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용궁최씨시조(龍宮崔氏),최현(崔玄),용궁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5 14:28 수정일 : 2019-02-13 13:51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용궁최씨(龍宮崔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때 평리부 밀직사사(評理府密直司使)를 지낸 최현(崔玄)이다.

그의 아들 안도(安道)는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손자 유(濡)는 군부판서(軍簿判書)로 139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曹頔)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성근익대 협찬보정 일등공신(誠勤翊戴協贊保定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취성군(驟城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 때는 삼사사(三司使)로 용성(龍城:용궁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해주 최씨(海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용궁(龍宮)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용궁(龍宮)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시대에 축산현(竺山縣)․원산현(園山縣)이라 하였는데 고려 성종(成宗) 때 용주(龍州)로 승격시키고, 목종(穆宗) 때 군(郡)으로 강등시켰으며 현종(顯宗) 때 용궁(龍宮)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에 편입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다시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으로 고치고 1895년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에 군(郡)을 폐하고 신하면(臣下面)은 의성군(義城郡)에, 나머지는 예천군에 편입되었고 그 일부지역은 용궁면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인물

자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朝鮮) 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한 성우(成雨)는 현(玄)의 증손이며 유(濡)의 아들이다.

성우의 후손에서는 차남 민수(敏秀)의 증손 세담(世潭)이 훈도(訓導)를 역임하여 첨정(僉正)을 지낸 알(嶭)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궁최씨(龍宮崔氏)는 전국에 1,0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용궁최씨조상인물 

최안도(崔安道) 1294(충렬왕 20)~1340(충혜왕 복위 1) 자(字)는 나해(那海). 1327년(충숙왕 14) 응양 상호군(鷹揚上護軍)으로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31년(충혜왕 1) 감찰대부(監察大夫)․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내고, 협모동덕공신(協謀同德功臣)의 호를 받았다.

최유(崔 濡) 고려조(高麗朝)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다.

최원(崔 源) ?~1354(공민왕 3) 일명 경(璟). 무신(武臣) 안도(安道)의 아들. 1349년(충정왕 1) 좌대언(左代言)․개성윤(開城尹)에 이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1352년(공민왕 1) 왜구(倭寇)를 격파하여 진력협모공신(陳力協謀功臣)이되고 밀직부사( 密直副使)가 되었다. 이해 안우(安 祐)․ 최영(崔 瑩)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시기하던 재상 김보(金 普)의 무고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1354년 원나라가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진 후 출정, 원나라 고우성(高郵城)․팔리장(八理莊)․사주(四州)․화주(和州) 등지에서 수십회에 걸쳐 사우다가 회안로(淮安路)에서 전사했다.

최성우(崔成雨) 조선(朝鮮) 때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하였다.

최근수(崔勤秀) 조선(朝鮮) 때 사용(司勇)을 지냈다.

최세담(崔世潭) 조선조(朝鮮朝)에 훈도(訓導)를 지냈다.

최경윤(崔慶胤) 조선(朝鮮) 때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최알(崔 嶭)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