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전주최씨,전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6 09:34 수정일 : 2018-04-11 20:11

전주최씨의 연원 (null)

최씨의 득성사적(得姓史蹟)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옛 조선(朝鮮)의 유민(流民)들이 토착(土着)한 6촌(村)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설(說)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진한(辰韓)의 6부(部)중의 고허부(高墟部)로 되었다가 신라의 제3대왕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西紀32)에 또 다시 6부의 이름을 개정(改定)하면서 고허부를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성(姓)을 최(崔)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가 3국을 통일한 후에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최씨는 백제(百濟)의 완산(完山)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고려태조(高麗太祖) 23년에 완산을 전주(全州)로 개칭(改稱)한 후에도 승화(承化), 순의군(順義軍), 안남(安南) 등으로 불리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에 완산부(完山府)로 삼았으며, 공민왕 11년에 7세손 최재(崔宰)가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재임(在任) 중에, 홍건적(紅巾賊)의 남침(南侵)을 당하자 이를 잘 방어(防禦)한 공로(功勞)로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승품(陞品)시키고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으로 서훈(敍勳)되었다.

따라서 완산군(完山君)의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완산(完山)으로 삼아 오다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완산부(完山府)를 전주(全州)로 개정(改定)함에 따라 그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조선조 말엽에〈완산최씨세보(完山崔氏世譜)〉를 편수(編修)하면서 표제(表題)를〈전주최씨세보(全州崔氏世譜)〉로 개정한 이래 관향(貫鄕)이 전주최씨(全州崔氏)가 되었다. (null)

역대 인물 - 전주최씨조상인물

신라시대(新羅時代)인물(人物)

소벌도리(蘇伐都利) B.C 32년 사로(斯盧;서라벌) 6촌 가운데의 돌산고허촌(突山高虛村:사량부)의 촌장(村長).

고려시대(高麗時代)인물(人物)

최순작(崔純爵) 검교(檢校) 신호위(神號衛) 상장군(上將軍)

최숭(崔崇) 좌우위(左右衛) 중랑장(中郞將)

최남부(崔南敷) 통의대부(通議大夫) 좌우위(左右衛) 대장군(大將軍) 지공부사(知工部事)

최전(崔佺) 좌우위(左右衛) 보승낭장(保勝郎將)

최정신(崔正臣) 초명(初名)은 유(裕). 좌우위(左 右衛) 중랑장(中郞將)

최득평(崔得枰) 1256(고종 43)-1331(전 충혜 2) 초명은 계보(季寶). 정헌대부(正憲大夫) 선부전서(選部典書)상호군(上護軍).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등 3왕을 섬기고 치사(致仕). 충숙왕(忠肅王) 원년(1314)에 민부의랑(民部議郞) 때 전민계정사(田民計定使)의 사정판관(司正判官)으로 발탁, 토지를 재고 부세(賦稅)를 제정하였는데 도내(道內)의 제찰사(提察使) 및 수령으로서 죄가 있는 자를 처벌.

최재(崔宰) 1303(충렬 29)-1378(우왕 4) 자는 재지(宰之). 영록대부(榮祿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대광(大匡) 완산군(完山君),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충숙왕(忠肅王) 17년(1330)에 문과급제. 공민왕(恭愍王) 10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여 홍건적(紅巾賊)의 내침을 방어.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훈봉(勳封). 공민왕13년(1364)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監察大夫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고 23년(1374)에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를 제수(除授)하였으나 사양하고 청주로 귀향.

최사미(崔思美) 우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재(宰)의 장남.

최덕성(崔德成) ?-1404 문과급제. 공민왕 5년(1356)에 안동부 판관. 우왕 4년(1378)에 중정대부(中正大夫)삼사좌윤(三司左尹). 재(宰)의 2남.

조선시대(朝鮮時代)인물(人物)

최유경(崔有慶) 1343(후충혜 4)-1413(태종 1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시호는 평도(平度). 재(宰)의 3자. 공민왕 때 사헌장령(司憲掌令), 우왕 때 전법총랑(典法摠郞),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요동정벌 때 전운사(轉運使)겸 찰방, 최영(崔瑩)이 물러난 뒤 밀직부사(密直副使), 창왕 원년(1389)에 전라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부임 완산부의 성지읍성(城池邑城)을 창축(創築)하여 왜적 방어. 이태조(李太祖)의 역성혁명(易姓革命) 후 개국원종공신에 책록, 태조 3년(1394)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 한양 도성영축도감(都城營築都監) 성문제조(城門提調)로 남대문 축조, 태조 6년(1397)에 경기·충청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중추원사(中樞院事), 개성유후(開城留後)겸 경기우도 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都觀察黜陟使), 정종 때 판한성(判漢城), 태종이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승진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를 세워 표창하다.

최사위(崔士威) 1362(공민왕 11)-? 유경(有慶)의 장남. 고려 공양왕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조선 태종 때 상호군, 조사의(趙思義)의 난(亂) 평정에 출전. 풍해도 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를 역임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提)로 부임, 하절사(賀節使)로 북경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을 하례. 한성판윤(漢城判尹).

최사의(崔士儀) 1381(우왕 7)-1453(단종 1) 유경(有慶)의 2남. 조선 태조 때 형조의랑(刑曹議郞), 세종 때 충좌사상호군(忠佐司上護軍), 공조참의(工曹參議),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경기감사(京畿監司)에 부임. 북경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오고,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 인순부윤(仁順府尹), 예조참판(禮曺參判), 한성부윤(漢城府尹),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부임하여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을 제수.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인수부윤(仁壽府尹)에 부임하여 진하사(進賀使)로 북경에 다녀오고, 돈녕부사(敦寧府事),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치사(致仕).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호는 양도공(良度公)이다.

최사규(崔士規) 1382(우왕 8)-1413(태종 13) 유경(有慶)의 3남. 도감판관(都監判官), 도관좌랑(都官佐郞), 영평현령(永平縣令)을 역임하고 태종 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에 승진, 부친의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중에 졸(卒)하다.

최사강(崔士康) 1385(우왕 11)-1443(세종 25) 자는 안국(安國). 유경(有慶)의 4남. 음보(蔭補)로 출사. 1416(태종 16)에 중군경력(中軍經歷)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1418(태종 18)에는 우부대언(右副代言)을 하고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예조참의(禮曺參議)·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병조참판(兵曹參判)·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提)·충청도 감사(監司)·호조참판에 이어 1426(세종 8)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32(세종 14)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승진하여 동북방면 6진 개척과 압록강변 야인(野人) 토벌에 기여하고. 1436(세종 18)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이어 1441(세종 23)에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고 판이조사(兼判吏曹事)를 겸하였다. 1442(세종 24)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다녀와서 1443(세종 25)에 4월에 졸하였다. 시호는 경절공(敬節公)이다.

최사용(崔士庸) 1392(태조 1)-1453(단종 1) 유경(有慶)의 5남. 1421(세종 3)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1425(세종 7)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1451(문종 1)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부임 2년 후에 졸하다.

최사흥(崔士興) 1413(태종 13)-? 유경(有慶)의 6남.대흥현(大興縣)의 감무(監務)를 지냈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내렸다.(동국여지승람 진천현(鎭川縣)인물 및 삼강록(三綱錄) 참고).

최옥순(崔玉筍) 사위(士威)의 증손. 음보(蔭補)로 출사(出仕). 세조 원년(1455) 12월에 원종공신 3등에 책록, 성종 때 충청도 도사(都事)·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문폐경차관(問弊敬差官)으로 활약하면서 수령(守令)들의 부정과 비리를 적발. 성종 25년(1494)에 청주 목사(牧使).

최숙문(崔淑文) 1435(세종 17)-1506(중종1) 자는 주경(周卿), 호는 독수당(獨秀堂), 사용(士庸)의 손자. 갑자사화 때 전주 동호재(東湖栽)로 은거, 저서로는 심경석의(心經釋疑) 예서고해(禮書考解) 주역추연(周易推衍) 등이 있다. 전주 예산서원(禮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최세현(崔世賢) 사강(士康)의 증손. 음보(蔭補)로출사(出仕). 예종 때 형조좌랑. 성종 13년(1482)에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에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부임하여 임금의 인사정책의 부조리(不條理)를 누차 논박. 강서현령(江西縣令),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역임하였다.

최해(崔瀣) 1464(세조 10)-1510(중종 5) 1494(성종 25) 별시 문과급제. 사의(士儀)의 4대손. 연산군(燕山君) 때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면서 임금의 음행과 폭정을 극간(極諫)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한어(漢語)와 이문(吏文)에 능통하였으므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불가피 복직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중종반정을 겪고 중종조에서도 중국사신을 접대하는데 공을 세웠다.

최사립(崔斯立) 자는 입지(立之), 1531(중종 26)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급제, 결(決)의 아들. 사위(士威)의 5대손. 가낭청(假郎聽) 등을 역임하고 1535(중종 30)에 효자정문(孝子旌門)에 정표(旌表). 1551(명종 6)에 배천(白川) 군수역임,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

최권(崔巏) 자는 경앙(景仰), 1539(중종 34) 별시 문과급제. 사강(士康)의 5대손, 방귀(邦貴)의 5남. 종성부사(鐘城府使)를 역임하고 1547(명종 2)에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예원 판결사(判決事)에 재임중 졸함.

최희(崔禧) 1535(중종 30)-1601(선조 34) 자는 중응(仲膺), 호는 남파(南坡), 1555(명종 10) 사마시(司馬試) 진사급제, 1565(명종 20) 알성문과(謁聖文科) 장원급제. 사규(士規)의 5대손. 명필(命弼)의 아들. 1593(선조 26)에 수산도정(守山都正), 1599(선조 32)에 형조참의, 판결사,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역임. 증이조판서.

최철견(崔鐵堅) 1548(명종 3)-1618(광해군 10)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 해(瀣)의 증손. 1576(선조 9) 사마시 진사급제, 1585(선조 18) 별시문과 장원급제, 전적(典籍)·감찰·형조좌랑·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590년(선조 23)에 병조좌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찰사 이광(李洸)이 패주하자 전주 사민(士民)에 포고하고 전주를 사수하였다. 수원부사·내사시정·황해도관찰사·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604년(선조 37)에 춘천부사에 부임하여 1년여 후 병으로 사임하였다.

최기남(崔起南) 1559(명종 14)-1619(관해군 11) 자는 여숙(與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사강(士康)의 5대손.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1602년(선조 35)에 알성(謁聖)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지제교(知製敎)·시강원사서를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에 함경북도 평사로 나갔다. 이듬해 예조,병조의 정랑과 세자시강원 시강을 역임, 1612년(광해군 4)에 통정대부로 승품되어 영흥부사로 나갔다.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삭직당하고 가평에서 은거하였다. 후에 영의정 완흥부원군(完興府院君)에 추증.

최천건(崔天健) 1568(선조 1)-1617(광해군 9) 자는 여이(汝以), 호는 분음(汾陰). 사규(士規)의 7대손. 1588년(선조 21)에 알성 문과급제. 병조좌랑에 이르러 임진왜란이 일자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본국의 위박한 상황을 예·병 양부에 보고하고 귀국, 다시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경리 양호(楊鎬)의 전임을 진주하였다. 이조판서에 이르러 폐모론(廢母論)에 관련되어 온양온천으로 자원안치(自願安置), 그 곳에서 졸하였다.

최내길(崔來吉) 1583(선조 16)-1649(인조 27) 자는 자대(子大), 호는 이재(頤齋). 1611년(광해군 3)에 문과급제. 기남(起南)의 장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예조참의가 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송하여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최명길(崔鳴吉) 1586(선조 19)-1647(인조 25)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의 문인. 1605년(선조 38) 문과급제, 기남(起南)의 2자.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전적(典籍)이 되고, 광해군의 폐모론(廢母論)에 관련되어 파면, 김유(金瑬)·이귀(李貴) 등과 대계를 세워 1623년 인조를 영립, 이조참의로 1등공신이 되고 왕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이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 호패청당상(號牌廳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지탄을 받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에 청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정은 주전론(主戰論) 일색이었으나 명길 혼자만은 주화론으로 일관하여 화의를 성립시키고, 우의정이 되었다. 청도(淸都) 심양에 들어가서 4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귀국하여 영의정에 이르러서 졸하였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최혜길(崔惠吉) 1591(선조 24)-1662(현종 3) 자는 자저(子迪), 호는 유하(柳下). 인조 초에 공조좌랑·익찬을 지내고 1625년(인조 3)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사서·정언을 역임하고 이조좌랑이 되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44년 다시 동지사 겸 세폐사(歲幣使)로 북경에 다녀와 참판에 일으렀다가 인조반정 후 벼슬에 참여하여 30년 동안 아경참판(亞卿參判)에만 머물렀다. 기남(起南)의 3자.

최관(崔寬) 1613(광해 5)-1695(숙종 21) 자는 이율(而栗) 호는 만희당(晩喜堂). 철견(鐵堅)의 증손. 1651년(효종 2) 알성문과에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집의(執義)·사간(司諫)을 역임, 1669년(현종 9)에 온성부사(穩城府使), 동부승지(同副承旨),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1672년(현종 13)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승지(承旨), 숙종조(肅宗朝)에 충청도 순무사(巡撫使), 제주 목사(牧使), 형조참의, 대사간(大司諫), 개성유수,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94년(숙종 20)에 좌참찬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졸하다. 청백리에 피선.

최석정(崔錫鼎) 1646(인조 24)-1715(숙종 41) 호는 명곡(明谷). 1671년(현종 12)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봉교(奉敎) 등을 역임, 1685년(숙종 11) 부제학으로 등용되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선기옥형(璇璣玉衡;渾天儀)을 수리하는 데 참여한 후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697년(숙종 23) 우의정으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좌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하여 <국조보감>의 편찬과 <여지승람>의 증보를 주청, 실현케 했다. 1701년 영의정이 되어 희빈(禧嬪) 장씨의 처형을 반대하여 진천에 부처(付處)됨. 1702년 풀려나와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고, 노론(老論)·소론(小論)의 영수(領袖)로 많은 파란을 겪으며 도합 여덟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으며,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저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 명길(鳴吉)의 손자.

최석항(崔錫恒) 1654(효종 5)-1724(경종 4)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 혜길(惠吉)의 손자. 1680년(숙종 6)에 문과급제, 경종 때 이조판서·좌의정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10월 왕세제 대리청정의 교지(敎旨)가 내리자 좌참찬으로서 이를 듣고 한 밤중에 왕을 맞나 그 부당성을 논리 정연하게 지적하여 번의케 했다. 당시 소론(小論)의 4대신 중 1인이다. 1723년(경종 3)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하고, 1724년 좌의정에 올라 재직 중에 졸하였다.

최창대(崔昌大) 1669(현종 10)-1720(숙종 46)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 1694년(숙종 20)에 문과급제. 석정(錫鼎)의 아들. 부수찬·이조좌랑·응교·이조정랑·사간·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부제학·이조참의에 이르렀다. 문필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공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임진왜란에 큰공을 세운 함길도 의병들의 전공을 발굴하여 소상하게 기록한 전승비(戰勝碑)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일본 동경 야스꾸니 신사 한편에 보존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 비는 원래 함경북도 임영면 명천리에 세운 것을 일본군이 약탈해 간 소중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