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영천최씨(永川崔氏),영천최씨시조,최한,영천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5 13:29 수정일 : 2018-02-16 16:34

영천최씨 연원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신라때 처음 6부촌장(六部村長) 사량부대인(沙梁部 大人) 최균일(崔畇一)을 원조(遠祖)로 하는 휘 한(漢)은 고려 의종(毅宗), 명종조(明宗朝)에 벼슬하여 삼중대광신호위상군(三重大匡神護衛上將軍)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봉해져 영천최씨시조(始祖)가 되었다.

고려 중엽 소감(少監) 식(寔)의 아들 넷이 있어 모두 봉군되었는데 한(漢)은 둘째아들이다. 맏이는 연(衍)으로 월성군(月城君: 지금 慶州), 둘째는 한(漢)으로 연산군(燃山君; 지금 永川), 셋째는 호(湖)로 곡강군(曲江君: 지금 興海), 넷째는 익(瀷)으로 호산군(好山君: 지금 順天)으로 분적시조(分籍始祖)가 되었다. 연산(燃山)은 영천(永川)의 별호로서 본관(本貫)을 영천으로 하고 이로부터 식읍(食邑)으로 받은 영천 삼산(三山)․대전(大田)마을 지역에서 정착 세거하다가 세대가 내려오면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충청, 전라, 평북 일부지역에 분포해 살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천최씨는 남한에 5,886가구 21,43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영천최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최완(崔 玩) 문과 장원(文科壯元). 상찰사(上察使). 증 봉익대부판도판서(贈奉翊大夫版圖判書).

최집(崔 집) 좌정승(左政丞)

최상례(崔尙禮)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최승주(崔承澍) 전호위 상호군(典護衛上護軍)

최윤기(崔允琦) 판도판서(版圖判書)

최극평(崔克平) 종부시판사(宗簿司判事)

최윤(崔 倫) 사온령 동정(司醞令同正),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최안인(崔安仁)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최안제(崔安悌) 흥해군수(興海郡守)

최유진(崔有珍) 정헌대부 판전의시사(正憲大夫 判典醫寺事)

최유중(崔有重) 나주목사(羅州牧使)

최영(崔 英)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용화(崔龍和) 도총부도총관 겸 경기좌우도 수군도절제사(都摠府都摠管 兼 京畿左右道 水軍都節制使)

최원도(崔元道)문하성간의대부(門下省諫議大夫)로 있다가 신돈(辛旽)의 비정(秕政)을 시정토록 누차 간(諫)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혀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신돈의 화를 피해 고향에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太祖)가 대사간으로 세 번의 예빙(禮聘)이 있었으나 유신(遺臣)의 절개를 지켜 삼피불취(三辟不就)하였다.

최동순(崔東洵) 광흥창사(廣興倉使)

최광준(崔光俊) 병조참판(兵曹參判), 증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 左贊成)

최무선(崔茂宣) 왜구(倭寇)를 무찌르는데는 화양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한 최무선은 우왕2년(1376년) 원(元)나라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을 만나 자기집에 머무르게 하고 화약 제조법을 배웠다. 이원이 떠나고 난 뒤 화약실험을 실시하여 몇번 실패하다가 끝내 성공하고 뒤에 조정에 건의하여 우왕3년(1377년)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케 하고 그 제조(提調)가 되어 화약을 만드는 동시에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포(六花砲), 석포(石砲), 신포(信砲), 화통(火㷁),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등 각정 대포 화기를 제조했고, 또한 이란 화기를 실을 수 있는 전함(戰艦)을 대량 건조했다. 우왕 6년(1380년) 진포(鎭浦: 지금의 群山)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고려 수군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돌진하여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스장시켜 버렸다. 이 공으로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과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지고 광정대부검교문하부사 삼중대광(匡靖大夫檢校門下府事三重大匡)이 되었다. 그 후에도 누차 왜구의 격파에 공을 세우고 조선 개국후 이성계(李成桂: 太祖)가 정헌대부검교참찬문합주사겸 판군기시사(正憲大夫檢校參贊門下府事兼 判軍器寺事)를 제수하고 태종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을 추증하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했다.

최흡(崔 洽) 삼사좌윤(三司左尹)

조선시대 인물

최중연(崔仲淵) 예조판서(禮曹判書)

최 일(崔 壹)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최하영(崔河泳) 예조판서(禮曹判書)

최긍(崔 兢) 경상감사(慶尙監司)

최해산(崔海山) 화약발명가 무선(茂宣)의 아들. 선친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화약수련법과 화포 제조법의 비법을 전수받아 병기를 발전시켰으며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등용되어 화차(火車), 완구포(碗口砲), 신포(信砲) 등의 신무기를 창제하였고, 파저강(婆猪江) 야인정벌에 공이 있었으며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최흥효(崔興孝)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는 월곡(月谷). 태종 11년(14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承文院 校理)를 거쳐 1420년 인녕부판관(仁寧府 判官)을 지내고,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이 되었다. 예서(隸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의 명으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였으며, 중요한 국사로 인한 중국대신 또는 사신들의 예물로 사후(死後)에도 몇번 그가 쓴 초서병풍을 조정에서 구해 보냈다. 조선초기 명필로 「해동명필록(海東名筆錄)」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최계성(崔繼性) 부사(府使)

최자섭(崔自涉) 정선현감(旌善縣監)으로 있으면서 외구인 순흥부사와 뜻을 같이 하여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도와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옹서(翁婿)와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최자허(崔自許) 동관진병마절제사(潼關鎭兵馬節制使)

최계손(崔繼孫) 사정(司正)

최자(崔滋) 벽동부사(碧童府使)

최희호(崔希浩) 고령현감(高靈縣監)

최상(崔祥) 현량과 장원 이조참의 조정암 사화(趙正庵 士禍)에 연루,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최언광(崔彦光) 용궁현감(龍宮縣監)

최사철(崔師哲)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최항경(崔恒慶)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조선 유학의 거봉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고제(高弟)로 학문과 덕행이 높아 강문향오현(岡門鄕五賢)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며, 수종4년(16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추증되고 영조 11년(1735년) 사림에서 죽헌삼부자(竹軒三父子: 竹軒, 장자 은, 차자 轔)가 다 한강의 제자로 학문과 덕행이 높아 오암서원(鰲巖書院)에 향사되었다.

최기남(崔起南) 임진란에 유공. 이조참판(吏曹參判)

최벽남(崔擘南) 임진란에 유공. 병조참판(兵曹參判)

최언(崔 諺) 옥구 현감(沃溝縣監)

최산룡(崔山龍)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최모(崔 慕) 고부군수(古阜郡守)

최사해(崔四海) 내금위장(內禁衛將)

최문병(崔文炳)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에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 그 대장이 되어 적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다시 두곡(杜谷), 선암(仙巖), 가지현(佳旨峴)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영천에서는 적을 화공(火攻)으로 섬멸하고 절도사 박진(朴晋)의 상주(上奏)로 감독관(監督官)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향사(享祀)되었다.

최복(崔 복) 무산부사(茂山府使)

최윤문(崔胤門)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

최주문(崔柱門)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

최준(崔 濬) 현릉참봉(獻陵 參奉)

최동망(崔東望) 자여도 찰방(自如道 察訪)

최응신(崔應信) 좌승지(左承旨)

최태정(崔泰정) 경상도사(慶尙都事)

최계남(崔繼南)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

최급(崔 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태형(崔泰亨)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최결(崔 潔) 충무위 부사과(忠武衛 副司果)

최상흥(崔尙興)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최정도(崔貞道) 형조 참의(刑曹 參議)

최우림(崔雨霖) 병절교위(秉節校尉)

최장(崔 漳) 만호(萬戶)

최준립(崔竣立) 포도대장(捕盜大將),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최신수(崔信壽) 군자감정(軍資監正)

최영립(崔嶸立) 무과(武科). 부사(府使)

최석강(崔碩崗) 부호군(副護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두성(崔斗星) 천문학(天文學) 습독(習讀).

최동립(崔東立) 병조좌랑(兵曹佐郞)

최계종(崔繼宗) 장련현감(長連縣監)

최문두(崔文斗)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

최시제(崔時濟) 공조참의(工曹參議)

최길운(崔吉雲) 군자감정(軍資監正)

최여장(崔洳章) 찰방(察訪)

최위(崔 瑋) 춘천도호부사겸 강원도병마방어사(春川都護府使兼 江原道兵馬防禦使)

최호(崔 琥) 여산도호부사(勵山都護府使)

최후태(崔後泰) 하동도호부사겸 진주진병마절제사(河東都護府使兼 晋州鎭兵馬節制使)

최암(崔 嵒) 여산도호부사(勵山都護府使)

최범성(崔範星) 삼수도호부사(三水都護府使)

최주덕(崔柱悳) 곽산군수(郭山郡守). 최호 이하 고손자까지 한 집안 5대 부사 출현.

최우직(崔友稷) 자인현감(慈仁縣監)

최원우(崔元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최업(崔 업) 거제도호부사(巨濟都護府使)

최범중(崔範重) 경주영장(慶州營將)

최운한(崔雲翰) 연일현감(延日縣監)

최규한(崔奎翰) 용양위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승한(崔昇翰) 용양위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강숙(崔强淑) 경상도사(慶尙都事)

최철견(崔鐵堅)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최계순(崔啓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국빈(崔國彬)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영두(崔永斗)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

최영오(崔永午)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

최영만(崔永萬)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최화재(崔化載) 용양위 사과(龍驤衛 司果)

최병만(崔柄萬)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최태원(崔太源) 부호군겸 오위장(副護軍兼 五衛將)

최여백(崔汝伯) 동관진 병마절제사(潼關鎭 兵馬節制使)

최태석(崔泰錫)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최봉천(崔奉天)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최영효(崔永孝) 무과 사과(武科 司果)

최은동(崔殷東) 상주진 좌영장겸 토포사(尙州鎭 左營將兼 討捕使)

최두삼(崔斗三)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흡(崔 흡) 여절교위(勵節校尉)

최용학(崔龍鶴) 자인군수(慈仁郡守)

최계주(崔季周)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최국삼(崔國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광진(崔光鎭)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성원(崔性源)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

최성창(崔性昌)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

현대인물 별첨

효부권씨(孝婦權氏) 권씨는 안동인 문충공(文忠公)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후손으로 영천 최련(崔鍊)의 아내가 되었다. 시부(媤父)는 영우(永佑)이다. 시아버지가 일찍 학질을 앓아 오래도록 병이 낫지 않자 권씨가 지성으로 구료하며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었더니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인육이 좋다”고 말하기에 자신의 왼쪽 다리살을 손바닥 크기로 잘라 부엌에서 끌이고 있는데 때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솥에 날아들어 함께 끓어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리고 효부가 며칠 사이에 상처가 다 나았다. 그러나 권씨는 명이 짧아 28세에 요절하였다. 이 효행을 표양함은 후대 사람들에게 권함이 아니고 특이함을 들어올릴 뿐 부모와 구고(舅姑)에게 불순(不順)한 자들이 이를 듣고 두려워할 줄 알면 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