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초계최씨,초계최씨시조,최용궁(崔龍宮)

작성일 : 2017-05-26 11:47 수정일 : 2018-02-05 11:18

초계최씨의 연원

초계최씨는 진주최씨(全州崔氏)의 시조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8세손인 문숙공(文肅公) 최용궁(崔龍宮)을 시조로 하여 전주최씨에서 분파되었다.

초계최씨시조 최용궁은 고려말 충숙왕 7년 경신년(1320)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간 후, 여말(麗末)에 익대보조공신(翼戴保祚功臣)에 책록되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 판사(判事: 1)에 올랐고. 세자태부(世子太傅)를 역임하였으며, 팔계군(八溪君; 八溪는 현재의 경상남도 草溪의 옛이름이다)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로써 후손들이 문숙공의 봉지(封地)인 초계(草溪)를 본관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족보의 편찬이 늦어, 시조로부터 중시조(中始祖) 최한영(崔漢榮)에 이르기까지의 상대(上代) 기록이 실전되어 그 세계(世系)가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초계최씨 창간 신미보(辛未譜: 고종 8. 1871)에서는 시조로부터 중시조 이전까지의 선계(先系)는 세대수(世代數)를 명시하지 않은 채로 휘자(諱字)를 열서(列書)하는 형식을 취하고, 중시조 이하의 손록(孫錄)은 그 아드님인 기묘명현(己卯名賢) 문절공(文節公) 최산두(崔山斗)1로 기세(起世)하여 계대(系代)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후로 중시조 이전의 상계보를 밝히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신묘보(1891) · 신해보 (1911) · 신유보(1921) · 을축보(1925) · 을미보 (1955) · 정사보(1977) · 기사보(1989)를 간행해오면서 꾸준히 계속되어 왔고, 그 때마다 상계보를 수정 내지 보완하여 시조로부터 현대 자손들까지를 일통(一統)하는 보계를 정립(定立)하였으나, 그것이 신뢰할 수 있는 문헌자료에 의한 고증을 갖추지 못한 것이어서 오히려 보계(譜系)의 혼란과 모순을 더욱 심화기키는 결과를 초래 하고 말았다.

이에 초계최씨 대종회에서는 씨족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을 종사의 중요 과제로 설정하고, 1991(초계최씨 700년사)의 편찬에 착수, 현재에 이르기까지 씨족들의 세거지(世居地)를 현장 답사하여 그 생활사를 광범하게 취재하고 각가(各家)에서 소장하고 있는 선조들의 문집과 고문서들을 수집하며, 또 각종 사서(史書) · 방목(榜目)들과 선유(先儒)들이 남긴 문헌들을 섭렵하여 씨족사 편찬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그 결과 현재의 기사보(1989)에 정립된 상계보 가운데 6세 맹하(孟河) · 7세 제남(悌男) · 8세 종복(宗復) · 9세 호원(灝元)은 초계최씨가 아니라는 사실이 문과방목 · 사 마방목 · 조선왕조실록 · 전주최씨 문성공()파 족보 · 전주최씨 사도공()파 족보 등에 의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또 초기 신미보 · 신묘보에 상계(上系) 가운데 등재되어 있다가 신해보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보계에서 제적 되어버린 참판공 계성(稽聖)은 금번 발견된 후손 최우(崔瑀: 1741-1815)의 효행 관련 고문서(이 고문서는 1857년에 작성된 것으로 1871년 간행된 신미보보다 앞선 기록이다)에 시조 용궁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어 이를 다시 상계에 복원해야 할 당위가 생겨 났다.

이 때문에 위 맹하 · 제남 · 종복 · 호원 4대는 초계 최씨가 아니므로 보계에서 삭제하고 새로 확인된 계성 선조를 복원하여 보계를 다시 수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정립된 세계를 도표로써 제시하면 아래 세계도와 같다.

초계최씨는 고려말(1300년경) 시조 문숙공이 탄강하여 문호를 연 이래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각 시대마다 시대의 주역으로서 민족사의 창달에 크게 기여해 온 명문법가(名門法家)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초계최씨는 전남 · 북과 서울, 경남 등지에 8,612가구 37,527명이 분포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최씨 127본 가운데서 아홉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큰 성족(姓族)이다.

한편 초계최씨와 동조(同祖)를 세계로 하여 분파한 성씨로 광양최씨(光陽崔氏)가 있다. 족보에 의하면 광양최씨는 초계최씨 중시조인 한영 공을 시조로 하여 그 6세손인 최검문에서 분파하였는데, 그 세계를 보면 최한영(1)-산두(2)-병길(3)-종원(4)-득린(5)-검문(6)-덕명-(7) "으로 계승되고 있는 바, 6세 검문은 초계최씨 침정공파의 파조인 득린(得燐)공의 6자 중 1자이다.

그러므로 초계최씨와 광양최씨는 한영 공 이하 5세를 동조로 하고 있는 동성동본인 것이다. 광양 최씨가 전남 광양올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은 2세 산두공의 문과방목에 기록된 출신지가 광양으로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지만, 1592년 산두 공의 조카 신()이 지은 공의 (家狀)에는 팔계군 용궁의 후손으로 그 세계가 기록되어 있어 공의 본관이 초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 초계최씨라는 성씨명은 위 (가장)외에도 (순창성황대 신사적기 (淳昌城隍大神事跡記)(1633년 및 1743), 관찬인 여지도서(與地圖書)(1575), 1747년에 작성된 최만재(崔萬載): 1688년생)의 호적을 위시한 수많은 초계최씨의 호적들에 광범하게 나타나 있어, 초계최씨의 연원이 심원(深遠)함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