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통천최씨시조(通川崔氏),최경현(崔景賢),통천최씨조상인물,최운해(崔雲海)

작성일 : 2017-05-26 20:49 수정일 : 2019-07-19 12:41

시 조

통천최씨시조(通川崔氏 始祖)는 고려 때 정의대부(正義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감찰 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한 최경현(崔景賢)이다.

그 후손(後孫)들은 시조(始祖)를 최경현(崔景賢)으로 관향을 통천(通川)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의 유래

통천(通川)은 강원도(江原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 휴양군(休養郡) 또는 금뇌군(金惱郡)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금양군(金壤郡)이 되었고, 고려 초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1285년(충렬왕 11)에 통주방어사(通州防禦使)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통천(通川)이라고 개칭하여 통천군(通川郡)이 되었으나 1762년(영조 38)에 현(縣)으로 하였으며, 1771년(영조47)에 다시 군(郡)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始祖) 최경현(崔景賢)의 두 아들 사순(事舜)과 우순(遇舜)의 후대에서 증손 유(侑)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으며, 녹(祿)의 아들 운해(雲海)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호군(護軍)으로 고우(高郵)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이다.

운해는 아버지의 전공(戰功)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충용위 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었고 조전병마사(助戰兵馬使)에 올라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수차에 걸쳐 왜구를 격퇴한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양공도 절제사(楊廣道節使)가 되어 왜구를 격파하였고, 139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영해에서 왜구를 격퇴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성도 절제사(迡城道節制使)를 거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使)로서 사직했다.

운해의 아들 윤덕(潤德)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다녔고 싸움터에 나가 전공(戰功)을 세워 부사직(副使直)이 되었다. 1433년(세종 15)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萬住)가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돌아오니, 세종이 매우 기뻐하며 친히 영접하여 노고를 위로한 후 우의정(右議政)에 특진시켰다. 그는 장군(將軍)으로 30여 년 간 변경에서 위력을 떨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까지 올랐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아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한편 녹(祿)의 후손이며 자양(自陽)의 아들인 입(岦)은 조선(朝鮮) 중기의 학자로서 문장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승문제조(承文提調)로 외교문서 작성의 제 1인자였고, 여러 차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특히 시(時)와 글씨가 뛰어나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時)․한 호(韓 濩)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리웠다.

그 외 인물(人物)로는 윤덕(潤德)의 아들 숙손(淑孫)이 조선(朝鮮)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숙손의 동생 광손(廣孫)은 군수(郡守)를, 윤덕의 동생 윤옥(潤玉)은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통천 최씨(通川崔氏)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통천최씨(通川崔氏)는 전국에 11,1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통천최씨조상인물

최사순(崔事舜) 고려(高麗) 때 검교문하시랑(檢校門下侍郞)을 지냈다.

최우순(崔遇舜) 고려에서 도첨의 시중(都僉義侍中)을 역임하였다.

최탁(崔 卓) 고려 때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산원 동정(散員同正)을 지냈다.

최유(崔 侑) 고려조(高麗朝)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최록(崔 祿) 고려(高麗)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운해(崔雲海) 1347(충목왕 3)~1404(태종 4) 자(字)는 호보(浩甫), 시호(諡號)는 양장(襄莊), 호군(護軍) 녹원(祿元)의 아들. 아버지의 전공(戰功)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충용위 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고, 전공 총랑(典摠郞)을 거쳐 충주 병마사(忠州兵馬使)를 지낸 뒤 순경(順慶)․영주(榮州)의 조전병마사(助戰兵馬使) 겸 경상도 병선도관영사(慶尙道兵船都管領事)로서 여러번 해구(海寇)를 격퇴하고 그 노획물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민(饑民)을 구호했다.

이어서 판순흥부사(判順馫府使)․전법 판서(典法判書)․충주목사(忠州牧使)․전주목사(全州牧使)를 거쳐 밀직 부사(密直府使)에 이르러 충근좌명공신(忠勤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 겸 판광주목사(判廣州牧使)로서 전공을 세웠고, 1388년(우왕 14)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로서 요동 정벌(遼東征伐) 때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 막하로 출정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이듬해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박위(朴 葳)와 함께 왜구를 격파, 139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경상도 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영해(寧海 : 영덕군)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 뒤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使)․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를 거쳐 참판 승추부사(參判承樞府使)로서 사직했다.

최윤덕(崔潤德) 1376(우왕 2)~1445(세종 27) 자(字)는 백수(伯修)․여화(汝和), 호(號)는 임곡, 시호(諡號)는 정렬(貞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운해(雲海)의 아들. 음보(陰補)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낭장(郎將)․호군(護軍)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1406년 지태안 군사(知泰安郡事)로 나갔다가 1410년(태종 10) 무과(武科)에 급제, 상호군(上護軍)․동북면 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

이듬해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1413년 경성등처 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로 나가 동맹가티무르를 복속(服屬)시킴으로써 야인(野人)들의 준동을 막았고, 영길도 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 총제(右軍摠制)․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했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서 삼군 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쓰시마도를 정벌하고, 1421년 공조 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되었다. 1426년 좌군 도총제부사(左軍都摠制府事), 1428년 병조 판서를 역임, 1433년(세종 15)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萬住)가 여연(閭延)에 침입하자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이를 대파, 그 공으로 우의정(右議政)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 돌아와 무관으로서 재상의 지위에 있을 수 없음을 상소, 무관직에의 전임을 요구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35년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전임하고, 144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활을 잘 쏘았다. 세종(世宗)의묘정(廟廷)에 배향(配享), 통천(通川)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安州)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최윤옥(崔潤玉) 자(字)는 여온(汝溫), 호(號)는 근재(謹齋). 조선조(朝鮮朝)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였다.

최윤복(崔潤福)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최숙손(崔淑孫) 조선에서 전라 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최광손(崔廣孫)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최영(崔 郢) 자(字)는 인기(仁基), 호(號)는 동음(東蔭).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최언(崔 郾) 자(字)는 인방(仁邦). 조선조(朝鮮朝)에 창원 교수(昌原敎授)를 역임하였다.

최중한(崔仲漢) 자(字)는 시장(始章), 호(號)는 매정(梅亭). 조선조(朝鮮朝)에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최입(崔 岦)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이 이(李 珥)의 문인. 1555년 (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 재령 군수(載寧郡守) 때 기민구제(飢民救濟)에 힘써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1584년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 1594년 공주 목사(公州牧使), 1593년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냈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5년 판결사(判決事) 등을 거쳐 형조 침판(刑曹參判)에 이르러 사직, 평양(平壤)에 은거했다.

국내외에서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詩)에 탁월하고 글씨는 송살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고 문장은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나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 호(韓 濩)의 글씨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

저서에「간이집(簡易集)」․「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設)」․「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십가근체(十家近體)」가 있다.

최귀년(崔龜年)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최명식(崔鳴式) 자(字)는 내칙(乃則).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덕우(崔德宇) 자(字)는 국기(國器). 호(號)는 양호(陽湖). 조선조에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최찬재(崔贊齋) 자(字)는 찬권(贊權).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최경만(崔敬滿) 자(字)는 경준(敬俊).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시권(崔時權) 자(字)는 사중(思仲). 호(號)는 야방.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최두한(崔斗翰) 자(字)는 남거(南擧).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최세권(崔世權) 자(字)는 권경(權卿). 조선조에 첨정(僉正)을 지냈다.

최병한(崔炳漢) 자(字)는 여방(汝邦). 조선 때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최규백(崔珪伯) 자(字)는 윤신(允信).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최수철(崔秀喆) 자(字)는 경채(景彩). 조선(朝鮮)에서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최규완(崔珪完) 자(字)는 익화(益華).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최산정(崔山靜) 자(字)는 국탄(國坦), 호(號)는 옥포(玉圃).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최경붕(崔慶鵬) 자(字)는 운징(雲徵).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냈다.

최경한(崔慶漢) 자(字)는 달원(達源). 조선조에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역임하였다.

최희권(崔禧權) 자(字)는 군숙(君淑).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준화(崔峻華) 자(字)는 운보(雲甫). 조선(朝鮮) 때 참찬관(參贊官)을역임하였다.

최성온(崔性溫) 자(字)는 군화(君和). 조선조(朝鮮朝)에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최기전(崔琪鎭) 자(字)는 학서(學瑞). 조선(朝鮮)에서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최홍달(崔弘達) 자(字)는 활여(活與).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副 使)를 지냈다.

최치복(崔致福) 자(字)는 지위(至位). 조선 때 시정(寺正)을 역임하였다.

최이선(崔以臣) 자(字)는 성윤(聖允).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최이헌(崔以憲) 자(字)는 상헌(相憲), 호(號)는 해은(海隱).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이준(崔以準) 자(字)는 사일(仕一).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산려(崔山麗) 자(字)는 국언(國彦).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