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개성최씨시조(開城崔氏),최우달(崔佑達),개성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2 12:26 수정일 : 2019-02-12 13:5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개성최씨(開城崔氏)의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은 원래 황주 토산현(土山縣) 사람으로 신라조(新羅朝)에 대상(大相)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응(凝)이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개국(高麗開國)에 공을 세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세거(世居)하며 호족(豪族)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우달(佑達)을 시조(始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려(高麗)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화동(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최우달의 아들 응(凝)은 개성 최씨의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어머니가 애기를 배었을 적에 그 집에 누런 오이 덩굴이 있었는데 갑자기 참외가 맺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게 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그 부모가 숨겨서 길렀는데, 그후 이미 장성하여서는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글짓기를 잘하여 궁예 밑에서 한림(翰林)이 되어 매우 존경을 받았다.

915년(신라 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모반(謀叛)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을 하자 응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줍고자 뜰에 내려와서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띔해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 고려가 개국하여 왕건이 즉위하자 원봉성사(元鳳省事)를 거쳐 광평 낭중 (廣評郎中)으로 승진하고 이어 내봉경(內奉卿)․광평시랑을 역임하며 태조(太祖)의 총애를 받았다. 932년(태조 15)에 그가 35세로 죽으니 태조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증직했다.

이외 후손 천보(天寶)가 조선(朝鮮)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명창(命昌)은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수찬(修撰)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예조 참판(禮曺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일찍이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하였던 입(岦)은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하였고, 여러번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 호(韓 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컫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최씨(開城崔氏)는 남한(南韓)에 9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개성최씨조상인물

최응(崔 凝) 898(효공왕 2)~932(태조 15) 시호(諡號)는 희개(熙愷), 대상(大相) 우달의 아들. 오경(五經)에 통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궁예(弓裔) 밑에서 한림랑(翰林郞)이 되어 사령(辭令)을 받아 쓰는 등으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라 신덕왕 4)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모반(謀叛)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이를 변명하자 일부러 붓을 떨어뜨린 다음 이를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띔해 주어 왕건으로 하여금 굴하게 하여 화를 면하게 했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 그가 즉위하자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를 거쳐 광평 낭중(廣評郎中)으로 승진, 내봉경(內奉卿)․광평 시랑(廣評侍郞)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에 추증(追贈),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최천보(崔天寶) 조선(朝鮮)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다.

최유(崔 濡) 조선조(朝鮮朝)에 지사(知事)를 역임하였다.

최철손(崔鐵孫) 조선(朝鮮)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최명창(崔命昌) 1466(세조 12)~1536(중종 31) 자(子)는 여신(汝愼), 호(號)는 송석(松石)․송음(松陰), 한성부윤(漢城府尹) 천보(天寶)의 증손, 철손(鐵孫)의 아들. 1489년(성종 20) 진사(進士)가 되고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급제, 1509년(중종 4)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헌납(獻納)․지평(持平)․응교(應敎) 등을 역임했다.

1519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후 이듬해 병으로 사임, 후에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관찰사와의 충돌로 다시 사임, 서울 동쪽 상계동(雙溪洞)에 은거했다.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