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우봉최씨시조(牛峰崔氏),최원호(崔元浩),우봉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5 14:31 수정일 : 2019-02-13 14: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봉최씨(牛峰崔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였으나 그 상계(上系)는 알 수 없고,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전하는 최원호(崔元浩)가 고려 명종(明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우성공신(佑聖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그 후 그의 아들 충헌(忠獻)이 고려 중종(中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해졌으며, 충헌의 아들 우(瑀)가 고려 고종(高宗) 때 강화천도(江華遷都)의 공으로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우봉(牛峰)에 세거(世居) 하면서 최원호(崔元浩)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우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우봉(牛峰)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잠군(牛岑郡)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우봉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때 평주(平州)에,문종(文宗) 때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太祖) 때 현(縣)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황해도(黃海道)에 편입시켰다. 1652년(효종 3) 우봉현(牛峰縣)은 금천군(金川郡)에 병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는 충헌(忠獻)이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어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여 별초도령(別抄都令)에 올랐으며, 1196년(명종 26)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당시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측근자를 모두 추방하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1197년(명종 27) 9월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의 낭비만을 자행하자 왕을 유폐한 뒤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후 동생 충수(忠粹)가 자기의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견 충돌이 일어나 군사력으로 대결하여 동생을 죽게 하였다.

1198년(신종 1) 사노(私奴) 만적(滿積)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듬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병부 상서(兵部尙書)․지이부사(知吏府事)가 되어 군사권과 문무관(文武官)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1209년(희종 5)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하였고, 장기간 계속된 민란(民亂)을 진압하여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했다.

그의 동생 충수(忠粹)는 1196년(명종 26) 동부녹사(東部錄事)로서 형 충헌을 설득하여 함께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벼슬에 올라 1222년(고종 9)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등을 역임했다.

1243년(고종 30)에 국자감(國子監)을 수축(修築)하고 장학(獎學)에 힘쓰는 한편 대장경판(大藏經板) 보수에 사재를 희사하여 완성케 했다.

우의 동생 향(珦)은 왕족(王族)의 딸과 결혼하여 보성백(輔成伯)에 봉해졌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충헌의 손자 항(沆)은 처음에 송광사(松廣寺)의 중이 되었으나 1248년(고종 35) 아버지의 명으로 환속(還俗)하여 당시의 명신 임익(任翊)에게 글을 배웠고, 상호군(上護軍)․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거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올랐다. 뒤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으며 진평공(晋平公)에 추증되었다.

항의 아들 의(竩)는 경림사(景林師) 예기(芮起)에게 시필(試筆)을 배웠고, 권위(權威)․임익(任翊)에게 정치를, 정세신(鄭世臣)에게 예(禮)를 배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봉최씨(牛峰崔氏)는 전국에 1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우봉최씨조상인물 

최충헌(崔忠獻) 1149(의종 3)~1219(고종 6) 초명은 난(鸞), 시호(諡號)는 경성(景成), 상장군(上將軍) 원호(元 浩)의 아들.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고,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여 별초 도령(別抄都令)에 올랐다. 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승진하고, 1196년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당시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어 왕의 측근자를 모두 추방하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고 이듬해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의 호를받았다. 한편 왕이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의 낭비만을 자행하자 이해 9월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평량공(平凉公) 민(旼:신종)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삼한대광 대중대부(三韓大匡大中大夫)․상장군(上將軍)․주국(主國)이 되어 최씨무단정권(崔氏武斷政權)을 수립했다.

이해 동생 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太子:희종)의 비(妃)로 삼으려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견 충돌이 일어나 군사력으로 대결하여 박진재(朴晋材) 등의 도움으로 충수의 군사를 격파하고 추격병을 보내 파주(坡州)에서 충수를 죽이게 함으로써 그의 독재정권을 강화했다.

1198년(신종 1) 사노(私奴) 만적(滿積)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듬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병부 상서(兵部尙書)․지이부사(知吏府使)가 되어 군사권과 문무관(文武官)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해 김준거(金俊琚)의 반란을 토벌했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을 거쳐 1202년 삼중대광(三重大匡)․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되고,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문무관 중에서 강용(强勇)한 자를 선발하여 6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신변을 보호케 하고출입할 때는 6번을 합해 호위케했다. 이어 추밀원사․이부 병부 상서․어사대부가 된 후 10월 경주 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3년 모반(謀叛)한 부석사(浮石寺)․부인사(符仁寺)의 중들을 잡아 유배 보낸 후 이어 수태부․참지정사(參知政事)․병부 상서․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고 이듬해 신종(神宗)을 폐하고 태자(太子: 희종)을 옹립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개부의동삼사 ․수태사․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상장군 상주국․판병부 어사대사․태자 태사에 올랐다.

1205년(희종 1)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문하시중․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해지고, 1209년 학사 이규보(李奎報)를 발탁함으로써 무신 정권으로 퇴폐했던 문운(文運)의 재흥을 꾀했다. 1209년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하게 함으로써 이후 무인정권의 실질적인 중앙기관이 되었고 1211년 왕준명(王濬明) 등의 음모로 궁궐에서 죽을 뻔했으나 부하들의 구출을 살아난 뒤 왕을 폐위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 : 강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문경무위향리차안공신(文經武緯響理借安功臣)에 봉해졌고, 1213년 강종이 죽자 고종을 즉위시킨 뒤 1217년(고종 4) 그의 암살을 꾀하던 흥왕사(興王寺)의 중들을 잡아 죽였다. 이후 점차 횡포가 심해졌으나 장기간 계속된 민란(民亂)의 진압,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했다.

최충수(崔忠粹) ?~1197(명종 27) 상장군(上將軍) 원호(元浩)의 아들. 진강후(晋康侯) 충헌(忠獻)의 아우. 1196년(명종 26) 동부 녹사(東部錄事)로서 형 충헌을 설복하여 함께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이듬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으며, 형 풍헌과 함께 명종(明宗)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幽閉)하는 한편 태자 도(濤)를 강화(江華)에 내쫓고, 명종의 모제(母弟)인 평량공(平凉公) 민(旼 : 신종)을 맞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어 수성제란공 신(輸誠濟亂功臣)․삼한정광중 대부(三韓正匡中大夫)․응양군 상장군(鷹揚軍上將軍)․위위경(衛尉卿)․지도성사(知都省事)․주국(柱國)에 올랐으며, 태자비(太子妃)를 내쫓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 하다가 형 충헌과 총돌이 생겨 각각 군사를 이끌고 사웠으나 흥국사(興國寺)에서 형의 군사에게 패했다. 이에 임진강(臨津江) 남쪽에서 다시 거사하려고 강을 건너 도망했으나 파평현(坡平縣 : 파주) 금강사(金剛寺)에서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최우(崔 瑀) ?~1249(고종 39) 뒤에 이(怡)로 개명, 시호(諡號)는 광렬(匡烈), 충헌(忠獻)의 아들. 1219년(고종 6) 충헌이 죽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뒤를 이어 집권한 후,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가 저축한 금은 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주인에게 돌려주고 한사(寒士)를 등용했으며, 1222년(고종 9)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 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무렵 몽고의 사신이 자주 와서 많은 금품을 요구하자 이를 냉정히 대접하고는 복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여 몽고의 침입에 대비했다.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자택에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書房)을 두어 문객(門客) 중의 명유(名儒)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했으며, 1228년 오대진국공신(鰲戴鎭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북변에 침범하던 몽고병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여 천도를 단행케 했으며, 이듬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일으키자 가병(家兵)으로 이를 토벌하고, 1234년(고종 21)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1243년(고종 30)에 국자감(國子監)을 수축(修築)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백 곡(穀)을 시납(施納)하는 등으로 장학(獎學)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大藏經板) 재조(再雕)에 사재를 희사하여뒤에 완성케 했다. 이로부터 차츰 전횡(專橫)이 심해져 백성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서 1262년 공신당(功臣當)의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

최향(崔 珦) ?~1230(고종 17) 시호(諡號)는 대장(戴莊), 권신 충헌(忠獻)의 아들. 우(瑀)의 동생. 왕족 수춘후(壽春侯) 항(沆)의 딸과 결혼, 보성백(賓城伯)에 봉해지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219년(고종 6) 아버지가 죽자 상장군 최준문(崔俊文) 등이 충헌의 맏아들 우를 물리치고 그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으나 모의가 누설되어 이듬해 형에 의해 장인 항(沆)등과 함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옥사했다.

최항(崔 沆) ?~1257(고종 44) 초명은 만전(萬全), 진양공(晋陽公) 우(瑀)의 아들. 송광사(松廣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1248년(고종 35) 아버지의 명으로 환손(還俗)하여 항(沆)으로 개명하고 임 익(任 翊)에게서 글을, 권 위(權 韙)에게서 예를 배우고,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거쳐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어 아버지에게 가병(家兵)5백 명을 분여받았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병부 상서(吏兵部尙書)․어사 대부(御史大夫)․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어 동북면․서북면의 병마사를 겸하는 한편 교정 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시기심이 많아 이듬해 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주숙(周肅), 형부 상서(刑部尙書) 박 훤(朴 暄) 등을 죽이고, 중성(中城)을 축성한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진양후(晋陽侯)에 올랐으나 사양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 : 선박세)을 면제하고 또 각 지방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수획원(收獲員)을 소환, 그 임무를 안찰사(按察使)에게 맡기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차츰 호사와 향락(享樂)을일삼기 시작했다.

몽고에 대한 정책에는 아버지 우(瑀)의 강경 정책을 계승하여 몽장(夢將) 야굴(也窟)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뒤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진평공(晋平公)에 추증되었다.

최의(崔 竩) ?~1258(고종 45) 중서령(中書令) 항(沆)의 아들. 경림사(景林師) 예 기(芮 起)에게 시필(詩筆)을, 권 위(權 韙)․임 익(任 翊)에게 정치를, 정세신(鄭世 臣)에게 예(禮)를 배웠다. 1255년(고종 42)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고, 1257년 아버지가 죽자 차장군(借將軍)․교정별감(敎定別監)이되어 대대로 이어온 정방(政房)을 인수하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판이병부어사대사(判吏兵部御史臺事)가 되었으나 사양했다.

집정하자 인심을 수습하려고 연안(延安)의 주택과 정평궁(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바쳤으며, 가미(家米) 2,5 70여 섬을 내장택(內莊宅)에, 포․백․유․밀(布帛油蜜)을 대부시(大府寺)에 바치고, 또 흉년에자기 창고의 곡식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초기에는 선정(善 政)을 했으나 차츰 횡포하기 시작하여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자 장군 변식(邊軾) 등으로 강화 수획사(江華收獲使)를 삼아 약탈을 자행케 했고, 노비(奴婢)에게 벼슬을 주는 특례를 만든 아버지 항의 예에따라 노비에게 낭장(郎將)의 벼슬까지 주었다.

우매하여 현사(賢士)를 우대하지 않고 경박한 무리인 류 능(柳 能)․최양백(崔良伯) 등과 사귀고, 그들의 무고에 따라 살육을 함부로 하여 인심을 잃고 비난이 높던중 1258년(고종 45) 마침내 대사성(大司成) 류 경(柳 璥),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 낭장(都領郎將) 임 연(林 衍)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4대 60여년에 걸친 최씨(崔氏)의 무인정권(武人政權)은 끝을 맺 고, 형식적 이나마 왕정(王政)의 복고(復古)를 보게 되었다.

최전(崔 瑼) 고려(高麗) 때 영가후(永嘉侯)에 봉해졌다.

최부(崔 瑼) 고려에서 사공(司空)을 역임하였다.

최해(崔 該) 고려조(高麗朝)의 의춘후(宜春侯)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