려에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최덕윤(崔德潤)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최자해(崔自海) 조선 태조(太祖)때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자하(崔自河) 조선(朝鮮) 태조조(太祖朝)에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을 지냈다.

최자빈(崔自濱)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최선복(崔善復) 호(號)는 두곡(豆谷). 조선(朝鮮)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최원로(崔元老) 조선(朝鮮) 세종 때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최한보(崔漢輔) 조선 세종(世宗)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했다.

최한정(崔漢禎) 조선 세종조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최한량(崔漢良) 조선 세조(世祖)때 사예(司藝)를 지냈다.

최선문(崔善門) ?~1455(단종 3) 자(字)는 경부(慶夫), 호(號)는 동대(東臺),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자강(自江)의 아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금릉(金陵)에서 학문에 전심하여 김종직(金宗直)등의 존경을 받았다. 1421년(세종 3) 지평(持平)에 등용되었고 문종(文宗)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단종(端宗)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장악하자 사직, 1455년(단종 3) 좌찬성(左贊成)으로 기용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최한공(崔漢公) 조선(朝鮮) 문종(文宗)때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최한후(崔漢侯) 조선 문종(文宗)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최한원(崔漢源) 조선 성종조(成宗朝)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최한번(崔漢藩) 조선(朝鮮) 성종(成宗)때 지평(地坪)을 역임하였다.

최세식(崔世湜) 조선 성종(成宗)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최함(崔 涵) 조선 중종(中宗)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했다.

최중온(崔重溫) 조선(朝鮮) 성종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최중홍(崔重洪) 1466(세조 11)~1533(중종 28) 자(字)는 자부(子溥), 참의(參議) 한정(漢禎)의 아들. 1483년(성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삭직(削職)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되어 사섬시정(司贍寺正)․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1510년(중종 5) 판결사(判決事), 이듬해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 1516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1524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도 관찰사,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등을 지냈다.

최중연(崔重演) 조선 중종(中宗)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최운(崔 澐)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중숙(崔重淑) 조선 중종(中宗)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홍제(崔弘濟) 조선조(朝鮮朝)에 정언(正言)을 지냈다.

최원(崔 遠) 조선 때 좌윤(左尹)을 지냈다.

최세준(崔世俊) 조선(朝鮮)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최응룡(崔應龍) 조선 명종(明宗)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최경장(崔慶長) 조선(朝鮮) 명종(明宗)때 원정(院正)을 역임하였다.

최여운(崔汝雲)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최경창(崔慶昌) 조선 선조(宣祖)때 경성 부사(鏡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흥림(崔興霖) 1506(중종 1)~1581(선조 14) 자(字)는 현좌(賢佐), 호(號)는 계당(溪堂). 성 운(成 運)의 문인. 보은(報恩)의 금적산(金積山)에 은거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으며, 성제원(成悌元)․조 식(曺 植)등 학자들과 교유(交遊)가 깊었다.

최영경(崔永慶) 1529(중종 24)~1590(선조 23) 자(字)는 효원(孝元), 호(號)는 수우당(守愚堂). 조 식(曺植)의 문인. 한성(漢城 : 서울) 출신. 학문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1573년(선조 6) 이조(吏曹)의 천거로 참봉(參奉)․주부(主簿)․도사(都事)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1581년 다시 지평(持平)으로 등용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1584년 교정청 낭관(校正廳郎官)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교정(交情)에 참여하고 곧 낙향, 159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그 배후자로 길삼봉(吉三峰)이란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자 강 해(姜 海)․양천경(梁千頃)에 의해 그가 길삼봉이라는 무고를받고 투옥당했다.

한때 선조의 특사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투옥, 정적(政敵)인 서인 (西人) 정 철(鄭 澈)의 국문(鞠問)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 이듬해동 인(東人)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었다. 당대 저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전정경의(專精敬義)를 학문의 태도로 삼았고, 학문이란 구설(口舌)과 문장(文章)에서 떠나 실생활에 적응시켜 실천해야 된다고 주창했으며 특히 기절(氣節)을 숭상했다.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 贈), 진주(晋州)의 덕천서원(德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최경운(崔慶雲) 조선 광해군(光海君)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운수(崔橒秀) 조선 때 우윤(右尹)을 지냈다.

최응준(崔應濬) 조선 인조(仁祖)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최흥상(崔興祥) 조선(朝鮮) 인조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최상현(崔象泫) 조선조(朝鮮朝)에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최응징(崔應徵) 조선(朝鮮) 효종(孝宗)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운익(崔雲翼) 조선(朝鮮)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동명(崔東溟)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동제(崔東濟)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일(崔 逸) 1614(광해군 6)~16869숙종 12) 자(字)는 일지(逸之), 호(號)는 석헌(石軒), 상현(象泫)의 아들. 장 유(張 維)의 문인. 1632년(인조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46년 음보(蔭補)로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砥平)․교리(敎理)를 거쳐 1653년(효종 4) 홍천 현감(洪川縣監)이 되었다.

1655년 충청좌우도 암행어사(忠淸左右道暗行御史)가 되고, 1660년(현종 1) 헌납(獻納)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효행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장성 부사(長城府使)가 되었다.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1680년(숙종 6)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뒤에 병조와 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최후(崔 垕) 조선(祖先)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주하(崔柱夏)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익대(崔益大)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최상성(崔尙性) 조선(朝鮮) 대 참찬(參贊)을 지냈다.

최찬(崔 纘) 조선 철종(哲宗)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최윤(崔 鈗) 조선조(朝鮮朝)에 사과(司果)를 지냈다.

최봉신(崔鳳信) 조선 고종(高宗)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해근(崔해根) 한말(韓末)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