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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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5-27 14:31 수정일 : 2018-09-04 14:13

해주최씨의 연원 및 개요

해주최씨시조는 최온(崔溫)이다. 해주의 대령군 사람으로 고려 성종때 해주의 목민관으로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지냈고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진 집안이다.

해주최씨 대동보에 의하면 최온은 재산이 많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호하여 장자 호걸이라 일컬어졌고 해주목사 김홍조의 학정을 막아 백성의 어려움을 구했다고 한다.

해주를 관향으로 삼게 된 연유는 그의 선대 이래로 여러 대에 걸쳐 그곳에 세거해 온데서 후손들이 본관으로 정했다.

해주최씨(海州崔氏)가 고려조에 국성이라 할 만큼 튼튼한 기들을 마련한 것은 문현공 최충이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화려한 관직도 많았지만 여러대에 걸쳐 유종(儒宗)으로 숭앙 받았고, 삼한(三韓) 원로(元老) 상주국(上柱國)이 되었으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예로부터 명인(名人)의 탄생에는 신화같은 진설이 내려오는데 해주최씨 보서 기록에 의하면 모친의 태몽에 규성(奎星)에 별이 엉키어 크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였고, 당시 해주목사 김홍조가 밤에 수양산에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 사흘 동안 산이 울고 용수봉이 무너지며 봉우리 위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뒤덮여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관리를 시켜서 별이 떨어진 곳을 조사해 보니 별다른 일은 없고, 최온(崔溫)의 집에 바로 그때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해주최씨 조상인물

고려 성종5(986년 고려사에는 984년으로 기록)에 황해도 대령군(지금의 海州)에서 태어난 최충(崔沖)은 외모가 출중하고 성품은 굳고 곧았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목종8(1005)에 갑과(甲科: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오조(五朝)에 입조(入朝)하면서 출장임상(出將入相)으로 문무(文武)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문하시중(수상) 등 최상의 관계훈작에 이르기까지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으면서 까지 국정의 핵심인물로 위대한 공적을 남기고 70세에 은 퇴하였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더 큰 업적을 이루었으니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교라 할 구재 학당(九齋學堂)을 창설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유학(儒學)과 문운(文運)을 크게 진흥시켰으며 구재학당을 본받아 정배걸 등 유신 11명이 사립학교를 세워 이른바 12()가 출현하여 사학이 관학을 압도하였는데 그 중 시중공도(구재학당)가 가장 왕성하였다 한다.

이제현의 문헌에 의하면 고려조의 모든 인물이 구재에서 배출되었고 고려 말의 이색 · 정몽주 · 길재 · 문익점과 조선조의 맹사성 · 황희 · 하륜 · 권근 · 원천석 등이 모두 구재학당 출신이었다고 한다.

최충은 자신의 능력을 성실하게 개발하여 한 세상을 아쉬움 없이 살다 감으로서 천년 뒤의 후손들에게 명문의 긍지를 심어주고 동방의 대성(大聖)이요 인간의 대표적 스승으로 받드는 공자에 비견해서 해동공자로 존숭받는 것도 그 위대한 학덕과 공덕 위에 사학으로 사람을 사람 되도록 가르친 성덕(聖德)이 더해졌기 때문이며 문학으로 성공한 역사에 드문 인물이다.

최충이 두 아들에게 훈계한 계이자시(戒二子詩)는 너무도 유명하며 오늘날까지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으며 가훈으로 삼아오고 있다.

*내집에 귀한 것은 없으나 한가지 보배 전하니(家世無長物 惟傳至寶藏)

*문장은 비단으로 여겼고 덕행은 옥같은 보배이니(文章爲錦緯 德行是珪璋)

*오늘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후일 부디 잊지 말라(今日相分村 他年莫耿忘)

*그리하면 나라에 중하게 쓰이게 되고 대대로 더욱 번영하리라(好支廊廟用 世世益興昌)

최충은 문종22(1068) 91583(고려사85)로 타계하여 왕은 문현(文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정종묘정에 배향하였다.

그의 많은 저서와 유품은 정중부의 무인난으로 모두 소실되어 오늘날 전해 오는 것은 계이자시 등 시구 몇 절과 직산의 홍경사비갈(국보7)과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78), 현종사찬 등 금석문자가 전해 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최충의 두 아들 최유선(崔惟善)과 최유길(崔惟吉) 모두 재상에 올랐고 그 후 잉손(8대손)까지 대대로 재상직에 올랐으니 고려사 최충 열전에 최충 자손이 문행으로 재상에 오른 자가 수십이었다고 하였으며, 최사추 열전에는 문벌의 성함이 한 시대에 비할 바가 없었다고 적어 고려 최대의 명문임을 전하고 있다.


문벌거족으로 떠오른 해주최씨는 최충의 손자 대에서 당시의 실려자 이자연의 일가와 23중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최사추(崔惟吉의 자)는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을 사위로 삼았는데 이자겸의 딸 즉 최사추의 외손녀는 예종의 왕비가 되었다.

당시 고려조정을 움직이던 문공인, 유인저 등일 모두 최사추의 사위들이다.

또 최유선은 이자연의 조카 이예를 사위로 삼고 최유선의 손자 최약(崔㵸)은 이자선의 손자 이자덕의 사위가 되었으니 해주최씨를 중심으로 고려조 중기 상류사회가 형성되고 움직인 인상을 받을 정도이다.

정중부의 무인난으로 시작하여 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최우(崔瑀)-최항(崔沆)최의(崔誼)까지 80여년간 무인정권으로 문인들 특히 해주최씨는 큰 타격을 입어 크게 위축되었으며 1백년 가까운 몽고군의 간접지배와 고려말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풍운 속에 조선조에 와서는 45명의 급제자를 내면서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헤동공자 이래 문학으로 해주최씨의 명성을 드높인 인물은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자 일세의 풍류 가였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다.

여류시인의 한 사람인 홍랑(洪浪)과의 로맨스는 우리 국문학사에 한편의 아름다운 전설처럼 전해온다.

뭣버들 가려꺽어 보내로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선조6년 북해평사로 경성에 있을 때 사랑을 맺었다가 이듬해 벼슬이 갈려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될 때 영흥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러 저문 날 비 내리는 속에 버들가지 한줄기를 꺽어 애인 고죽의 손에 건내며 홍랑이 읊었다고 하며 현재 경기도 파주의 고죽묘소 아래 홍랑의 묘가 있으며 시비가 세워져 있다.

고죽은 이이 송익필과 함께 당시 8문장의 호칭을 들었으며 그 중에도 당시 (唐詩)의 대가(大家)로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으로 꼽혔다.


충의(忠義)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고종후 김천일 등과 함께 순국한 최경회(崔慶會) 장군이다.

그리고 조선조 정계(政界)의 해주최씨 인물로는 최만리(崔萬理)와 최규서(崔奎瑞)가 있다.

최만리는 집현전부제학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한 청백리로 유명하며 원칙에 충실한 지조의 인물이었다.

최규서는 조선조 해주최씨 유일의 재상으로 숙종이 장희빈을 정식 왕비로 맞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이인좌난을 토평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친필을 하사받아 현재 안성시 원곡면 불지리 어서각(御書閣)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고 영조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는 간재집(艮齋集)이 전한다. 그 밖의 많은 후손들 이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는데 지면 사정으로 역대 인물편에 간략 게재한다.


해주최씨 대종회는 이 자랑스런 문헌공 선조의 역사적인 탄신1천년(1986)을 맞이하여 여러가지 기념사업과 행사를 가졌다.

1984년에는 [최충연구농총)을 발간하여 기념 심포지엄을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1990년에는 [문헌공탄신천주년기념대동보)를 발간하였으며 1992년에는 경기도 오산에 제2문헌서원을 창건하여 매년 4월 제3일요일에 유림 등 관내기관장과 전국 각 지역 1,500여종친이 운집한 가운데 문현대제를 봉행하고 정기총회를 열어 효자, 효부에게 표창하고 유공자에게 공로패, 고시합격자에게 축하 패를 수여하는 등 숭조상문과 경로효친 사상 등 전통 윤리도덕 함양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해주최씨 백년대계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하여 매년 청년수련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3년에는 중앙청년회가 결성되어 대종회 활성화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최씨는 전국에 201,6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