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양주최씨시조(楊洲崔氏),최억(崔億),양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4 19:51 수정일 : 2019-02-15 14:4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양주최씨(楊洲崔氏)의 시조(始祖) 최억(崔億)은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때 한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이 높아 태사(太師)에 천거(薦擧)되었고, 1353년(공민왕 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양주군(楊洲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억(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주(楊洲)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양주(楊洲)는 경기도(京畿道)중앙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매성군(買城郡)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 하였는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내소(來蘇)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견주(見州)로 승격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양주(楊洲)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는 다시 양주(楊洲)로 개칭한 뒤 1895년(고종 32) 목(牧)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대표적인 인물

그 후 문경공(文敬公) 억(億)의 아들 연(淵)이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했고, 손자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지냈으며, 증손 경운(慶雲)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경운의 아들 항(沆)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양주 최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안(井安)은 1433년(세종 15)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437년(세종 19) 이 천(李 蕆)의 종사관으로 함경도(咸鏡道)에 침투한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후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다.

정안의 동생 정연(井涓)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정연의 아들 결(潔)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혼(渾)의 아들 홍도(弘渡)는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45년(인종 1) 저작(著作)을 거쳐 1564년(명종 19)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홍도(弘渡)의 동생 홍개(弘漑)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후손 정걸(挺傑)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적군을 쳐부수는 데 용맹(勇猛)이 뛰어나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그외 완(浣)은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정해(挺海)는 절제사(節制使)를, 극태(克泰)는 군수(郡守)를, 선태(先泰)는 부사(府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주최씨(楊洲崔氏)는 전국에 4,5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양주최씨조상인물 

최숙(崔 淑) 고려말(高麗末)에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최경운(崔慶雲) 자(字)는 응화(應化). 고려말(高麗末)에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최항(崔 沆) 자(字)는 공형(公形). 1390년(공양왕 1) 문과에 급제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였다.

최정안(崔井安) 자(字)는 안지(安之), 호는 아행(雅行). 1427년(세종 9)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1433년(세종 15)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437년(세종 19) 이 천(李 蕆)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경도(咸鏡道) 지방에 침입한 야인(野人) 정벌에 공(功)을 세웠고 후에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최정연(崔井涓) 조선(朝鮮) 때 고산 현감(高山縣監)․김제 군수(金瑅郡守) 등을 지냈다.

최용(崔 溶) 자(字)는 윤생(允生), 호(號)는 춘곡(春谷).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를 등을 지냈다.

최결(崔 潔)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소종(崔소宗) 자(字)는 건중(建仲). 조선(朝鮮)에서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최자숙(崔自淑) 조선(朝鮮) 때 장령(掌令)․군수(郡守) 등을 지냈다.

최자옥(崔自沃)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최자준(崔自濬) 조선 때 충무위 부사직(忠武尉府使直)을 역임했다.

최추(崔 樞) 자(字)는 사직(仕直). 조선(朝鮮)에서 삭주 부사(朔州府使)를 지냈다.

최즙(崔 楫) 조선조(朝鮮朝)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최혼(崔 渾) 자(字)는 태호(太浩), 호(號)는 독선당(獨善堂).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인물로 학문(學問)과 덕행(德行), 특히 예법(禮法)에 고결(高潔)하였다.

최형(崔 逈)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최관(崔 灌) 자(字)는 영오(永五).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최홍도(崔弘渡) 자(字)는 경제(景濟), 호(號)는 구포(鷗浦). 1539년(중종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저작(著作)을 거쳐 1564년(명종19) 사도시 부정(司導寺副正)을 역임하였으며,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최홍개(崔弘漑) 자(字)는 경여(景汝). 혼(渾)의 아들. 홍도(弘渡)의 동생.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절(殉節)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최준(崔 浚) 자(字)는 덕원(德遠), 호(號)는 고산(孤山). 1570년 세마(洗馬)에 올라 좌랑(左郞)․현령(縣令)․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功)을 세웠다.

최완(崔 浣)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정해(崔挺海) 자(字)는 탁이(卓爾). 조선(朝鮮) 때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최정걸(崔挺傑)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王)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적군(敵軍)을 쳐부수는데 용맹(勇猛)이 뛰어나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최극태(崔克泰) 자(字)는 형중(亨仲).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선태(崔先泰) 자(字)는 여형(汝亨). 조선조(朝鮮祖)에 부사(府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