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낭주최씨시조(郎州崔氏),최흔(崔昕),낭주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4 15:16 수정일 : 2018-02-20 12:46

시 조

낭주최씨(郎州崔氏)의 상계(上系)는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최흔(崔昕)이 낭주(郎州 : 지금의 영암)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역임하고 영암(靈岩)에 정착하여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繁昌)했으므로 후손들이 흔(昕)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낭주(郎州)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의 유래

낭주(朗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영암(靈岩)의 옛 이름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월내군(月奈郡)이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영암군(靈岩郡)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낭주군(郎州郡)이라 개칭하였다가 1096년(헌종 9)에 영암군(靈岩郡)으로 복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흔의 아들 지몽(知夢)은 초명이 총진(聰進)으로 907년(신라 효공왕 11) 영암군 동구림리(東鳩林里)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精通)하였다.

나이 18세 때 태조(太祖)가 그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吉 兆)를 얻어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이다.”하여 태조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 주고 금의(錦衣)를 내려주고 공봉(供奉)의 관직에 임명하였다.

태조(太祖)때부터 60여년 간 중신(重臣)으로 봉직(奉職)한 그가, 987년(성종 6) 3월에 졸(卒)하자 왕(王)이 매우 슬퍼하여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함과 동시에 민휴(敏休)란 시호(諡號)를 주었으며, 후에 태사(太師)를 증직하여 경종(景宗)의 묘정(廟廷)에 배향하였다.

그후 후손 안우(安雨)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봉열대부(奉列大夫)와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侍少監)을 거쳐 재상(宰相)에 올랐다.

그는 평소에 성품(性品)이 강직(强直)하고 성리지학(性理之學)에 밝았으며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등과 도의(道義)를 나누며 시(時)를 주고 받았다.

고려(高麗)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 : 현 전남 나주군 봉황면 만봉리) 도성산(道成山)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기리면서 호(號)를 죽계(竹溪)라 칭하고 세상을 등진 채 종신(終身)하였다.

안우의 아들 운(雲)은 조선(朝鮮)에서 현감을 지냈으며, 운의 아들 네 명이 모두 벼슬에 올랐는데 장남 양(漾)이 지현(知縣)에, 차남 장(장)은 현령(縣令)에 올랐고 셋째 상(湘)과 넷째 영(渶)은 계공랑(啓功郞)과 찰방(察訪)을 각각 역임했다.

그 외 후손 치호(致湖)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으며, 산두(山斗)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시켰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낭주최씨(郎州崔氏)는 전국에 17,2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낭주최씨조상인물

최지몽(崔知夢) 907(효공왕 11)~987(성종 6) 초명은 총진(聰進), 시호는 민휴(敏休), 원보상 흔(昕)의 아들. 남해영암군(南海靈岩郡) 출신. 대광(大匡) 현 일(玄 一)에게 글을 배워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다. 18세 때 왕건(王建 : 태조)에게 그 이름이 알려져 부름을 받아 왕건이장차 삼한(三韓)을 통일할 것이라는 해몽(解夢)을 함으로써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공봉직(供奉織)에 등용되었다.

태조(太祖)가 3국을 통일 한 후 궁중에서 고문(顧問)으로 왕을 모셨으며, 945년(혜종 2) 사천관(司天官)으로 있을 때 왕 규(王 規)의 모반을 예언했고, 이해 정종(定宗)이 즉위한 뒤 모반이 진압되자 상을 받았다.

광종(光宗)때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한 왕을 호종, 이때 술에 취하여 왕에게 예(禮)를 지키지 못했다하여 외걸현(외傑縣)으로 유배되었다가, 980년(경종 5) 풀려 나와 대광(大匡)․내의령(內議令)․동래군후(東萊郡候)․주국(柱國)이 되었다. 이때도 별을 보고 왕 승(王 承)이 모역(謀逆) 사건을 예언하여 이를 미연에 방지하게 했다.

982년(성종 1) 좌집정(左執政)․수내사령(守內史令)․상주국(上柱 國)에 올라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이 호를 받았고, 그부모도 봉작(封爵)되었다. 987년(성종 6) 와병(臥病)했을 때 왕이 친히 문병하며 약을 내리고, 귀법사(歸法寺)와 해안사(海安寺)에 말 두필을 시주하고 3천 승려들로 하여금 불공을 드리게 했다. 태사(太師)에 추증(追贈), 경종(景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국암사(國岩 祠)와 동산사(東山詞)에 제향되었다.

최안우(崔安雨) 호(號)는 장수(長水).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봉열대부(奉列大夫) 및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寺少監)을 거쳐 재신(宰臣)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아서 평소 정몽주(鄭夢周)․이 색(李穡)등과 도의(道義)를 나누며 시(時)를 주고 받았다.

최운(崔 雲)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장(崔 漲) 조선(朝鮮)때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최상(崔 湘) 조선(朝鮮)에서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최영(崔 瑛) 조선(朝鮮)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최사경(崔思敬) 조선조(朝鮮朝)에 통직랑(通直郞)으로 지용주사(知龍州事)를 역임했다.

최홍의(崔弘毅) 조선(祖先)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형한(崔亨漢) ?~1504(연산군 10)

자(字)는 탁경(卓卿), 호(號)는 영사정(永思亭), 생원(生員) 영원(英源)의 아들. 1480년(성종 11) 진사(進士)가 되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전교서 정자(典校曙正字)가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 1498년(연산군 4) 헌납(獻納)을 거쳐 장령(掌令)․영암군수(靈岩郡守)를 지냈다.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김일손(金馹孫)․성 현 (成 俔)등과 교유(交遊)가 깊었다.

최윤문(崔潤文) 호(號)는 연정(蓮亭).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최득초(崔得超) 조선(朝鮮)때 봉직랑(奉直郞)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최득금(崔得衿) 조선조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최중림(崔仲霖) 호(號)는 학봉(鶴峯). 조선에서 세마(洗馬)․습독(習讀)등을 지냈다.

최자혁(崔自赫) 조선(朝鮮)때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최명장(崔命葬) 조선(朝鮮)때 시강원 습독(侍講院習讀)․찬선(贊善)을 역임하였다.

최노겸(崔勞謙)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추(崔 湫) 호(號)는 난계(蘭溪). 조선(朝鮮)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최황(崔 滉) 호(號)는 은곡(隱谷). 조선(朝鮮)때 사헌부(司憲府)으 지평(持平)․장령(掌令)등을 지냈다.

최정한(崔挺漢 조선(朝鮮)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최광정(崔光晶)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최사렴(崔士濂) 조선 때 승의랑(承議郞)으로 습독(習讀)을 지냈다.

최치호(崔致湖) 호(號)는 상덕재(尙德齋). 조선에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최거(崔 鐻) 조선(朝鮮)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최덕복(崔德福) 조선조에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摠管)을 지냈다.

최덕만(崔德萬)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

최택겸(崔澤謙) 호(號)는 역암(櫟菴).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최풍서(崔豐瑞) 조선(朝鮮)때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최진하(崔鎭河) 호(號)는 묵암(黙菴).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다.

최몽암(崔夢嵒) 1718(숙종 44)~?

자(字)는 내설(內說), 호(號)는 양오당(養吾堂). 화종(華宗)의 아들. 1750년(영조 2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도정(都正)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지사(知事)․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최산두(崔山斗) 자(字)는 여명(汝明), 호(湖)는 역재(櫟齋). 조선(朝鮮)에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으며 문하(門下)에 많은 명사(名士)가 배출되었다.

최창구(崔昌龜) 자(字)는 대갑(大甲), 호(號)는 송암(松菴). 조선(朝鮮)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최창룡(崔昌龍) 자(字)는 대린(大麟), 호(號)는 경암(鏡菴). 조선에서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냄.

최봉기(崔鳳岐) 자(字)는 내성(乃聖), 호(號)는 죽포(竹圃). 조선 때 지사(知事)를 역임했다.

최상헌(崔相憲) 자(字)는 정수(正洙), 호(號)는 송암(松菴).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병욱(崔秉煜) 호(號)는 금몽(錦夢). 조선조에 장령(掌令)을 지냈다.

최경호(崔璟浩) 호(號)는 묘당(墓堂). 조선 때 수봉관(守奉官)을 지냈다.

최상찬(崔尙纘) 자(字)는 도일(道一), 호(號)는 만취(晩就). 조선조(朝鮮朝)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하였다.

최창린(崔昌麟) 자(字)는 낭옥(良玉), 호(號)는 정사(鼎史).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최경남(崔慶男) 조선(朝鮮)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최규문(崔圭文) 자(字)는 여형(汝炯),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조(朝鮮朝)에 효자(孝子)로 이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