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강화최씨시조(江華崔氏),최익후(崔益厚),강화최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1 18:14 수정일 : 2018-02-25 16:29

시 조

강화최씨시조(江華崔氏 始祖) 최익후(崔益厚)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를 지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강화(江華)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의 유래

강화(江華)는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아득한 옛날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다가 고구려(高句麗)때 혈구군(穴口郡), 신라(新羅)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불리웠다.

그 후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 몽고의 침입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2세 효장(孝章)이 고려때 도평리(都評理)를 지냈으며 3세 중의(重義)는 시중(侍中)을 지냈다.

중의(重義)의 동생 광의(光義)는 지도성사(知都省事)를 역임하였고, 광의(光義)의 아들 근(瑾 : 충숙공)은 1232년(고종 19) 상장군(上將軍)으로 이 통(李 通)의 난을 토평(討平)하고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종수(宗秀)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야)를 지냈으며, 손자 유(蕤)는 선부전서(選部典書)․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예부 상서 등을 역임했고, 수진(秀眞)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백전(伯全)의 손자이며 판사(判事)를 역임한 홍(泓)의 아들인 용소(龍蘇)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1394년(태조 3)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本國人) 570여 명을 데리고 왔으며, 1397년(태조 6)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거쳐 다음 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가 되고 1400년(태종 1) 도진무(都鎭撫)를 역임한 후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형조 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용소(龍蘇)의 동생 귀수(龜壽)는 목은(牧隱) 이 색(李 穡)․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교유하며 벼슬이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는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충신(忠臣)의 절개(節槪)를 지켰다.

한편 수진(秀眞)의 아들 항(恒)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항의 아들 유간(有澗)은 개성소윤(開城小尹)을 지냈다.

중종(中宗) 때 예조 판서를 역임한 한문(漢文)은 귀수(龜壽)의 증손이며, 그의 아우 자윤(自潤)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인 남 곤(南 袞) 일당의 비행을 논척(論斥)하고 양주 사천(楊州沙川)으로 퇴거하여 살았다.

귀수(龜壽)의 현손(玄孫) 수(琇)는 1590년(선조 23) 과거에 등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순(淳)과 당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宣祖) 때 장령(掌令)을 지낸 시망(時望)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였고, 희립(希立)은 선조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등과 함께 진주(晋州)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여 강화 최씨의 가문을 영광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최씨(江華崔氏)는 남한(南韓)에 13,3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강화최씨조상인물 

최효장(崔孝章) 고려(高麗)때 도평리(都評理)를 지냈다.

최중의(崔重義) 고려(高麗)에서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최광의(崔光義) 고려조에 지도성사(知都省事)를 역임하였다.

최근(崔瑾)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등을 역임하고, 1232년(고종 19) 이통(李通)의 난(亂)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조겸경(趙兼卿)을 중군진주(中軍陳主)로, 상장군(上將軍) 최근(崔瑾)은 우군진주(右軍陳主)로, 상장군(上將軍) 이자성(李子晟)은 좌군진주(左軍陳主)로 각각(各各) 삼아 승천동교(昇天東郊)에서 대파,토평(討平)하였다.

최종수(崔宗秀) 고려(高麗)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냈다.

최종소(崔宗紹) 고려(高麗)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최유(崔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15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선부 전서(選部典書)․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하여 조부(祖父) 근(瑾), 부(父) 종수(宗秀)와 더불어 3대(代) 대제학을 지냈다.

최백전(崔伯全) 고려조(高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최계진(崔季眞) 고려(高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최홍(崔泓) 백전(伯全)의 아들. 고려조에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최항(崔恒) 계진(季眞)의 아들. 고려(高麗) 때 삼사 부사(三司副使)를 지냈다.

최염(崔恬) 고려조(高麗朝)에 소윤(少尹)을 지냈다.

최용소(崔龍蘇) ?~1422(세종 4) 시호(諡號)는 제정(劑貞). 의릉직(毅陵直)을 지낸 뒤에 감찰규정(監察糾正)․계림 판관(鷄林判官)․이성등처 관군만호(泥城等處管軍萬戶)를 거쳐 1370년(공민왕 19) 전라도 체복사(全羅道體覆使)를 역임하고, 이어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 1394년(태조 3) 회례사(回禮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규우슈우 절도사(九州節度使) 이마까와(今川了俊)에게 국서(國書)를 전하고 이듬해 포로로 잡혀가 있던 본국인 570 여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397년 상의중추원사(商義中樞院事), 다음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가 되고 1400년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使)로 재직중 제2차 왕자의 난에 방간(芳幹)의 일파로 몰려 삭직(削職)되고 장형(杖刑)을 받았다. 곧 등용되어 1403년(태종 3) 승녕 부윤(承寧府尹)이 되고, 좌군총제(左軍摠制)․안동 부사 (安東府使)를 거쳐 1413년 형조 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공조 판서․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판한성 부사(判漢城府使)에 이르렀다.

최귀수(崔龜壽) 용소(龍蘇)의 동생. 고려(高麗)에서 사복시경(司僕寺卿)을 지내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과 더불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을 사사(師事)하여 문장덕행(文章德 行)이 빛났으며, 태조(太祖)가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최유간(崔有澗) 조선(朝鮮) 때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역임하였다.

최유강(崔有江) 조선(朝鮮)에서 지협주사(知陜州事)를 역임하고, 국가에 공(功)을 있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최세창(崔世昌) 조선(朝鮮) 때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다.

최세염(崔世廉)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최복해(崔福海) 조선조(朝鮮朝)에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을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최안우(崔安雨) 조선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승우(崔承雨)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함우(崔涵雨)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흥우(崔興雨) 조선조(朝鮮朝)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을 역임하였다.

최도융(崔道融) 조선(朝鮮) 때 지양주사(知楊州事)를 역임하였다.

최천갑(崔天甲) 조선(朝鮮)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다.

최천병(崔天丙) 조선(朝鮮)에서 상서(上書)를 역임하였다.

최상온(崔尙溫) 천병(天丙)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사정 총랑(司正摠郞)을 지냈다.

최거(崔 渠) 조선(朝鮮)에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고, 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탐진(眈津)으로 좌천되자 전남 남평(全南南平)에 은거(隱居)하여 낙향조(落鄕朝)가 되었다.

최유(崔 洧)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예(司藝)를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최저(崔 渚)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최강(崔 江) 승우(承雨)의 아들.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자하(崔自河) 조선(朝鮮)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최자추(崔自湫) 조선(朝鮮)에서 전첨(典籤) 사직서령(社稷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최연년(崔延年) 조선(朝鮮)때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최연명(崔延命)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최한문(崔漢文) 조선(朝鮮)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고, 남 곤(南 袞)․심 정(沈 貞)의 화(禍)를 입어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으로좌천되자 익산(益山)에 거주, 낙향조(落鄕祖)가 되었다.

최윤문(崔潤文) 승우(承雨)의 아들.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최백천(崔百川) 흥우(興雨)의 손자.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최담(崔 潭) 흥우(興雨)의 손자. 조선(朝鮮) 때 연풍 현감(延豊縣監)을 역임하였다.

최윤형(崔潤亨) 자(字)는 달경(達敬), 호(號)는 풍구(楓邱). 조선조에 헌릉 참봉(獻陵參奉)․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등을 지냈다.

최순(崔 淳) 자(字)는 안경(安卿).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증산 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최오(崔 澳) 조선(朝鮮) 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최인(崔 潾) 1478년(성종 9)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최자숙(崔自淑) 자(字)는 용기(用己). 조선(朝鮮)에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지냈다.

최광연(崔廣淵) 자(字)는 자청(子淸). 조선조(朝鮮朝)에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최호(崔 灝) 자(字)는 혼중(混仲). 1514년(중종 9)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주층(追贈)되었다.

최덕종(崔德種) 자(字)는 매지(邁之). 1541년(중종 3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최덕수(崔德秀) 조선조(朝鮮朝)에 영춘 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최덕준(崔德俊)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최덕계(崔德溪) 자(字)는 사도(師道). 조선(朝鮮)에서 청릉 참봉(淸陵參奉)을 지냈다.

최원해(崔元海) 자(字)는 성신(聖臣).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냈다.

최언순(崔彦純) 자(字)는 유초(有初). 조선(朝鮮) 때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지냈다.

최명순(崔命順) 자(字)는 중수(仲受), 호(號)는 동계(東溪). 박육봉(朴六峰)의 문인(門人).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영암 훈도(靈岩訓導)를거쳐 정자(正字)를 역임하였다.

최경린(崔慶麟) 자(字)는 화백(和伯). 조선에서 부장(部將)을 지냈다.

최서린(崔瑞麟) 자(字)는 중화(仲和). 조선조(朝鮮朝)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최상린(崔祥麟) 자(字)는 계화(季和).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최승세(崔承世) 자(字)는 경윤(景胤). 조선(朝鮮)에서 용강 현령(龍剛縣令)을 지냈다.

최시망(崔時望) 자(字)는 자유(子裕), 호(號)는 괴정(槐亭). 1582년(선조15) 문과(文科)에 급제, 장령(掌令)을 거쳐 전한(典翰)을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을 일으켜 공(功)을 세워 효충선무공신(效忠宣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최정망(崔廷望) 조선(朝鮮)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최공망(崔公望) 자(字)는 자옹(子顒). 1610년(광해군 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최민망(崔民望)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삼락헌(三樂軒). 조선조(朝鮮朝)에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최태망(崔台望)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최중용(崔重龍) 자(字)는 운경(雲卿).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며,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최선(崔 選)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최방(崔 逄) 자(字)는 대용(大用).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 감찰(監察)․주부(主簿) 등을 역임했다.

최응진(崔應津) 조선(朝鮮)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최수(崔 琇) 자(字)는 영중(瑩仲), 호(號)는 미옹(迷翁). 1590년(선조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사도 방백(四道方伯)․부제학(副提學)․호조 판서(戶曹判書)등을 역임하고, 1624년(인조 2)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최숙(崔 璹)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이재(易齋). 조선(朝鮮) 때 진위 현령(振威縣令)을 역임하였다.

최규(崔 珪) 자(字)는 집중(執仲), 호(號)는 일곡(逸谷). 조선(朝鮮) 때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희립(崔希立)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효암(孝庵).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고경명(高敬命)의 휘하(麾下)에서 전공을 세웠고, 진주성(晋州城)에 주둔하여 사수(死守)를 다짐했으나, 왜군의 대군이 내습하여 역부족으로서 성(城)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등과 더불어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했다.

최동헌(崔東獻) 자(字)는 사징(士徵), 호(號)는 비암(飛庵). 조선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냈다.

최선헌(崔善獻) 자(字)는 군택(君擇), 호(號)는 양심재(養心齋). 조선조(朝鮮朝)에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최신헌(崔身獻) 자(字)는 사비(士泌), 호(號)는 뇌(懶). 조선에서 문과 (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최호(崔 濩) 자(字)는 사함(士涵), 호(號)는 죽촌(竹村),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간(司諫)을 지냈다.

최봉년(崔鳳年) 자(字)는 상노(祥老). 조선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가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역전전망(力戰戰亡)하여 공신록(功臣錄)에 기록되었다.

최시량(崔始量) 자(字)는 공작(公綽).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최달원(崔達源) 자(字)는 여해(汝海), 호(號)는 관가정(觀稼亭). 조선조(朝鮮朝)에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냈다.

최진원(崔進源) 자(字)는 여한(汝漢), 호(號)는 육일당(六逸堂).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최도원(崔道源) 자(字)는 여수(汝洙), 호(號)는 오봉(五峰). 조선에서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최조원(崔造源) 자(字)는 종지(宗之). 조선(朝鮮) 때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최상립(崔商岦)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지냈다.

최준창(崔俊昌) 자(字)는 윤무(允武). 조선조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했다.

최경(崔 警) 자(字)는 신중(愼重).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최경제(崔景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모병(募兵)에 공이 있어, 후에 능주 도유사(綾州都有司)가 되었다.

최기남(崔起南) 초명은 상두(尙斗), 자(字)는 좌칠(佐七), 호(號)는 눌곡(訥谷). 조선에서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였다.

최훤(崔 煊) 자(字)는 명거(明擧).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강원 도사(江原都事)를 지냈다.

최수징(崔壽徵)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수첨(崔壽瞻)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최향(崔 晑) 자(字)는 숙발(淑발). 조선(朝鮮) 때 결성 군수(結成郡守)를 지냈다.

최창의(崔昌義) 자(字)는 명옥(鳴玉), 호(號)는 송와(松窩). 조선에서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최명옥(崔鳴玉) 자(字)는 자성(子成), 호(號)는 성암(誠庵).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최지성(崔之聖) 자(字)는 양여(讓汝), 호(號)는 환재(環齋).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지평(持平)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냈다.

최광현(崔光鉉) 자(字)는 성약(聖若).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최권(崔 權) 자(字)는 삼여(三汝).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최진영(崔鎭榮) 자(字)는 덕삼(德三), 호(號)는 기은(箕隱). 조선(朝鮮)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최남교(崔南敎)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담원(澹園).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최우락(崔禹洛) 자(字)는 사범(士範), 호(號)는 송사(松史).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을 거쳐, 용안(龍安)․이원군수(利原郡守)를 지냈다.

최용징(崔龍徵) 자(字)는 자운(子雲).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최종현(崔種賢) 초명(初名) 종탁(鍾濯). 한말(韓末)에 기미독립만세(己未獨立萬歲)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