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최씨시조(安東崔氏),최강윤(崔光胤),안동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4 18:14 수정일 : 2019-02-14 10:43

안동최씨의 연원(安東崔氏의 淵源)

안동최씨는 慶州 崔氏로부터 분파된 제일 최초의 씨족이다. 뿐만 아니라 안동 최씨는 국가역사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득성한 씨족이다.안동최씨의 시조이신 최강윤(崔光胤)은 慶州 崔氏의 始祖이신 최치원(崔致遠)과는 6촌의 계촌관계에 있으니 지근한 친족간이다.

이러한 관계인데도 별본(別本)이 된 연유는 안동 최씨 시조이신 崔光胤(최광윤) 할아버지께서 中國(당시 東晋)에 유학가든 차 글안(契丹)땅을 지나다 글안정부에 피납되어 당시 형세로서는 글안이 고려인이라면 불문곡직하고 처형하였는데 광윤 할아버지는 이미 高麗에서 賓貢進士(빈공진사)에 합격하였느니 만큼 그 학문이 글안으로서는 스승으로 모실정도가 되니까 목숨을 살리고 예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글안에서 고려를 침공할 밀계를 꾸미는 것을 탐지하고 마침 龜成(구성)에 나들이 할일이 있어 구성에 가서 고려조정에 글안의 고려침공 밀계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밀통함으로써 고려 定宗(정종)은 30萬 光軍(광군)을 편제하여 대비하도록 하였다.

고려에서 이와 같이 철통같이 대비하니 글안도 고려 침공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훗날 광윤 시조 할아버지께서 고려에 귀국하게 되자 定宗은 앞서 구성 밀서를 보내 국난을 방지하게 한 공훈을 치하하여 監察御使를 제수하고 안동최씨로 창씨하게 하였다.

신라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노회한 국제외교로 삼국통일을 하였고 고려 서희는 외교변설로 전쟁을 머물게했고 이순신 장군은 해전승리로서 일본군을 숨죽였는데 우리 최광윤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우리역사 최초로 외국정보를 활용하여 국난을 대비하여 차단시켰으니 그 공이 민족역사에 지대하다 할 수 있으며 이는 구전되어오는 야사가 아니라 고려역사의 정사에 기록된 확실한 내용이다.

또 고려 태조 王建이 眞空大師塔碑文을 찬하여 광윤 할아버지께 비문을 맡기자 광윤 할아버지는 唐나라 太宗文皇帝의 글씨를 集子(집자)하여 原州 興法寺(원주 흥법사)에 건립하였다.(AD 940)

광윤 시조 할아버지는 東晋유학길에 오르기 전부터 太祖가 찬한 비문을 맡길 정도로 문재와 신임이 특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인물 - 안동최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최언위(崔彦儰) 초명은 愼之(신지) 또는 仁沇(인연) 시호는 文英(문영)이며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이며 정치가로 서예와 문장에 있어 당대 으뜸이었다.

885년(신라 헌강왕11)에 唐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909년(신하 효공왕13)에 귀국하여 執事省侍 郞을 지냈다. 그 후 고려가 개국되자 935년(太祖18) 태자사부가 되고 文翰을 거쳐 원봉성대학사, 한림원 령, 平章事를 지냈다.

77세로 사망하자 시호가 내려지고 政國에 추증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문장과 서체로는 다음과 같은 12 개의 비문이 있다.

최광윤(崔光胤) 平章事 최언위의 첫째 아들이다. 賓貢進士科에 합격하고 東晋에 유학가던 중 契丹(글한)에게 피납되어 生命이 위급하였으나 높은 학문에 탄복하여 글안조정에서 중히 활용코자 하여 생명이 부지되었다.

최행귀(崔行歸) 최언위의 둘째 아들이다. 중국 吳越國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원봉성 학사와 광평시랑(정승 급)을 역임하였다.

최광원(崔光遠) 최언위의 셋째 아들로서 秘書少監을 지냈다

최항(崔 沆) 光胤의 子 成宗十年 文科壯元及第 穆宗朝 翰林學士, 師傳 八關會復活 逆臣 金政陽 除去 顯宗擁立 內史侍郞 平章事 忠盡節衛社功臣 崔冲 등 학자를 거느리고 高麗史編 追贈.政國, 加贈侍中, 諡號 節義公 顯宗廟庭에 免亨

최유부(崔有孚) 沆의 子로서 右僕事를 지냄 父卒後朝庭에서 비단 五百疋 布五百疋 米麥各一千石을 賻하였으나 父의 遺命으로 사양하였음

최공익(崔公翊) 최유부의 아들로서 尙書를 지냄

최집 최공익의 아들로서 尙書를 지냄

최충구(崔忠球) 최집의 아들로서 兵馬使를 지냄

최정반(崔正潘) 최충구의 아들로서 判官을 지냄

최지목(崔之牧) 최정반의 아들로서 密直副使를 지냄

최숭(最 崧) 최지목의 아들로서 承旨를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