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탐진최씨(耽津崔氏),탐진최씨시조,최철(崔哲),탐진최씨유래,탐진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6 17:01 수정일 : 2019-11-04 11:44

탐진최씨시조 및 탐진최씨유래(본관)

탐진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尙藥院直腸)을 지낸 최철(崔哲)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지낸 정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사전의 아들 변()과 열()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각파(各派) 중시조(中始祖)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탐진(耽津)은 전라남도(全羅南道)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동음현(同音현)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 영암(靈岩)․장흥(長興) 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7(태조 17)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고종 32) 강진군(康津郡)이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사전(思全)은 처음에 의술(醫術)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1126(인종 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

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아들 변()과 열()을 두었는데, ()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은「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사전(思全)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이 그 하나를 훔쳐 내었다.

()이 화가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 것이 또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이라고 할 만하다.”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각 파의 중시조(中始祖) 이래의 내력을 살펴보면 화성파(華城派)는 중조(中祖) 응규(應奎)가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그의 아들 상()1056(문종 10)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065(문종 119)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의 아들 원습(原隰)은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냈고, 원길(原吉)은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며, 원습(原隰)의 아들 용폐(龍陛)․용승(龍陞)의 아들 숙륜(叔倫)이 당대에 뛰어났다.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中祖) 준량은 생원(生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아들 령()이 예의 판서(禮義判書)를 지냈으며, 령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직림의 아들 봉()이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봉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만경파(萬頃派) 중조(中祖) 효로(孝老)의 현손(玄孫)이고 능참봉을 지낸 숙()의 아들 학령(鶴齡)은 당대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539(중종 34)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中祖) ()의 아들 표()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학자 이 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 귀령(龜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中祖) 윤덕(允德)은 고려 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가서 살았으며, 손자 호()가 중종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총관(摠管)에 추증되었으며, 호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금남파(錦南派) 중조(中祖) 정원(井元)의 손자 부()는 학자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1482(성종 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금제하여 사가독서를 한 뒤 교리(敎理)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뒤에 호당(湖當)에 뽑혔다.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中祖) ()는 세조(世祖) 때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냈으며,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있었고 한춘의 증손 경란(景瀾)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만경율리(萬頃栗里)에 은거(隱居)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그밖에 인물로는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그린 조선 성종(成宗) 때의 화가 경()이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세조․예종․덕종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성종(成宗)이 안구마(鞍具馬)를 하사 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사전의 후손 홍전(弘甸)은 문장에 능했고 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 등에 밝았으며, 1679(숙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낭관(郎官)을 지냈다. 중일(中一)1450(세종 32)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고 부교리(副校理)겸 독서당(讀書堂) 응교(應敎)․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탐진최씨(耽津崔氏)는 전국에 89,9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탐진최씨조상인물

최변(崔 弁) : 고려(高麗) 인종조(仁宗朝)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최응규(崔應奎) :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최총(崔 聰) : 고려에서 영암군(靈巖君)에 봉()해졌다.

최윤덕(崔允德) : ()는 손암(遜菴). 조선조에 영도첨의(領都僉議)를 역임하였다.

최유락(崔有洛) : 고려(高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최해(崔 海) :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최응삼(崔應參) : 조선에서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최계(崔 啓) :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첨정(訓鍊僉正)을 역임하였다.

최상(崔 尙) : 1056(문종 10) 예부 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어 7도를 순시하고, 1057년 내사사인(內史舍人)․지동궁시독사(知東宮侍讀事)를 거쳐 1061년 좌유덕(左諭德)이 되었다. 1065년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오 고, 1068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최영(崔 齡) : ()는 대수(大壽). 고려(高麗)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최표(崔 彪) : 목은(牧隱) 이 색(李穡)의 문인. 고려 공양왕조(恭讓王朝)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최원습(崔原濕) :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태복(太僕)시정을 지냈다.

최원길(崔原吉) :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최직림(崔直霖) : ()는 은보(殷輔). 고려조(高麗朝)에 정헌대부(正獻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최진(崔 鎭) : 조선조에 장사랑(將仕郞)으로 고부 훈도를 역임하였다.

최귀령(崔龜靈) : ()는 동림(東林)․돈옹.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호(崔 灝) : 초명(初名)은 호(), ()는 민덕(民德), ()는 서헌(瑞軒).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 판윤(漢城判尹) 겸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에 추증되었다.

최부(崔 溥) :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는 연연(淵淵), ()는 금남(錦南), 진사(進士) ()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2(성종 13) 진사(進士)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저작(著作)․박사(博士)․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수찬(修撰)을 지냈다.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87년 제주 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도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 영파부(浙江省寧波府)에 표류,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귀국했다.

즉시 왕명으로「표해록(漂海錄)」을 저술,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기후․산천(山川)․도로․관부(官府)․풍속․민요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뒤에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 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에 올랐다가 사간(司諫)으로 전임, 1497(연산군3)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朋黨)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 禍)에 참형(斬刑)을 당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 되었다.

최중일(崔中一) : ()는 자충(子忠), ()는 옥강(沃江). 1444(세종26) 진사(進士)가 되고, 1450(세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전적(典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1453(단종 1)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 겸 독서당 응교(讀書堂應敎)․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최용폐(崔龍陛) :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최용승(崔龍陞) :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최용지(崔龍阯) : 고려(高麗) 때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역임하였다.

최봉(崔 鳳) : 조선(朝鮮)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최지철(崔之哲) : 조선(朝鮮)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최성서(崔聖瑞) :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최길(崔 吉) :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홍(崔 泓) : 고려조(高麗朝)에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최원(崔 源) : ()는 복초(復初). 조선 때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최정(崔 凈) : ()는 사윤(士允). 조선(朝鮮)에서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최명소(崔明韶) :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다.

최외(崔 巍) : 조선(朝鮮)에서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최숙륜(崔叔倫) :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최숙정(崔叔精) :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운룡(崔雲龍) : 조선에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최만(崔 滿) : 조선(朝鮮)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윤(崔 潤) : 조선(朝鮮)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지택(崔知澤) :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최학령(崔鶴齡) : ()는 운로(雲老), ()는 율정(栗亭), 능참봉(陵參奉) ()의 아들. 김인후(金麟厚)의 문인. 1543(중종 29) 진사(進士)가 되고, 1539(중종 3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으나 홍패(紅牌) 오자(誤字)가 있어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에 돌아가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교리(校理)에 추증(追贈), 장성(長城)의 모암서원(慕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최한석(崔漢碩) : 조선 때 계공랑(啓功郞)에 올랐다.

최옥(崔 沃) :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최결(崔 潔) : 조선(朝鮮)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최사물(崔四物) :조선 성종(成宗)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최경룡(崔景龍) : 조선(朝鮮)에서 지평(持平)을 지냈다.

최응우(崔應遇) :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다.

최응운(崔應運) :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최효종(崔孝宗) :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다.

최효충(崔孝忠) :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효원(崔孝源) :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최승결(崔承潔) :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평남 현감(平南縣監)을 역임하였다.

최효봉(崔孝奉) : 조선 태종(太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최순(崔 峋) :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최입(崔 岦) :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염존(崔念存) :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최섭(崔 涉) :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최호(崔 灝) : 조선 때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거쳐 전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최수원(崔壽元) : 조선조(朝鮮朝)에서 북평사(北評事)를 역임하였다.

최호중(崔好重) : 조선에서 영장(營將)을 역임하였다.

최호진(崔好鎭) :조선(朝鮮) 때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삭주군 도호부사(朔州郡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호례(崔好禮) : 조선(朝鮮)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최유한(崔有漢) : 조선조(朝鮮朝)에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역임하였다.

최경(崔 涇) : ()는 사정(思靖), ()는 근재(謹齋). 안산(安山) 출신. 세종(世宗) 때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를 거쳐 별제(別提)에 이르렀고, 안 견(安 堅)의 산수화(山水畵)와 함께 인물화(人物畵)를 잘그려서 유명하였다. 1472(성종 3) 소헌왕후(昭憲王后)․세조(世祖)․예종(睿宗)․덕종(德宗)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성종(成宗)이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려 했으나, 언관(言官)의 반대로 취소되고 안구마(眼球馬)를 하사받았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최홍전(崔弘甸) : 1636(인조 14)1702(숙종 28) ()는 수회(壽會).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등에 밝았다.

1679(숙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각 조()의 낭관(郎官)을 지내다가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에 기용되고, 뒤에 음죽 현감(陰竹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전에 취소되었다.

최감회(崔監淮) : 조선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최감한(崔監漢) :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최중신(崔仲信) :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최윤덕(崔潤德) : 조선에서 통천 군수(通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유경(崔有慶) : 조선(朝鮮)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최세해(崔世瀣) :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곤(崔 琨) :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최영회(崔永會) :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최경성(崔景成) : 조선(朝鮮) 중종 때 수찬(修撰)을 지냈다.

최륜(崔王崙) : 조선(朝鮮) 정종 때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최흥일(崔興逸) :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여태(崔汝泰) : 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최해(崔 瀣) : 조선 중종(中宗)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유정(崔有井) : 조선(朝鮮)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최극후(崔克厚) :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최산두(崔山斗) :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최호순(崔虎洵) : 조선(朝鮮) 때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최언웅(崔彦雄) : 조선(朝鮮)에서 중추 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최희수(崔希秀) : 조선(朝鮮) 때 교권(校權)을 지냈다.

최윤화(崔潤華) : ()는 경실(景實), ()는 정재(靜齋). 조선조(朝鮮朝)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최저의(崔低義) : 조선 때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최상태(崔尙泰) :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여복(崔汝服) : 조선조에 지평(持平)을 지냈다.

최만화(崔萬華) : 조선(朝鮮) 때 시정(侍正)을 역임하였다.

최인건(崔仁建) : 조선(朝鮮)에서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냈다.

최두식(崔斗植) : 조선 때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지냈다.

최태제(崔泰齊) : 조선조(朝鮮朝)에 거제 부사(巨濟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성(崔 晟) : 조선(朝鮮)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냈다.

최재철(崔在徹) : 조선조에 경성 도사(京城都事)․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최영회(崔永會) :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최관진(崔官鎭) : 조선(朝鮮)에서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최응원(崔應遠) :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최준익(崔俊益) :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최계방(崔啓昉) : 조선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최승매(崔承玫) :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최명한(崔明漢) :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최제학(崔齊學) : 일제침략(日帝侵略) 때 항거(抗拒)한 의병장 12인 중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